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3장 행주대첩과 전라도 병사들<264>

“우리는 조선군 응원부대다. 적진을 뚫기 위해 강물을 타고 내려왔다.”

정충신이 창을 세워 겨누고 있는 장졸들 앞으로 가 신분을 말했다. 그러자 지휘자인 듯한 장골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의 주위에 소리없이 장졸 너댓 명이 활과 칼을 들고 호위하고 섰고, 정충신 뒤에는 그의 부하들이 버티고 섰다.

“당신들이 응원군이라고?”

지휘관인 듯한 사내가 정충신 얼굴 앞에 횃불을 들이미는데 정충신이 놀랐다.

“아니, 길삼봉 성님 아니오?”

관군은 아니고 모두들 헤진 농민군 복장인데 덩치큰 몸집에 머리를 산발한 채 눈을 번뜩이며 이쪽을 살피는 그는 분명 길삼봉이었다. 그도 금방 정충신을 알아보고 소리질렀다.

“맞다. 자네가 여기까장 뭔 일이여?”

그들은 평양의 칠성문 밖에서 만나 헤어진 뒤 반년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다.

“군인이 전쟁터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좌우지간 반갑제. 추웅개 막영으로 가세.”

두 사람은 바람 펄럭이는 천막으로 이동했다. 부하들이 그들 뒤를 따랐다.

“갈아입을 옷이 있승개 모두들 갈아입어.”

젖은 옷을 벗어 물을 짜내고 횃대에 넌 다음 낡은 것일망정 피복을 받아 입으니 살 것 같았다. 막사 안에도 장작불이 타고 있어서 언 몸을 녹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장할 틴디 식사해야제?”

마침 사냥해온 멧돼지와 노루 뒷다리가 남아있었다. 그것을 토막내 탕을 만들어 밥을 해먹으니 배가 든든하였다. 선사포 군졸들이 식곤증과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듯 짚덤불이 깔린 바닥에 쓰러지더니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어떻게 됐가니 여기까지 왔는가.”

주변이 조용해지자 길삼봉이 짚단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요.”

“나는 솔찬히 복잡하다 마시. 나가 묘향산 보현사에 성환댁 데리고 가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내 꼴이 한심하더란 말이시. 명색 인백(仁伯)의 제자가 이 꼴이라니... 해서 절을 나와 전국을 돌며 대동계원들을 모았제.”

인백은 정여립의 자였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짓고 대동계를 조직해 매달 활쏘기와 무기 제조 등 힘을 키웠다. 훈련대장이 길삼봉이었다. 그 조직의 군사적 능력은 컸다. 1587년(선조20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입하자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출동해 물리친 실력이었다. 그러나 역모를 꾸민다는 모함과 음해로 궤멸되었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ㆍ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역사(力士)들이 황해도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응인의 고변으로 일망타진되고, 정여립과 그 수하 수천 명이 체포되어 죽었다.

길삼봉은 흩어진 잔여 세력과 황해도 구월산 골짜기에서 연명하는 대동계원을 모아 다시 조직망을 확장했다. 훈련을 재개하니 어느새 작은 군벌(軍閥) 정도는 되었다. 그들을 이끌고 국문(鞫問)으로 동지를 죽인 송강 정철과 황해관찰사 한준을 잡아 복수하기 위해 해주 방면으로 나와서 임진강 하류를 건너 김포 통진땅을 거쳐 고촌 천둥산에 이르렀다.

“그란디 행주산성에서 왜군이 조선군을 포위했다는 거여. 권율 장군이 데리고 온 전라도 병사들이라는 것이여.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가울 판에 가만 있을 수 있는가? 그중에는 대동계원도 있을 테고. 그래서 부하들 이끌고 허벌나게 달려왔제. 행신 나루를 건너는 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것이여.”

“이곳은 김포 개성 강화도 연백까지 해로가 잡힌 곳이어서 요충지요. 여기마저 뚫리면 행주산성은 절망이요.”

“한마디로 좆되아버리제. 지금 왜적들이 고양 양주 쪽은 수천 병사를 이끌고 침입하여 민가를 태우고 곡물을 약탈하고 관군을 목잘라 태워죽이는 참획(斬獲)을 한다더라고. 그놈들이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을 싸그리 조자버렸다등만? 그 기세로 조선군을 악살(惡殺)내버린다고 행주산성으로 들어왔다는겨. 그러니 권율 장수가 위태롭지 않겠는가. 그를 따른 전라도 군사들도 고약하게 되었고 말이여. 하지만 나가 길목 하나를 열어놨응개 이 길 타면 보급로가 확보되네. 이 길로 증원군, 무기, 양곡을 지원하면 되네. 하제만 빨리 후속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여. 시간이 없네.”

그들이 끝없이 얘기하다 곯아떨어졌다. 깨어나니 아침이었다. 조반을 마치자 정충신이 행장을 갖췄다.

“권율 사또를 만나러 가야겠소. 간밤에 상의한대로 합시다. 필요할 때 성님 부를 거요.”

“그래야제. 전통(傳通)만 놓아. 언제든지 출동할 것잉개.”

정충신이 작별을 고하고 행주산성으로 올라가는데, 산은 높지 않았지만 한강을 앞에 두고 드넒은 평야 가운데 우뚝 서있어서 적에게 맨얼굴을 드러낸 꼴이었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