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을 다시 쓰다!
최유정(동화 작가>

다시 쓰기를 시작한다. 지난 해, 12월 출판사에 넘긴 원고가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2주 전, 근사한 레스토랑에 나를 초대한 출판사 편집장과 대표는 음식이 바닥날 무렵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난징이 보이지 않아요, 선생님.” “한 번만 더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발.” 음식이 남아있었지만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화가 났다. 분명 1주일 전 편집장은 내게 전화를 걸어 와 “지금 세 장 째 읽고 있는데 뒤 이야기가 너무 궁금합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선생님 원고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힐지 않네요.”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불시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4년 전, 어린이 책을 만들고 쓰고 그리는 몇 분과 제노사이드 공부 모임을 시작했다. 3시간 정도의 공부를 위해 7~8시간 차를 타고 가는 문산 길. 움직이기 싫어하는 나로서는 매우 큰 용기고 결단이었다. 하지만 횟수가 더해갈수록 나를 비롯한 성원들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져 갔다. 결국은 제노사이드에 관한 어린이 책을 내자는 결의에까지 이르렀으니 말이다. 보여주기 싫을 정도로 참혹하고 잔인한 집단 학살 현장을 어린이 책으로 펴내자는 결심은 이런 역사를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됐다. 작가가 마땅히 가져야 할 사회, 역사적 책무로 여겼다.

‘제노사이드’는 인종, 이념 대립을 이유로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학살, 절멸시키는 행위를 일컫는다. 세계 여러 제노사이드 중 이번에 내가 글을 쓰기로 한 ‘난징학살’ 은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뒤 다음 해 2월까지 난징에서 일어난 대량학살과 강간, 방화 등 6주간 난징에서 일어난 참혹한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6주 동안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해 살해 된 민간인의 수는 26만명 이상 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35만명 이상의 난징 시민이 살해되었다고 주장한다.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는 2~8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분군의 방화와 약탈로 난징시내의 건축물 약 23.8%가 불에 타고 88.5%가 파괴된 것으로 파악된다.

2주전으로 돌아가 예상치 못한 결과 즉 원고 퇴짜에 무척 큰 무력감을 느꼈다. 무력감은 어찌 다시 쓰나, 싶은 난감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글쓰기에 실패했다는 좌절감 때문이었다. 난징이 보이지 않는다는 편집장의 말이 머릿속에 뱅뱅 떠돌기 시작했다. 왜 실패했을까? 왜 퇴짜를 맞았을까? 되도록 빨리 원고를 다시 써주면 좋겠다는 편집장의 부탁을 무시하고 노트북을 닫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징이 보이지 않는다는 편집장의 말은 ‘난징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가’라는 표현이란 것을 깨달았다. 깨달음 뒤 다시 시작했다. 책을 펴들고 난징을 읽었다. 메모를 하고 전에 부쳐뒀던 포스트잇을 떼고 새로운 장에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다. 난징 및 대량학살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한 개인의 문제, 한 집단의 문제로 국한 해 이야기 될 수 있는 문제인가? 내가 80년 5·18 당시 계엄군이었다면 내게 쥐어진 총을 내던질 수 있겠는가? 광주시민이 아닌 계엄군을 향해 그 총부리를 돌릴 수 있겠는가? 수도 없이 되묻고 반문했다.

결국 내 고민은 학살을 자행, 진행한 집단, 그 집단을 움직이고 작동시키는 문화적 위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지점에 이르렀다. 몇 몇 개인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위험한 시기에 위험한 문화를 바탕으로 한 위험한 전체가 위험한 논리를 강요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라고 생각하게 됐다. 사람들을 살인병기로 만들어버리는 문화적 위력! 사람의 천성을 변질시키는 문화적 위력! 위험한 문화적 위력이 어떤 맥락과 지점에서 어떻게 작동되는가, 그것이 더 본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살의 현장에서 만난 중국소녀와 어린 일본 병사를 주인공으로 세우고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너무 어리고 미숙해 ‘천황의 아들’이 되지 못한 일본 병사. 그 일본 병사와 중국 소녀가 학살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글을 쓰는 작업은 늘 힘들다. 필력이 부족한 까닭이고 상상의 한계에 늘 봉착한다. 실패의 반복이고 뉘우침의 연속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전후 나는 내가 어느 지점, 어느 맥락에 머물고 있는가,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게 되고 나를 발견하게 된다. 글쓰기를 통해 수동적 방관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능동적 인간으로 늘, 다시 태어나곤 한다. 어렵고 힘들 지라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되어주고 있는 글쓰기! 나는 난징을 통해 거듭나고 있다. 부디 난징의 새 주인공, 첸첸과 오타지가 새롭게 시작하는 글에서 강한 생명력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바란다. 다시는 이 지구상에 더 이상의 참혹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첸첸과 오타지가 평화의 기운을 만들어 나가기를 바란다. 오늘도 열심히 첸첸과 오타지를 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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