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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3장 행주대첩과 전라도 병사들<270>

왜군은 수천 병사의 시체를 버리고 패주했다. 행주산성 중턱과 벌판에는 왜군의 시체가 방목장의 말똥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벌판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찢겨진 깃발이 나풀거리고 있었는데, 전쟁의 상흔은 한결같이 이렇게 처참했다.

권율은 선봉대를 한양으로 보낸 뒤 산성의 토성과 목책들을 시찰했다. 끊임없이 불을 뿜었던 화차와 수차석포 곁에 다가가 포신을 받치고 있는 틀을 만지며 감회에 젖었다.

정충신이 권율을 수행했다. 그들은 할아비와 손자처럼 다정해보였다.

“이기려고 하면 모든 것들이 일어나서 돕는 법이다. 그 조건이 무엇이겠느냐.”

권율 장군이 멀리 햇빛의 반사를 받아 물이 반짝이는 한강을 건너다 보며 물었다. 정충신이 답했다.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이옵니다.”

“그중 무엇을 으뜸으로 치느냐.”

“지리이옵니다. 조선의 지형 조건에서는 산과 강, 골짜기와 능선, 평야 등 지세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지형지세를 잘 아니까 유리하지요.”

“그러나 지리와 천시는 인화보다 못하다. 인화라야만이 천시를 불러오고, 지리를 이용할 수 있다.”

권율은 적탄을 맞고 박살이 난 화차 앞으로 이동했다. 화차 밑에 화살을 맞고 숨져있는 병졸이 깔려있었다. 그 곁에는 머리를 박박 깎은 승병이 죽어 있었다. 그들을 보더니 다가가 무릎을 꿇듯 주저앉았다. 병졸은 훤히 눈을 뜬 채 죽어 있었는데 권율이 손을 내밀어 시체의 눈을 감겨주었다. 피묻은 헤진 승복을 입은 승병에게는 단정하게 옷을 여며주었다.

“용감한 자의 의로운 행적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정충신은 묵묵히 권율의 거동을 살폈다. 그가 또 말했다.

“하나같이 단결 속에 무기들을 사용하니 돌멩이 하나, 철환 하나가 전사가 되고 인격체가 되었다. 변이중의 화차가 역할을 했으니, 변이중의 인격이 그렇게 된 것이다. 화차가 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겼다고 할 것이 없다. 사선을 뚫고 화포를 인도해온 너 또한 공이 크다. 난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인화이니, 일이 이루어지려면 인화의 조화가 따르게 되어있다. 그래서 인화는 용맹을 덤으로 불러준다. 그것을 터득했다면 승전 이상의 고귀한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저야 군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요.”

“몇 배나 수미(秀美)한 일이다. 처영 의승장도 멸시받고 천대받는 땡중의 꼴에도 위국헌신했다. 차별과 모멸을 내던지고 의연히 맞서 싸운 것은 조정신료들이 본받아야 할 것인데, 사변(思辨)만 많다. 조정에서는 예법에 어긋난다고 승병들 시체도 거두지 못하게 외면했다. 그런데도 나라를 구하는 선봉에 섰으니 조정신료보다 수백 배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들을 우리라도 거두어야 할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치·웅치전에서 전사한 승병장 영규의 무덤도 만들어주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제가 거두겠습니다. 장졸 시신은 물론 의승, 왜 병사 시신도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 거두겠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까마귀 밥이 되도록 버려두는 것은 군례(軍禮)에도 어긋난다. 죽은 시체는 피아 구분이 없다.”

“사또 나리는 안심하시고 환도(還都)하십시오.”

정충신에게 있어 그는 언제나 광주 목사관의 사또였다.

“임금님은 언제쯤 환궁하실까. 혹, 들은 것이 있느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망설이고 계십니다. 명나라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이 경략비왜군무(經略備倭軍務)에 임명되어 이여송과 함께 2차 원군 총사령관으로 우리나라에 참전하고, 참전 격문까지 올린 것은 좋았지만, 벽제관 전투 후 일본군과 강화를 모색하고 교전을 자제시켰는데, 그것 때문에 상감마마가 환도를 주저하고 계시옵니다.”

“환도를 주저하신다고?”

“그렇사옵니다. 송응창 군무가 왜군과 강화조약을 체결할까 두려운 것이지요. 그러면 왜군이 철군하지 않고 한양에 주둔군으로 계속 남아있게 되고, 그러면 상감마마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보고 불안해하고 계십니다.”

“아, 그런 생각이셨군.”

권율이 자기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쓸쓸하게 한강을 건너다 보았다.

“사또 어른, 명은 신망이 두터운 자에게 왕권을 물려주기를 바라는데 마땅한 인물이 없다고 고민하고 있사옵니다. 광해 세자는 총명하지만 너무 똑똑해서 위험인물로 보고 있고요. 명은 똑똑한 군주보다 말 잘듣는 적당한 무능자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낙상지 장수한테 들은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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