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75.순천왜성 전투와 노량해전

상상속의 치열했던 노량해전이 바로 눈앞에…

800여척 朝·明·倭軍 전선
관음포·노량해협에서 충돌

이순신 지휘 조선수군 대승
왜군 전선 200여척 불태워

참혹했던 노량해전 전투도에
전선 205척, 군사 4천 등장

최종만씨 제공 자료 확인 결과
일본인 모사품 일부 수정된 듯

<정왜기공도권>의 노량해전 장면. 노량해전에 참전하고 있는 조·명 연합수군과 왜군 수군 전선의 수는 모두 205척이다. 136척이 조·명 연합수군의 전선이고 99척이 왜 수군 전선이다. 왜 전선 46척은 불길에 휩싸여 있거나 침몰중이다. 나머지 왜전선 53척은 전투 중이다. 그림에 등장하고 있는 군사의 수는 4천400여명이다. 2천330명이 조·명 연합군이고 왜군은 2천70여명이다. 왜군 884명이 목숨을 잃거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조·명 연합군중 조선군은 113명으로 추정된다. 200여척의 전선이 불에 타고 있고 수천명이 목숨을 잃고 바다에 떠있는 장면이어서 노량해전의 치열함을 엿볼 수 있다.

■순천검단산성(順天檢丹山城) 조명 연합군(朝明聯合軍)의 왜성공격

지금으로부터 421년 전인 1598년 9월, 순천의 한 바닷가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조선의 도원수 권율(權慄)이 이끄는 조선관군과 의병, 명의 유정(劉綎)제독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검단산성에 진을 치고 맞은 편 순천왜성(왜교성, 혹은 다리 모습 같다고 해서 예성이라고도 불렸다)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다 쪽에서도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진린(陳璘) 도독이 순천왜성 동쪽(전선정박지)을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수륙병진(水陸竝進)이었다. 조명연합군의 육군과 수군의 병력은 모두 4만2천여 명에 달했다.

검단산성에서 바라본 순천왜성. 검단산성에서 출토된 기와들이 쌓여져 있다. 기와 파편 무더기 너머 우측 멀리 보이는 능선이 순천왜성이 자리한 곳이다.

검단산성 건너편에 있는 순천왜성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왜군 1만4천명이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왜성의 왜군들은 고립무원이었다. 육지에는 4만 명에 달하는 조명연합육군이 기세등등하게 진치고 있었고 바다 역시 조명연합수군 400여척의 전선이 물길을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인근 사천·고성·남해에 있는 왜군들의 도움을 받아 육로로 빠져나가든지, 아니면 조명수군을 물리치고 바다를 통해 탈출해야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마땅치 않았다.

검단산성 정상과 왜성과의 거리는 지금으로 치면 1천500m정도다. 그러나 검단산성의 산자락에서 순천왜성 가장 바깥쪽인 외성까지의 거리는 불과 500m에 불과하다. 검단산성에서는 왜성 내부의 모습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왜성의 지휘본부인 천수각에서도 검단산성 조명연합군의 움직임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왜군들은 검단산성으로 수많은 적군들이 몰려오자 목숨을 건 전투가 임박했음을 깨달았다. 무기와 탄약을 점검하고 성책을 더 튼튼히 하며 조명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매립사업이 시작되기 전의 장도 일대 모습.

9월 20일 드디어 첫 전투가 시작됐다. 조명연합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왜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공격은 신통치 않았다. 유정은 전투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 도원수 권율이 병참 역할을 맡은 조선군이 전투에 참여하겠다고 요청해도 시큰둥했다. 육상군을 이끌고 있는 유정은 전투를 하지 않으려고만 했다. 그렇지만 이순신과 진린이 지휘하는 조명연합수군은 전투 개시 첫날 큰 전과를 올렸다. 왜군의 해상기지인 왜성 동쪽 장도(獐島)를 장악한 것이다. 이는 왜 수군의 작전반경을 좁히게 하고 퇴로를 차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왜성전투의 전개

순천왜성 입구 돌에 그려져 있는 정왜기공도권.

왜성전투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비롯 진경문(陳景文)의 <예교진병일록>(曳橋進兵日錄)과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 등이다. 또 <선조실록>은 왜교성 전투에 참전한 이순신과 우의정 이덕형(李德馨), 도원수 권율 등이 현지에서 올린 장계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기에 매우 생생하고 정확한 사료이다. 이런 사료들을 종합해 조원래 순천대교수는 조명연합군의 왜성 공격을 3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1단계는 9월 20일 시작된 수륙양면 공격에서 육상군이 순천 부유로 철수했던 10월 7일까지의 전투과정이다. 2단계는 10월 16일 유정이 다시 군사를 이끌고 왜성 가까이에 진을 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모색했던 전투소강 과정이다. 3단계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러 온 왜 수군과 조명연합 수군간의 해상전투가 벌어졌던 11월 12일부터 11월 19일까지의 일이다. 마지막 해전인 남해 관음포해전(노량해전)을 말한다.

1단계의 전투기간에는 9월 20일과, 9월 22일, 10월 2일과 3일의 4일간 전투가 매우 치열했다. 전투가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것은 전체 육상군이 전투에 참여한 9월 20일과 10월 2일 전투였다. 10월 2일 전투의 경우 명군 800명이 하루에 전사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왜성공략은 실패했다. 첫 번째 이유는 명군 대부분이 기마병이어서 공성전(攻聖戰)에 적합한 공성장비가 없었고 공성전술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명군 상호간의 심각한 불화와 내분이 컸다. 진린의 수군은 절강성 출신이었고 유정의 육군은 사천성 출신이었다. 두 지역은 지역감정이 심했는데 이런 반목과 질시는 제대로 된 연합작전을 불가능케 했다. 세 번째는 조수를 감안한 바다에서의 작전수행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린의 수군들이 타고 있었던 전선 중 일부는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면서 개펄에 얹혀버려 큰 피해를 입었다.

또 유정의 미온적이고 기회적인 태도는 왜성 함락이 실패한 이유 중의 하나다. 유정은 어떻게든 전투를 하지 않으려 했다. 조명수군이 바다 쪽에서 공격을 할 때도 제대로 호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 군사들의 희생이 컸다. 당초 명의 여러 장수들은 조선군이 성의 한쪽을 공격할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도원수 권율이 “조선군은 훈련되지 못한 군사들이어서 일면을 단독으로 담당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권율은 조선군이 지원군으로 공격에 나서면 힘을 발휘할 수 있으나 단독으로 성 공격에 나서면 지리멸렬하게 흩어져버릴 것을 우려했다. 조선군은 정규군이 아니라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의병이나 노비들이 대부분이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군을 앞장 세워 공격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유정은 이 또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왜성 일부를 조선군 단독으로 공격케 하자는 참모들의 의견에 대해 유정은 “전례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이 ‘전례’라는 것은 조선군이 공격보조역할을 해왔던 것을 의미한 것으로 해석된다. 즉 조선군은 왜성 전투에 참가하면서 공성기기들을 제작하거나 운반·배치, 보수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력전투부대가 아닌, 후방 공병부대나 보급품 운송부대와 같은 기능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왜성 전투가 한창 치열했던 10월 5일 우의정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은 유정에게 주력전투부대로 참가를 요청했다. 그렇지만 이덕형과 권율은 명의 장수들로부터 조롱만 받았을 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순천왜성전투장면. 정왜기공도권 상단 외성부근의 전투상황이다.

<예교진병일록>10월 5일자 기사에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우의정 이덕형이 제독부에 나아가 전투를 청하였으나 제독은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이 나와서 여러 장수들을 인솔하고 다시 제독부에 나아가 싸우기를 청하였지만 제독은 허락하지 않고서 말하기를 “내가 철병하여 물러난다면 유배당하는 데서 그칠 뿐이오. 그러나 만약 싸워서 불리하게 된다면 황위(皇威)를 손상시키는 것이니 죽고서도 죽어야 할 것이 더 남아있을지라도 감히 싸울 수 없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도원수가 눈물을 흘리며 청하여 이르기를 “신은 국가의 두터운 은총을 받았는데도 죽지 못하고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원컨대 결사대 500명을 인솔하여 선봉에서 말을 몰아 성을 공격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제독이 말하기를 “귀국의 군사들이 잘도 무너지는 것을 어찌하겠오?”라고 했다. 도원수가 다시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이 된다면 병사와 방어사의 머리를 베어서 제독부의 군전에 사죄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제독이 머리를 숙이고 대답을 하지 않고 있는데 부총병 이방춘이 말하기를 “귀국의 군사들이 이와 같이 싸우기를 즐겨한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 천조의 군사를 청하였소?”라고 하니, 원수는 대답하지를 못하고 물러났다.’

왜성 공방전의 2단계인 10월 16일 이후부터 11월 중순까지는 유정과 고니시유키나가 간의 밀담이 진행되면서 전투가 소강상태를 보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유정에게 밀사를 보내 뇌물을 바치고 철병에 협조해줄 것과 퇴로보호를 위해 지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 군사들이 퇴로를 열어주더라도 조선관군과 의병이 공격해올 것을 염려해 명 군사들이 호위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이에 유정은 부총병 오광에게 군사 40명을 주어 왜성으로 보내면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도우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3단계는 왜성 앞바다를 통해 탈출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박 10여척을 조명연합수군이 광양앞바다에서 격퇴했던 11월 12일부터 남해 창선도에 집결해 있던 왜 수군이 왜성 우군을 구출하기 위해 노량해협으로 진격해와 해전이 벌어진 19일까지이다. 수백 척의 왜 수군을 맞아 이순신 장군은 남해 관음포 해역에서, 진린 도독은 사천 죽도부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날 새벽에 기습공격을 가했다. 노량해전에서 200여척의 왜 전선이 불에 타거나 부서졌고 100여척은 남해로 도주했다. 조명연합 수군의 대승이었다.

왜성에 갇혀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20일 아침 광양 앞바다에 조명연합 수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600여척의 크고 작은 배로 철수를 시작했다. 왜성 왜군은 여수해협 동쪽과 남해도 남쪽을 거쳐 거제도로 퇴각했다. 여기서 사천성을 지키고 있었던 왜장 도진의홍(島津義弘)과 남해성의 종의지(宗義智), 고성성을 수비했던 입화통호(立花統虎)군사들과 만나 일본으로 철병했다. 이로써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것이다. 왜성 전투와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최후의 육해상 전투였다. 또한 민족의 별, 성웅 이순신 장군과 수많은 조선의 수군·의병들이 목숨을 잃은 혈전이기도 했다.

■검단산성의 조명 연합군 공격상황

검단산성은 여수반도의 목에 위치해 있는 검단산 정상에 있는 성이다. 지금의 행정구역상 순천시와 여수시의 경계에 있다. 검단산은 높이가 138.4m로 정상에서는 광양만이 바라보이는 요새다. 최근까지만 해도 검단산성은 정유재란 때 조명군의 연합군이 쌓은 산성으로 알려졌다. 신성리의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과 대치하면서 쌓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인식됐었다.

그러나 1996년 실시된 정밀지표조사와 1998~1999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에 축성된 석성으로 판명됐다. 6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에 쌓여진 백제산성인 것이다. 산성의 전체 길이는 430m, 외벽높이 1∼3m(추정 높이 약 4∼6m), 내벽높이 2m 이상, 성벽두께 5m 정도이다. 발굴조사에서 문지 3개소와 건물지(建物址:건물이 서 있던 곳) 3개소, 대형 우물지 1개소, 저장공 2개소의 유구, 기와류와 토기 및 헐기류, 목기류, 석기류 등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됐다.

검단산성에 오르는 입구는 신성리 소재 장복실업 건물 맞은편에 있다. 검단산성 정상에서 왜성 지휘소인 천수각까지의 거리는 1.5km 정도이다. 하지만 검단산 하단에서 왜성의 바깥 성까지의 거리는 불과 500m 정도이다. 이 정도의 짧은 거리를 두고 조명연합 육지군 3만 여명과 왜성 주둔 1만4천 여 명이 대치한 것이다. 서로의 숨소리를 들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진을 치고서 공격과 방어에 나섰으니 그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검단산성의 조명연합군이 왜성 지휘소인 천수각까지를 공략하려면 몇 단계의 공략이 성공해야 한다. <예교진병일록>에는 왜성의 형세와 왜군들의 방어시설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그 방어시설에 대한 아래의 기록을 보면 왜성이 얼마나 철옹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예교는 산형이 우뚝 솟아 있어 그 형상이 마치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것과 같다. 주위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고 일면은 육지와 이어져 순천부로부터 좌수영에 이르는 대로변에 있다. 동쪽으로는 광양과 인접하여 갯벌 밭이 경계가 되고 남쪽으로는 남해도로 통하는 바다가 열려 있고 장도가 그 앞 2리쯤에 있다. 서쪽으로는 호두와 서로 떨어진 거리가 1리 남짓하며 가운데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다. 석점(石岾)이 북쪽으로 10리 밖에 떨어져있으니 해농창들의 지점에 있다.

순천왜성 천수각이 있었던 천수기단.(복원전의 모습)
복원 후 현재 모습의 천수기단.

소서행장이 위쪽에 넓은 마당을 만들어 놓고 흙을 쌓아 축성하였는데 수천의 군사를 수용하였으며 5층 망루를 지어 백토를 칠하고 기와를 씌웠으니 그 모양이 마치 솟구치는 새 날개와도 같았다. 옆으로는 토고(土庫)가 줄지어 있어서 무기와 군량을 저장하였다. 외곽에는 견고한 성을 겹으로 쌓고 그 북쪽으로 육지와 이어진 곳에 해자를 넓게 파내고 동서로 바다에 접하게 하여 선박을 끌어 출입하였다. 그 바깥에 또 한줄기 외성을 쌓아 동서로 바다에 맞닿았고 그 가운데에 문루를 세우고 흙을 덮어서 사면을 그을렸다. 성 밖의 주변에는 목책을 2층으로 설치하고 그 북쪽의 일면에는 목책을 한 겹 더 세웠다. 성위에는 여장(女墻)을 쌓고 포혈을 뚫어 마치 벌집과도 같았다. 내성에서 외성에 이르기까지 토옥(土屋)들로 즐비하게 구축된 보루가 무수하였다. 동쪽에는 선창이 있었는데 바로 적선이 정박하는 곳이다.’

이처럼 견고하게 지어진 성에서 훈련이 잘된 왜군들이 방어를 하고 있으니 왜성이 쉽게 함락될 리가 없었다. 명군은 지휘관부터 전투에 대한 의욕이 없었다. 전투초기에는 성을 함락시킬 특별한 전략이나 공성장비 없이 군사들을 재촉해 성벽을 넘도록 할 뿐이었다. 그러니 명군의 사상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예교진병일록>10월 2일자 기사에는 조명연합군의 왜교성 공격 상황과 전투양상이 어떻게 전개됐는지가 자세히 나와있다.

정왜기공도권에 있는 문지2 일대의 왜군.

‘새벽 2시 경 제독부가 대장기를 세우고 뿔피리를 불며 함성을 지으니 사군(四軍)이 일시에 모두 적영을 포위하였다. 광동병이 가장 먼저 적진의 목책에 접근하였고, 동서병은 적진의 호자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수군은 조수를 타고 열진하여 성동 모퉁이를 합공하였다. 오전 10시 경 서쪽 모퉁이의 군사들이 바닷물이 얕아지자 적의 목채(木寨)에 접근하니, 적병 100여명이 서쪽 수문으로 나와 명군에게 격렬하게 대들었다. 명군의 사상자들이 많았는데 소의장(昭義將)의 군사들이 그 뒤에 있다가 편전을 무수히 쏘아대니 적들이 퇴각하여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기가 거듭되었는데, 수군은 격렬하게 싸웠지만 육군이 진격하지를 않았기 때문에 조수가 밀려나자 곧 물러났다.

정오에 적은 옹성의 밑 부분을 뚫어 구멍을 내고, 구멍 속으로 목판을 메고 나와 줄지어 세우고서 그 안에서 화포와 조총을 어지럽게 쏘아대며 광병에게 도전하였다. 그 때 동쪽 모퉁이의 군사들이 잠시 물러나 퇴각하는 모습을 보이자 광병이 이를 보고서 또한 동요하므로 적이 목책 밖으로 갑자기 나와 날뛰며 어지럽게 검을 휘두르니 광병이 놀라 소요하였다. 적이 성 위에서 깃발을 메고 뛰어내려와 광병들을 서로 죽이므로 그 전사자가 60여명에 이르니 군세가 꺾여 거의 달아났다. 이 때 제독부의 기마병 수백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니 적이 퇴각하여 성중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적은 땔나무를 묶어(불을 붙여) 성 밖으로 던지고, 또 30여명이 성 밑구멍 안에서 개미떼처럼 몰려나왔다. 땔나무를 쥐고 목책 밖으로 뛰어나와서 급히 충거(衝車)·운제(雲梯)·목패 등의 공성기물들을 불살라버렸는데, 모두가 광병들이 버린 기물들이었다. 명군은 사기가 꺾이어 다시 진격하지를 못하다가 때가 이미 저녁이 되자 바로 포위를 풀었다.(후략)’

우의정 이덕형은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10월 2일에 벌어진 명 육상군과 왜군 간의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유제독이 2일 왜적의 성을 공격할 때 모든 군사가 성 아래로 60보쯤 전진했는데, 왜적의 총탄이 비 오 듯하자 제독은 끝내 깃발을 내려놓고 독전하지 않았습니다. 부총병 오광의 군사들은 대장의 호령이 있기를 기다리다가 순거(楯車)에 들어가 잠자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조수는 차츰 빠지고 수군도 물러갔습니다. 왜노들은 육군이 일제히 진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와 오광의 군대를 공격하여 20여명을 죽이자 오광의 군대는 놀라서 100보쯤 후퇴하고 각 진영의 사기도 모두 떨어졌으니, 그날 한 짓은 아이들 장난과도 같았습니다. 독전하지도 않고 또 철수도 하지 않아 각 군으로 하여금 반나절을 서서 보내게 하고 다만 왜적의 탄환만 받게 했으니, 제독이 한 짓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선조실록>권 105 31년 10월12일

■진경문과 <예교진병일록>

<예교진병일록>을 쓴 진경문(1561~1642)은 나주출신이다. 호는 섬호(剡湖)이다. ‘剡’자는 땅이름 섬, 혹은 강이름 섬의 뜻(訓)으로 읽힌다. 다른 음으로는 ‘날카로운 염’으로 불린다. 불과 칼을 뜻하는 이 글자는 빼어난 경치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섬(剡)’은 본디 중국 절강(浙江)성 회계(會稽)현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옛 사람들은 나주와 함평의 경계에서 영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넓은 강을 사호강(沙湖江)이라 불렀다.

사호강은 경치가 빼어나 섬호강이라 불렸다고도 전해진다. 그래서 진경문의 고향인 나주 동강 월송리에는 진경문과 곡강(曲江:영산강이 굽이지며 흘러가는 모습을 의미)을 기리는 섬호정이 있었다. 그러나 섬호정은 지금 헐려지고 없다. 진경문은 1589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정유재란이 터지자 격문(檄文)을 8도에 보내 왜군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했다. 강화도에서 의병을 모집했고 그곳에 주둔해 있던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에게 군량 300 석을 전달했다.

진경문은 의병장인 소의장(昭義將) 임환의 참모장이 돼 의병을 지휘해 예교성(왜성)으로 진격한다. 우의정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 배속된 섬호는 예교성 전투에 참전했다. 진경문은 이때의 전투상황을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예교진병일록>이다.

■노량해전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덕천가강(德川家康)등 5대로(大老)는 조선에서의 철병을 결정했다. 이에 앞서 7월에 명은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을 통해 왜군들을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사로병진책은 명과 조선, 두 나라의 연합군을 네 갈래로 나눠 왜군을 공격한다는 작전개념이다. 사로병진 책에 따라 조명연합군 중 육군은 전라도 방면의 서로, 경상우도 방면의 중로, 경상좌도 방면의 동로 세 갈래로 진격했다. 수군은 서해와 남해로 이동했다.

조명연합군 순천왜성 육해상공격상황도.

그러나 이 사로병진책은 실패했다. 동로군 제독 마귀는 조명 연합군 3만 9,000명의 병력을이끌고 울산성을 공격(2차 울산성전투)했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왜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많은 사상자만 내고 물러섰다. 사천성 공격도 명의 참패로 끝났다. 서로군 유정 제독은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조선군과 함께 순천왜성 공격에 나섰으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의 치밀하고 악착같은 수성에 부딪쳐 난관에 봉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수성이 장기화되면 자신은 물론이고 부하들 모두가 결국은 죽고 말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유정과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간청했다. 유정과는 달리 진린은 왜교성 공격에 전력을 다하고 왜 수군과의 전투에서도 용맹하게 싸웠다. 하지만 고니시의 부탁대로 왜의 통신선 1척을 빠져 나가게 해주었다. 11월 중순 사천과 고성, 남해 일대의 왜군은 철병을 결정하고 순천 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락이 없어 궁금하던 차에 마침 조명연합 수군의 감시망을 뚫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낸 통신선이 도착했다. 시마쓰(島津義弘)등 사천(泗川), 고성, 남해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들은 고니시 부대 구출에 나섰다. 500여척의 전선에 나눠 타고 순천 왜성으로 향했다. 조명연합 수군을 지휘하던 이순신과 진린은 무수한 적들이 순천왜성 앞바다로 진격해온다는 첩보를 듣고 470척의 전선을 이끌고 노량 앞바다로 향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若除死則無憾)라고 하늘에 빌고 전투에 나섰다. 19일 새벽에 시작된 노량해전은 조명연합 수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렇지만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왜선을 추격하던 이순신장군이 왜병이 쏜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은 최후의 순간까지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며 조선수군의 승리를 독려했다.

이충무공의 시신은 남해를 거쳐 고금 묘당도에 모셔졌다. 묘량도에는 이충무공의 가묘인 월송대가 있다. 이충무공의 시신은 다음해인 1599년 2월 11일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옮겨졌다. 순천왜성 곁에는 충무사(忠武祠)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00년 쯤 뒤에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와 살았다. 그런데 왜성전투에서 죽은 왜군들의 혼령들이 밤이면 자주 출몰해 매우 흉흉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곳에 사당을 짓고 충무공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 뒤부터는 원귀들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충무사에는 군관 송희립과 정운의 위패와 영정이 함께 봉안돼 있다.

■율촌지방산업단지가 돼버린 왜성 앞 바다

산단 전경. 우측에 보이는 봉우리가 육지로 변해버린 장도이다.

지금 순천왜성 주변의 풍경은 1597년의 풍경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순천왜성 동쪽으로 맞닿아있던 바다가 없어져 버렸다. 바다는 물론이고 바다 쪽으로 구축됐던 선착장과 방어시설이 없어져 버렸으니 자연 광양앞 바다를 피로 물들였던 해상전투 장면을 그려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순천왜성 전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안내나 해설을 들어야만 순천왜성 앞바다의 모습을 대충 헤아릴 수 있다.

순천왜성 앞 바다는 매립돼 지금 율촌지방산업단지가 들어서 있다. 순천왜성 앞 바다에 있던 장도 역시 육지속의 작은 동산으로 변해버렸다. 순천왜성 전투가 벌어지기 전 장도(獐島:노루섬)는 광양앞바다를 감시하는 왜 수군의 전초기지였다. 그런데 조명연합군 수군은 순천왜성 전투가 시작된 1597년 9월20일 장도를 공격해 장악하고 군량과 마필을 탈취했다. 그리고 조선인 포로 300여명을 데려왔다.

섬이었던 장도는 율촌지방산단(공업단지) 조성공사가 시작되면서 바다 매립토 확보를 위한 토석채취장으로 지정됐다. 절반 정도를 파내 이곳에서 나온 돌과 흙으로 바다를 메우는데 사용했다. 묘도 쪽 바다풍경도 예전과는 아주 달라졌다. 광양제철이 들어서면서 묘도 쪽 바다가 상당부분 매립된 것이다. 예전에는 광양제철 쪽 묘도바다의 폭이 매우 넓었으나 지금은 광양제철 호안이 들어서 좁은 편이다.

순천왜성 지휘부 건물이었던 천수각은 흔적도 없는 상태다. 천수기단만 남아있다. 내성은 출입문이 있었던 문지주변 성벽이 그런대로 남아있으나 해자 너머의 외성은 성벽 자체가 없어져버렸다. 정유재란 이후 백성들이 성을 헐어 그 돌로 건물을 짓거나 공사를 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순천왜성은 왜성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성이다.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지만 찾는 이들은 별로 없다. 외면당하고 있는 역사현장이다. 우리의 무관심 때문이다. 순천왜성에 묻혀 있는 우리의 역사를 살려내야 한다.

■<임진정왜도> 자료를 제공해준 최종만 광주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순천시가 1998년 제작한 임진정왜도 자료집.

<정왜기공도권>은 임진·정유재란 7년의 전투상황을 그린 그림이다. 순천 왜성전투와 노량해전에 관한 글을 준비하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정왜기공도권> 그림을 조원래 순천대교수의 <정유재란과 왜교성전투>에 실려 있는 사본(寫本)과 인터넷 자료를 통해서만 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본보 1월28일자(10면 전라도역사이야기 74회)에 ‘순천왜성(順天倭城) 전투와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기획기사가 나간 후 광주상공회의소 최종만(崔鍾晩)상근부회장이 연락을 해왔다. 순천시가 지난 1998년 조순승 전 국회의원을 통해 입수한 <임진정왜도>(壬辰征倭圖사진(필름) 11장을 수록해 놓은 자료를 자신이 보관하고 있으니 참조해보라는 것이었다.

<정왜기공도권>은 명 장수 진린을 수행했던 종군화가가 그린 것이다. 명의 입장에서 임진·정유재란을 ‘승리한 전쟁’이라 여기고 이런 시각에서 묘사한 것이다. 실제 명나라 군사와 조선군의 순천왜성 공격은 왜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한 전투였음에도 명 장수들의 ‘전공부풀리기’ 때문에 ‘정왜’(征倭)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최종만 광주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최 부회장이 제공한 자료는 순천시가 만든 것으로 모두 9장(18쪽)짜리 소책자이다. 이 책자 제목은 ‘-정유재란당시 순천왜교성 전투를 살펴볼 수 있는-<정왜기공도권> 자료집’이다. <임진정왜도>의 주요장면 10개가 실려 있다. 전라도역사이야기 74회에 게재된 <정왜기공도권>그림은 일본인이 모사한 것인데 최 부회장이 제공해준 <임진정왜도>와 비교해보니 세부적으로는 조금 차이가 났다. 일본인이 그린 <정왜기공도권>에는 <임진정왜도>에 없는 내용들이 가필돼 있었다.

역사와 문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최 부회장은 <임진정왜도>와 관련된 일본역사와 시대상황에 관한 많은 정보를 건네줌으로써 기자가 정확한 글을 쓸 수 있게끔 큰 도움을 주었다. 최 부회장은 순천 출생으로 순천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일본 센슈(專修)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통령비서실과 광주광역시 동구청장·행정부시장, 광주영어방송 초대사장, 아시아문화개발원장 등을 역임했다.

도움말/조원래, 김세곤, 박명희, 최종만
사진제공/기경범, 조원래, 순천시청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