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3장 행주대첩과 전라도 병사들<271>

사실 선조는 요근래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권율이 행주성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해도 왜군이 아직 한양에 머물고 있는 이상 환도하는 것이 두려웠다. 이런 때 명나라 군사가 나타나 확 밟아주어야 하는데, 철수하겠다고 하니 꼭 자신을 버리는 것 같아서 괴로운 것이다.

선조의 입장에서 명나라 군사에 비해 조선군은 도무지 시원찮았다. 조선의 장수들은 명군의 뒤를 따르며 시체를 거두거나 잔적(殘敵)의 머리 몇개 베는 정도였다. 선조가 선뜻 환궁을 꺼리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저런 덜떨어진 조선군을 믿다가 언제 낭패를 당할지 모른다.

권율은 행주성 싸움 완승 기념으로 적 수급 머리를 벤 것 중 네다섯 개를 골라 쪄 말려서 왕에게 올리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그것으로 왕을 크게 고무시킬 요량이었는데 무모한 일인 것 같았다. 정충신의 전언이나 자신의 생각이나 같은 것이다. 권율이 정충신에게 말했다.

“나는 행주성 싸움보다 이치·웅치전을 더 높이 산다. 그러니 행주산성 싸움에서 승리한 전과를 상감마마께 올리는 것을 그만두겠다.”

“행주성 싸움은 한양을 탈환하는 어마어마한 전과 아니옵니까. 당연히 올려야지요.”

“그게 아니다. 이치·웅치전은 전라도를 지켰다. 병참선이 확보되고, 거기서부터 우수한 군사가 배출되었다. 그들을 여기 데려왔으니 대승한 것이고, 그러니 이치 웅치전의 가치가 몇 배 크다. 어떤 사물이든 근본이 있는 것이니, 근본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권율은 도성을 지킨 행주산성 싸움이 어떤 전투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지만, 왕을 생각하니 밥맛이 떨어졌다. 명나라만을 바라보는 태도가 자존심 상하게 한다. 조정에는 명을 업은 간신배들의 간언(姦言)과 모략과 음해가 활개치지만, 왕은 그런 것을 분별해서 나라의 진운을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한데 그가 한 수 더 뜬다.

“사또 어른, 명의 송응창 군무는 하루빨리 왜군과 강화조약을 맺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고니시와 밀서를 교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감마마께옵서 매달리고 계시니 송 군무가 화를 내는 것이옵니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왕이 언제까지 명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느냐는 것이지요. 나라를 위하기보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왕이냐고 비겁하다는 것이고, 부모국으로서 골치 아프다는 것이옵니다. 그래서 갈아치우려 한다는 것이옵니다.”

“그건 안된다. 건방진 것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남의 나라 왕을 수레바퀴 갈아끼우듯 한다고? 어디서 그런 해괴한 말이 나오더란 말이냐.”

“국경지대에는 벼라별 유언(流言)과 근거없는 비어(蜚語)들이 황사처럼 부유하고 있습니다. 명군 진중에도 그렇고요.”

“임지로 언제 올라가겠느냐.”

듣기가 민망했던지 권율이 말을 돌렸다. 젊은 것이라 함부로 말하는 것 같은데, 어느 칼에 당할지 모른다.

“지금 떠나겠습니다.”

“당초 정치에는 눈 돌리지 말아라. 군인은 나라 지키는 데만 눈을 맞추는 법이다.”

“알겠사옵니다.”

정충신은 행장을 꾸려서 행주산성을 내려갔다. 길삼봉이 진을 친 곳에 이르러 그를 찾았다. 길삼봉 역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성님, 우리 또 헤어져얄랑개비요.” 정충신이 고향 사투리로 말하자 그가 받았다.

“그래얄랑개비네이. 나야말로 운수(雲水)행각 아닌가. 자네는 임지로 갈라고?”

“그래야지요. 나 따라서 안가겠소?”

“나는 나가 가야 할 길이 있다마시. 때가 되면 만날 것이여. 어딜 가나 무운장구를 비네.”

그가 돛배 쪽으로 부하들을 이끌어 배를 타게 하고 정충신을 끌어안았다.

“자네의 지략과 용맹을 보니 나가 허벌나게 좋네.”

“난리가 평정되면 나라가 안정이 될 것이고, 그러면 성님같은 지사도 사면복권 되겄지요.”

“족같은 시상, 언제 그럴 날이 오겄는가. 힘좋은 장사 한 삼백 단련시켜서 나라를 접수해버릴까도 생각했는디, 스승 이후 나까정 역모로 몰리면 우리 집안은 완전 좆되어버링개 참네. 지금도 고향집에는 관군들이 들락거리고 있다고 하더란 마시. 나 올깨미 쌔려잡을라고 엿보는 것이제.”

“하여간에 입조심 하시오. 왕은 하늘같은 지체시고, 백성들은 우러른단 말이오. 사상이 그렇게 박히고, 신념이 그렇게 굳어버렸는디 역성혁명 꿈꾼다고 되겠소? 어느 곳에서 고발 들어갈지 몰르요. 나도 믿지 말고 입조심 하시오. 나는 행주싸움에서 성님 고생한 것만 기억하겠소. 잡념 털고 어서 가시오.”

“사람이 쓸쓸하면 별 망상을 다 한다 마시. 알겠네. 나는 해주땅으로 가겠네.”

길삼봉이 배에 올랐다. 돛을 올리고 장졸들이 노를 젓자 배는 한강 하류 쪽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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