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77.2·8독립선언과 최원순(崔元淳) 선생

조선유학생들, 일본 심장부에서 독립을 선언하다

1912년 2월 8일 도쿄 조선유학생 500명 거사
최원순·백관수 주도 ‘조선청년독립선언서’ 발표

2·8선언 민족인사들에 영향 3·1운동 촉발시켜
광주 출신 언론인·계몽가 최원순 선생 큰 역할

아내 현덕신과 함께 조선민족 보살피는데 헌신
일제고문·수감생활로 폐결핵 깊어 40代에 운명

■3·1운동을 촉발시킨 2·8독립선언

일제의 조선침략 야욕은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한일병탄을 통해 현실화됐다. 일제는 1876년 조선과 강제로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한 뒤 경제·군사적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일제는 명성왕후를 시해한 뒤 친일내각을 세우고 조선의 외교권과 군사력을 무력화시켰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일제의 조선침략에 맞서 1894년 동학농민군이 일어섰다. 그러나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진압작전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조선 땅을 물들였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의병활동 역시 호남대토벌작전 등 일제의 잔인한 소탕작전에 따라 1909년에는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의병과 독립 운동가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장소를 옮겨 조선독립을 위한 무력투쟁을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조선독립을 위해 교육과 문화 분야에서 노심초사했다. 조선의 말과 정신을 지키려다 수많은 이들이 옥고를 치렀다. 학생들 역시 조선독립을 위해 실력을 키우면서 힘을 모았다.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 조선청년들 역시 그러했다.

조선독립을 위한 조선민족의 열망은 1919년 3·1운동으로 터져 나왔다. 3·1운동은 조선민족이 벌인 민족적 저항운동이었다. 지역과 신분·계층, 종교·이념에 관계없이 조선인 모두가 일제에 항거해 분연히 일어섰던 운동이다. 3·1운동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몇 가지가 있다. 갈수록 심해져가는 일제의 수탈과 노동력 착취로 조선민족의 불만이 커진 것도 주요 원인이다.

일제의 수탈과 강압이 심해질수록 이와 비례해 조선인들이 독립열망도 더욱 확산됐다. 1910년 1919년 사이에 벌어진 일제의 농지수탈과 강제면화재배, 도로개설을 위한 강제노역, 어업권 독식 등은 조선민족의 울분을 자아냈다. 조선백성들은 일제의 수탈에 시달리면서 고통스러워했다. 이 가운데 1919년 1월 고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했다. 일제의 독살설이 민심을 흉흉케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일본에서 공부하던 조선유학생 500여 명이 ‘조선청년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일본정부에 조선독립을 촉구했다. 일본의 심장 한복판에서 조선유학생들은 이광수가 작성한 ‘조선청년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2·8독립선언은 조선민족의 3·1운동을 촉발시켰다.

■2·8독립선언이 3·1운동에 미친 영향

재일 동경유학생 모습.(국가보훈처 블로그)

1919년 1월 6일 조선유학생학우회는 독립운동을 추진할 임시 실행위원을 선출했다. 최팔용·백관수(白寬洙)·김도연(金度演)·윤창석·이종근·최근우(崔謹愚)·김상덕·전영택(田榮澤)·송계백 등이 10인 실행위원으로 선임됐다. 전영택 선생이 건강이 좋지 않아 사임함에 따라 이광수(李光洙)와 김철수(金喆壽)가 실행위원으로 추가 선발됐다.

11명의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구체적인 실천계획을 마련했다. 첫 번째 구체적인 목표는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 발표해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널리 알린다는 것이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등을 일본 각계와 각국 공사관에 발송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실행위원들은 독립선언서 초안 작성은 이광수에게 맡겼다. 그리고 조선 국내는 물론 만주, 연해주, 미주 동포사회와 연계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펴 나가기 위해 상해로 밀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국내 밀사로는 송계백을, 상해 밀사로는 이광수를 선발했다.

조선밀사의 임무는 첫째, 재일 조선유학생들의 독립선언 계획을 알려 조선의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둘째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할 자금을 지원 받고, 셋째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국문활자를 구하는 것이었다.

송계백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조선에 잠입했다. 그리고 중앙학교로 현상윤을 찾아가 모자 속에 감춰 들여온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꺼내 보이고 동경 조선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발표 계획을 알렸다.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에 놀라면서 한편으로 감격한 현상윤은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와 친구인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 초안을 보여주었다.

이 초안은 최린과 손병희에게도 전달됐다. 마침 이때 손병희는 기독교·불교계와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종교계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손병희는 “젊은 학생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고 하니 우리 선배들로도 좌시할 수 없다”며 은밀하게 추진해오던 조선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추진계획을 가속화하자고 말했다.

사실, 조선독립운동을 위한 종교계의 연합전선 구축 시도는 1916년부터 국내에서도 본격화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16년부터 천도교 내부에서는 천도교인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여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해 왔다. 그 다음 해에도 일부 교인들은 독립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교단 측에 요청하기도 했다.

1917년 겨울에는 김시학(金時學)의 발의로 천도교·기독교·유림 등 3종단이 연합했다. 종교계는 명망 있는 인사와 과거 관직에 있었던 인물들을 포섭해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했다. 이런 가운데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제창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독립운동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천도교와 기독교, 유림 세력들이 송진우·현상윤 등 중앙학교 측의 인사들과 합세해 구체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을 때 재일조선유학생 밀사가 독립선언서 초안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이런 상황인 만큼 재일조선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발표 거사계획은 큰 자극이 됐다. 조선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계획은 급물살을 탔고 결국 20여일 뒤에 3·1운동이 터지게 된 것이다.

■2·8독립선언을 촉발시킨 무오독립선언

실은 2·8독립선언 또한 1919년 2월 1일(음력 1919년 1월 1일) 만주 지린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무오독립선언은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것이다. 기미년에 발표됐으나 기미독립선언과 구별하기 위해 작성과 서명이 무오년에 이뤄진 것을 근거로 해 무오독립선언으로 불린다.

무오독립선언서는 조소앙(본명 조용은)이 기초했다. 무오선언서에는 일본과의 병합(한일병합조약)은 사기와 강박으로 이뤄졌기에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무오독립선언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돼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조선독립의 의지를 담아 발표한 최초의 독립선언이었다.

무오독립선언 연서자들 대부분은 독립운동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이중 상당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요직을 맡았다. 이탁 외에는 변절자가 없었다. 그런데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명의 독립지사 중 25명이 대종교 출신인사였다. 대종교는 전남 보성 출신 홍암(弘巖) 나철(羅喆)선생이 창시한 종교다.

조선독립운동 및 독립선언의 연원에는 나철선생의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나철 선생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서일을 비롯, 김좌진, 박은식, 김규식 등 수많은 인물들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1921년 제2회 상해 임시의정원 위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이었다. 그들은 이동녕을 비롯, 이시영, 김구, 조완구, 조성환, 차이석, 송병조 등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한글운동을 이끈 인물들 상당수도 대종교 교인들이었다. 주시경, 이극로, 이병기, 지석영, 안재홍이 나철선생의 가르침을 쫓았다. 나철 선생 문하에서 민족정신을 깨우친 이들은 항일투쟁에 나서 조선독립을 쟁취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리고 민족혼인 한글을 지켜 조선독립사상을 키우는 밑거름이 됐다.

민족대표 33인의 기미독립선언과 함께 일어난 3·1 운동은 조선독립을 염원한 온 겨레가 함께 힘을 모은 민족운동이었다. 3·1 운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으며 이 또한 무오독립선언에 자극받은 것임을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2·8독립선언은 구심점 역할을 한 인물은 광주 출신 최원순 선생이다.

■2·8독립선언과 최원순(崔元淳)선생
 

최원순 선생. 최원순 선생은 2·8독립선언의 주역이었으며 항일투쟁에 평생을 바친 언론인이자 계몽가였다.

최원순 선생에 대한 글은 박선홍 선생이 지은 <광주 1백년>에 자세히 나와 있다. 박선홍 선생은 광주토박이로서 생전에 광주의 역사와 문화·인문지리에 대한 자료와 고증, 증언들을 광범위하게 모으고 정리한 분이다. 광주의 정신을 지켜왔던 많은 분들에 대한 글도 남겼다. 최원순 선생과 관련된 글 상당부분은 박선홍 선생의 책에서 가져왔음을 미리 밝혀둔다.

최원순 선생은 도쿄 2·8독립선언의 주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일 언론인이자 계몽 운동가였다. 선생은 아버지 최의준의 3남 중 차남으로 1891년 태어났다.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4회)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했다. 경성고보 재학시절 이상재, 한용운, 주시경, 최남선 등과 함께 역사 연구에 정진했다.

방학에는 광주에 내려와 신문잡지종람소에서 최춘열, 강석봉, 이이동, 최한영 등과 함께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경성고보 사범과 졸업을 한 달 앞두고 벌어진 교내 항일사건으로 퇴학당했다. 1916년 만주로 건너가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참여했으나 자금조달이 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원순 선생은 만주에서 돌아와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진학했다. 도쿄 조선인 YMCA에서 일하면서 고학으로 어렵게 공부를 했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조선인 유학생들은 1918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론을 제창하자 크게 고무됐다. 유학생들은 민족자결론에 의해 조선이 독립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했다.

강진 출신의 김안식(明治大)과 나주 출신 김현준(東洋大), 화순 출신 정광호(明治大), 광주 출신 장영규 등은 최원순과 함께 항일투쟁 노선을 펴나가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선배인고창 출신 백관수(正則英語學校)를 찾아가 동참을 약속받고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안과 동지규합에 나설 것을 다짐했다.

이들은 임시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대책위는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선언서를 일본 각계 요로와 각국 대사·공사관에 발송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조선유학생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간파한 일경의 감시가 심해졌다. 1919년 1월 7일 도쿄 YMCA회관 모임에서는 참가학생 12명이 경시청에 연행돼 조사를 받기도 했다.

백관수를 수장으로 해 최원순, 최팔용, 김철수, 이광수, 김도연, 정광호, 변희용(박순천 여사 남편)등 도쿄 유학생 21명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했다. 그리고 조직, 자금, 선언문 작성 등 3개 분야로 역할을 분담했다. 최원순과 정광호 등은 조선인 유학생들을 결집해 조직화하는 임무를 받았다.

정광호는 서울로 가서 광주출신 김범수와 김기명 등 서울에 유학하고 있는 호남출신 학생들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배포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 장성으로 내려가 친지 김기형의 집에서 일경의 감시를 피해 독립선언서를 대량으로 인쇄했다. 그런 뒤 최남선을 찾아가 2·8독립선언 추진경위와 진행상황을 말하고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런 가운데 최원순 등 조선유학생 10여명은 광주 출신 김희술의 도쿄하숙집에 모여 1주일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1만 여 장의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그리고 영문으로 선언서를 번역해 각국 대사관과 영사관, 외국 언론기관에 발송했다. 일어로 된 선언서는 일본 정계인사와 언론기관 등에 우편으로 보냈다.

드디어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인 YMCA강당에서 500 여 명의 남녀 조선유학생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문 선포식이 열렸다. 선포식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유학생회 임원선거회’로 포장됐다. 대회는 최팔용의 사회로 시작됐다. 백남규의 개회선언과 윤창식의 기도, 서춘의 경과보고, 이종근의 취지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백관수와 김도연이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했다. 조선청년독립단 대표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뤄졌다.

‘전조선 청년독립단은 아(我) 2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 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4천 3백년의 장구한 역사를 유(有)하는 오족(吾族)은 실로 세계 최고 문명민족의 일이라. 비록 유시호(有時乎) 지나(支那)의 정삭(正朔)을 봉(奉)한 사(事)는 유하였으나 차(此)는 조선 황실과 지나 황실과의 형식적 외교적 관계에 불과하였고, 조선은 항상 오족의 조선이오, 일차(一次)도 통일한 국가를 실(失)하고 이족(異族)의 실질적 지배를 수(受)한 사(事)가 무(無)하도다. (중략) 자(玆)에 오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오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여(與)하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不然)하면 오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 행동을 취하여 오족의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2·8 독립선언서에 포함된 결의문’은 아래와 같다.

1. 본 단은 일한합병이 오족의 자유의사에 출치 아니하고 오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 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야 대회의 결의로 오족의 운명을 결할 기회를 여하기를 요구함.

3. 본 단은 만국평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오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우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야 일본에 주재한 각국대사에게 본 단의 의사를 각해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함. 우위원은 기히 파견된 오족의 위원과 일치행동을 취함.

4. 전제 항의 요구가 실패될 시에는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을 선함. 차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오족이 기책을 임치 아니함.

조선유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경찰이 들이닥쳤다. 일경은 곤봉을 휘두르며 조선유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했다. 학생들은 맨 손으로 저항했지만 일경을 이겨낼 수 없었다. 최원순과 백관수 등 20여명이 현장에서 검거돼 연행됐다.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이를 막지 못한 일본 경찰에 비난이 쏟아졌다. 일본경찰은 자신들에 대한 비난도 비난이지만,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선독립선언식을 가진 것에 경악하고 분노했다. 그래서 혹독하게 조선인 유학생들을 다뤘다. 잔혹하게 고문했다. 검거된 학생 중 대표자 9명이 구속 기소됐으며 이들은 모두 금고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일본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이 감행한 2·8독립선언은 조선 본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서울의 민족대표들도 예정보다 빨리 독립선언 발표를 거사하기로 결정했다. 2·8독립선언은 3·1운동을 촉발시켰다. 2?8독립선언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했던 유학생들은 귀국해 조선의 항일투쟁과 계몽운동에 헌신했다.

2·8독립선언 후에도 재일 조선유학생들의 항일운동은 계속됐다. 조선유학생들은 이달, 최승만 등을 후임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2월 12일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재차 독립선언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2월 23일 민족대회소집을 위한 집회와 시위를 계획했다. 하지만 유학생 중심인물인 변희용 등이 체포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재일 조선유학생들은 3월 9일 ‘재동경 조선청년독립단 동맹휴학 촉진부’의 명의로 동맹휴학을 권유하고 대거 조선으로 귀국했다. 그 수가 무려 350명에 달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유지들과 청년들에게 조국의 독립운동에 합류할 것을 호소하는 글을 건네고 일경의 눈을 피해 항일독립운동을 벌였다.

■최원순 선생의 항일투쟁

최원순과 현덕신 부부의 결혼식. 서울 종로 중앙예식장에서 혼인식을 올렸다. 최원순 선생과 현덕신 여사는 항일독립투쟁을 함께 하면서 조선백성을 깨우치고 건강을 돌보는데 헌신했다.

최원순 선생은 1923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동경 여자의학전문학교 출신인 현덕신과 결혼했다. 선생은 귀국 후 백관수, 김준연 등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계몽강연회를 가졌다. 최원순 선생은 명연설가였다. 선생이 숭일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면 그의 쩌렁한 목소리가 양림마을과 방림산 일대에 울려 퍼졌다고 전해진다.

최원순 선생은 결혼 뒤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다.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인 조직인 무명회와 철필구락부에 참여해 전 조선기자대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선생은 1926년 필화를 겪었다. ‘횡설수설’이라는 코너에서 일제를 비판했는데 이 일로 검거돼 3개월간 복역했다. 선생은 이 글에서 ‘현하의 총독정치는 조선인을 이(利)케 하고 익(益)케 하는 인사는 박해하고 배척 하면서도 조선인을 이케 하고 불리케 하는 놈들은 절대로 보호하는 방침’이라 비판했다.

석아정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최원순 현덕순 부부. 현덕신 여사는 남편 최원순의 건강을 위해 증심사 입구에 석아정을 짓고 남편의 건강을 돌봤다. 석아정은 최흥종 목사가 살면서 후에 오방정이 됐고, 그 뒤로는 개조돼 춘설헌으로 불리고 있다.

선생은 동아일보 정치부장, 편집국장 대리를 맡아 일했으나 일제의 고문과 수감생활의 영향으로 차츰 건강이 나빠졌다. 폐결핵이 깊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1928년 고향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에서 동아일보 광주지국장을 맡아 일하면서 1933년 최흥종 목사와 함께 민중계몽운동과 빈민구제활동을 위한 지역 유지모임인 계유구락부를 결성했다.

계유구락부는 빈민구제활동과 민중계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선생은 최흥종목사 등과 함께 1934년 광주천 호안공사와 직강공사를 벌이면서 강제 철거된 금동과 양동, 학동 일대 천변 영세민에 대한 구제 사업을 펼쳤다. 또 도산 안창호와 몽양 여운형 선생을 초청해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최원순 선생의 아내 현덕신 여사는 남편의 건강을 위해 공기가 맑고 산세가 수려한 무등산 증심사 초입 야산에 집을 지었다. 그리고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돌봤다. 그러나 선생은 1936년 7월 6일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야 말았다. 일제의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에는 폐결핵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춘설헌

현덕신 여사가 증심사 입구에 지은 집은 최원순선생의 아호를 따서 ‘석아정’(石啞亭)이라 했다. 석아정은 그 후에 최흥종목사가 거처하면서 오방정이라 불렸다. 광복 후 오방정에는 새주인이 들어왔다. 의재 허백련 선생이다. 의재 선생은 오방정을 개축해 춘설헌으로 이름지었다. 지금 춘설헌은 의재 선생 작품의 전시실로 활용되고 있다.

최흥종 목사. 광주 최초의 기독교 목사로 나환자 등 어려운 조선민족을 돌보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광주의 3·1운동을 책임졌다. 징역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최원순과 현덕신

현덕신 여사

최원순 선생의 아내인 현덕신 여사는 일제 강점기 당시 여성 계몽운동과 문맹퇴치에 헌신했던 민족운동가였다. 그리고 광주 최초 여의사로 조선백성의 건강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했던 진정한 의료인이기도 했다. 또한 광복 후에는 신생유치원 설립에 이어 신생보육학교 등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던 교육자였다. 광주 YWCA, 건국준비부인회, 대한부인회 등지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던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황해도 출신인 현덕신은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최원순 선생을 만났다. 결혼을 한 뒤 광주로 이주해와 남편과 함께 헌신적으로 조선민족의 계몽과 독립운동 전개를 위해 활동했다. 그녀는 급한 환자가 발생해 왕진을 갈 때 머리를 매만지려면 시간이 걸리기에 긴 머리를 잘라버리고 단발머리를 하고 다녔다.

당시 광주의 YWCA에는 김필례를 비롯 양응도·양명순·조경순 등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는데 현덕신 여사는 이들과 함께 힘을 모아 각종 사회운동을 펼쳐갔다. 현여사는 양응도 YWCA 초대회장에 이어 1930년 YWCA 제 2대 회장직을 맡아 광주지역 여성의 계몽과 복리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남편 최원순 선생의 건강이 악화되자 현 여사는 남편의 간병을 위해 YWCA 회장직을 사퇴하고 석아정에서 머물며 남편 간호에 정성을 쏟았다. 그렇지만 최원순 선생은 1936년 7월 6일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삶을 마쳤다. 석아정에서 생활한지 8년 만이었다. 당시 현덕신 여사의 나이는 40세로 결혼생활 1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게 된 것이다.

현덕신여사는 1963년 11월 27일 67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최원순 선생과 현덕신 여사 사이에 태어난 최상옥 선생 역시 이 지역 어린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연희대학교를 졸업 후 교사생활을 하다가 광주로 내려와 신생유치원을 세우고 유아교육에 전념했다. 신생보육학교를 설립해 유아교육교사 및 사회복지기관 요원양성에 기여했다.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장을 지낸 최영훈 교수가 최상옥 선생의 아들로, 최원순 선생의 손자이기도 하다.

도움말/박선홍(<광주1백년>), 김정호

사진제공/위직량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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