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특별기획
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세계의 모든 나라 앞에 독립됨을 선포하노라”

조선청년독립단, 2월 8일 동경 기독청년회관서 독립선언문 낭독

동경 유학생들 윌슨 민족자결주의 제창 이전 독립운동단체 결성

김현준 정광호 최원순 장영규 등 지역출신들도 거사에 다수 참여

정광호는 독립선언문 품고 현해탄 건너 광주서 동조 만세운동 준비

최한영 김복수 정상호 등 동참…전국적인 3·1운동 성공위해 보류

100년 전, 3월 1일 오늘, 지역과 세대, 계층과 종교를 떠나 자주독립의 염원을 위해 한민족이 하나로 떨쳐 일어섰다. 100년 전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은 군주제나 황제, 천황제도가 아닌 백성이 주인인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3.1운동이 광주에 주는 의미는 10년 뒤 1929년 ‘제2의 3·1운동’으로 평가받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세계로 확산되어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

3·1만세운동은 일제의 부당한 침탈에 맞서 민주주의 중요한 가치인 자유와 평등, 평화로운 세상을 외쳤고, 이 숭고한 정신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거쳐 5·18 민중항쟁과 촛불혁명으로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

2019년 3월 1일은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이 시작되는 날이다. 100년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다시는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거나 독재 권력에 의해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주는 의미는 한민족의 통합과 연대라 할 수 있다. 새로운 100년의 첫 과제는 한민족이 대립과 갈등의 70년 분단체제를 뛰어넘어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만드는 것이다. 남도일보는 이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2019년 3월 1일부터 10개월 동안 100년 전 과거를 돌아보고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을 모색해보고자 한다./기획총괄 김재기 전남대학교 교수

◇1부-광주 3·1운동 재조명

(1)동경 2·8선언과 광주 유학생들

(2)남궁혁·김함라 부부, 김마리아 자매

(3)김복현(김철)가맥의 독립운동

(4)10대 여학생 강화선과 윤혈녀

(5) 일곡마을 광산이씨 3부자

(6)광주 고려인이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까닭?

(7)3·1운동 참가자 서훈과 예우

2·8 독립선언의 주역들
2·8 독립선언에 가담했던 독립운동가들이 1920년 출옥을 기념해 찍은 사진./재일본한국YMCA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
2·8 독립선언문./행정자치부 보관
신문잡지종람소의 비밀독서모임회원 회원들.아랫줄 왼쪽부터 강생기 김태열 김용규 김복수 강석봉. 윗줄 왼쪽부터 최한영 오영표 최웅찬 김용호/전남대학교 학생독립운동연구소 소장
1917년부터 1918년에 신문잡지종람소가 있었던 건물(옛 광주 적십자병원 뒤편).이곳에서 정상호, 강석봉, 최한영, 김태열 등을 비롯한 비밀독서모임 회원들은 시국에 관한 토론을 벌이며 독립운동의 불을 지폈다./전남대학교 학생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

1919년 1월 18일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론의 핵심내용이다. 그런데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제창되기 이전에 학생들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가 탄생되었다. 이는 동경의 조선유학생들에 의해 1919년 1월 7일 결성된 <조선청년독립단>이다. 이들은 어떻게 숨 가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신속히 파악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갈 수 있었을까.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제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세계평화와 국제질서에 대한 논제가 각국 신문에 보도되었다. 승전국이 된 일본의 국제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이를 지켜보는 조선 유학생들의 심정은 침통했다. 그들은 일본의 기세를 누르고 독립을 쟁취할 방도를 강구했다. 영자통신 등을 통해 국제정세를 살피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찾고 있던 동경의 조선 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유학생 학우회 망년회와 동서연합웅변대회에서 독립 문제를 의제로 토론을 벌이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듬해 1월 1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다시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윤창석, 최팔용, 백관수 등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독립운동 실천 계획을 세웠고 다음날 1919년 1월 7일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독립단에는 백관수를 수장으로 김도연, 이광수, 최팔용 김철수, 김희술(광주), 김현준(나주), 정광호(화순), 최원순(담양), 장영규(광주) 등이 있었는데, 이들 중 광주공립보통학교(현, 서석초등학교) 동기였던 김희술, 정광호, 장영규, 김현준, 최원순은 광주전남의 만세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정광호와 김현준은 동경에는 외신기자들 뿐만 아니라 서양 사업가들과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 있으니 이곳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운동을 벌이면 한국인의 독립의지가 전 세계에 알려질 것이니 거사를 일으키자고 제안했다.

조선청년독립단원들은 이광수가 초안한 독립선언문을 2월 8일 동경 기독청년회관에서 선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2·8독립선언에는 남학생뿐만 아니라 김마리아, 황에스더, 현덕신, 박순천, 황신덕, 박승호 등 많은 여학생들도 동참하기로 했다.

독립선언문이 발표되는 2월 8일에 때를 같이 하여 조선에서도 독립선언을 함으로써 독립운동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지게 하기 위해 동경 도트가죠에 있는 김희술(광주)의 하숙집에 광주전남출신 정광호, 박한경, 최원순, 손의순, 장영규 등 10여 명이 모여 밤낮으로 일주일에 걸쳐 1만여 장에 이르는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1919년 1월 말 정광호(화순)와 김현준(나주)은 2·8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최남선 등 지사들을 만나 동경의 2·8독립선언과 때를 같이하여 국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켜줄 것을 요청했으나 확실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 이에 정광호와 김현준은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전라도 출신 박일구(장성), 최정두(광주), 김범수(광주) 등에게 독립선언문을 국내에 배포해줄 것을 요청하고 광주에서만이라도 2월 8일에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뜻을 같이 한 이들 5명은 등사판을 구입한 후 가마니 속에 숨겨서 2월 5일 경 광주로 내려온다. 광주에서 삼합양조장 간판을 붙이고 비밀독서모임을 하고 있던 최한영, 김복수 등이 정광호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되어 본격적으로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최한영, 김복수 정상호, 강석봉, 김태열, 김용호, 김용규 등은 1917년에 비밀독서모임을 조직해 옛 적십자 병원 뒤편에 있었던 신문잡지종람소에서 신문과 잡지를 열람하며 국제정세를 살피고 시국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들의 동태를 의심한 일제가 이곳에 광주면사무소를 옮기자 비밀독서모임 회원들은 충장로 4가에 삼합양조장 (옛 부래옥 자리)이라는 간판을 붙여 술을 마시며 노는 회합으로 일경을 속이고 비밀독서모임을 이어가며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이때 동경유학생이었던 최원순, 정광호, 이이규 등을 통해 일본 요코하마에서 발행된 영자 통신이 비밀독서모임 회원들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독일의 패전과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을 알게 되었고, 독립운동에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었던 터라 1919년 2월 초 정광호가 광주에서도 2월 8일에 독립선언문을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벌이자는 제안을 했을 때 기꺼이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8독립선언문을 광주에서 등사를 하면 일경에 발각될 우려가 있어서 박일구의 처가가 있는 장성군 삼계면으로 등사판을 옮겨 등사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등사를 하고 있는 도중, 서울에서 급보가 왔다. 전국적인 3·1운동을 준비 중에 있는데 광주에서 먼저 일으키면 큰 거사를 그르칠 수 있으니 중지하고 서울과 보조를 맞추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신중히 상의한 끝에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이미 인쇄한 것을 광주 사동에 있는 최한영의 집으로 옮겨 숨겨놓게 된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동경 기독청년회관에서 400여 명의 남녀 조선유학생이 모인 가운데 유학생회 임원 선거회라는 명목으로 독립선언문 선포식이 열렸다. 영문과 일문으로 된 독립선언문은 이미 각국 대사관, 영사관 및 외국 언론기관과 일본 정계와 언론기관에 발송된 뒤였다.

대회는 최팔용의 사회로 백남규의 개회선언과 윤창식의 기도에 이어 서 춘과 이종근의 경과보고와 취지 설명이 있었다. 뒤이어 백관수와 김도연이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자 장내는 일시에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으며 우레와 같은 박수와 조선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되었다는 승리감에 젖어있던 일본당국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무장한 일본 경찰들은 노도와 같이 들이닥쳐 몽둥이로 내리치며 최원순, 백관수, 등 20여 명을 연행해 갔고 9명이 구속 기소되었으며 모두 금고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손예빈 소설가

-손예빈 작가는 태평양전쟁 발발 전후 광주전남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과 당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호랑가시나무언덕>의 저자이다.

<참고자료>

-광주YMCA 90년사

-이필성의 삼일만세운동 논문(광주교회사 연구소)

-교육의 길, 사랑의 길(이기서 저 )

-호남사람 이야기(남성숙 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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