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선언문 들고 광주에 잠입한 정광호
화순 출신…‘메이지대 재학 중 독립선언 처음 제안
광주-서울 오가며 3·1운동 주도…상해 임정서 활동

광주 3·1만세운동 주역들. 윗줄 맨 왼쪽 정광호 인물은 주변 인사 증언을 토대로 그린 초상화다./전남대학교 학생독립운동연구소 소장.

동경 2·8독립선언을 처음 제안하고 삼일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광호, 그는 누구인가.

1980년 망명해온 북한 전 조국통일민주전선 부국장을 지낸 신경완씨가 증언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1991년 출간된 <압록강변의 겨울>에 정광호를 비롯한 납북인사들의 북한생활이 실렸다. 1895년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내리에서 온양정씨 정대교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정광호는 광주공립보통학교(현, 서석초)를 졸업했다.

가정형편을 고려하여 그는 경성고보 부설 임시교원양성소에 들어가게 된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정광호는 서울에서 ‘조선산직장려계’에 가입한 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임시교원양성소를 졸업한 정광호는 고향에 내려가 능주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독립찬가 등 항일적인 노래를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이유로 1년 후에 해임되고 만다.

일제에 의해 해직당한 그는 실력과 힘을 기르는 것이 조국독립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 여기고 적국의 심장 동경으로 건너간다. 메이지대학 정치학과를 다니며 항일운동에 참여하던 정광호는 2·8독립선언에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

1919년 1월 말 2·8독립선언문을 몸에 숨기고 현해탄을 건넌 그는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담양 출신이자 일본 유학중이던 국기열의 주선으로 정광호는 최정두, 김범수와 함께 3월 2일 청량리 근처 산기슭에서 광주에서 상경한 최흥종, 김철 등을 만났다. 이들은 광주지역에서 3.1 만세운동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진지하게 의논했다. 신중한 협의 끝에 광주지역의 총 책임을 최흥종과 김철이 맡기로 하였다.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난 3·1만세운동 후 일제의 주모자 수배령이 떨어졌다. 정광호는 일경의 추적을 피해 숨어 다녔다. 3월 말 가까스로 인천에서 밀항선을 탄 그는 중국으로 탈출했다. 광주지방법원이 실시한 궐석재판 결과 그는 3년형을 언도받게 된다.

정광호는 상해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로 일하며 임정요원들과 항일투쟁을 벌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대의원에 전라도 대표로 참가했다. 1919년 11월 대한애국부인회가 발각되어 헌병대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병보석으로 치료받던 중 1921년 탈출해 상해 임시정부로 온 김마리아가 고문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을 때 동지들과 함께 김마리아를 돌보기도 했다. 1924년에는 김두봉과 더불어 상해 교민단학무위원회 대표로 활동했다. 1927년 안창호 등 10여 명과 함께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1920년대 말 비밀리에 귀국했다.

광주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최한영이 살고 있는 광주의 사동에 주소를 두고 정광호는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송진우, 김병로 등과 연락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위원이었던 그는 이때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던 중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김성수와 김병로, 송진우 등 민족계몽운동가들에게 전쟁 성공을 위한 협조를 강요해오자 그는 경기도 양주군 천측사에 칩거한다. 전쟁물자가 부족하여 어린 학생들을 시켜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진까지 채취해가는 일제의 행태를 보고 일본이 곧 패망할 거라 예측했다.

천측사에서 해방을 맞이한 그는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을 함께 펼쳤던 송진우 등과 한국민주당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러던 중 미 군정당국의 발령으로 1947년 6월 그는 광주부윤(광주시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이 된 정광호는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을 수습해나갔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게 체포된 정광호는 북한에 납북 되고 말았다. 납북된 인사들과 함께 만포에서 감금생활을 하던 중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준비위원으로 추천된다. 그러나 불참하겠다고 하자 의견이 다른 인사들에게 심한 모욕과 구타를 당했다. 1956년 11월 사망한 정광호는 1989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고 1991년 국립묘지에 봉안되었다.
/손예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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