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특별기획>대한민국 새로운 100년...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남도일보 특별기획
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안창호 “김마리아 같은사람 10명만 있다면 이미 독립 했을 것”

언니 김함라·형부 남궁혁과 광주서 만세운동 준비
동경독립선언 참여후 광주-서울 오가며 거사 촉구

광주 만세운동 3월 10일 폭발해 4월 8일까지 이어져
양림동 기독교인·삼합양조회 회원들 주도적 역할

남궁혁 정광호 최영욱(김필례 남편) 분단으로 희생
“한반도 대립과 적대를 끝내고 화해와 평화 긴요”

◇1부-광주 3·1운동 재조명

(1)동경 2·8선언과 광주 유학생들

(2)남궁혁·김함라 부부, 김마리아 자매의 광주 3·1운동

(3)김복현(김철)가맥의 독립운동

(4)10대 여학생 강화선과 윤혈녀

(5) 일곡마을 광산이씨 3부자

(6)광주 고려인이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까닭?

(7)3·1운동 참가자 서훈과 예

독립기념관 김마리아 어록/독립기념관
광주3·1운동 참가자와 독립운동가들 서명부-1923년 상해국민대표회의 출석부:1번 김철, 2번 정광호, 72번 안창호, 92번 김마리아, 101번여운형 등 자필서명(한국외대 반병률 교수 소장)
서대문형무소 김마리아 수형 기록./독립기념관
서대문형무소 김마리아 수형 기록./독립기념관
1920년대 상해에서 김마리아와 안창호 차경신./독립기념관
1931년 평양에서 남궁혁의 가족./월간 중앙
상해 망명시기 남궁억과 김함라 부부./월간 중앙

경성(서울)에서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3·1 만세운동이 전라도 광주에서는 3월 10일 폭발했다. 10일부터 4월 8일까지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양림동 기독교인과 비밀 독서모임이었던 신문잡지 종람소 회원인 젊은 지식인들이 준비했고, 숭일학교·수피아학교·농업학교 학생들·지산면 일곡과 생룡의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참여한 대규모 독립만세시위였다.

광주에서 폭발한 대규모 만세 운동을 분석함에 있어서 그 동안 관심을 받지 못 했던 분 들이 있다. 이들은 전라도 출신이 아니면서 광주에서 헌신했던 분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남궁혁(南宮爀), 김함라(金涵羅), 김마리아(金瑪利亞), 김필례(金弼禮)가 주인공들이다. 경성출신 남궁혁과 황해도 출신 김함라는 부부다. 김함라는 한국의 잔다르크라 불리우며 2019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김마리아와 친자매이다. 황해도에서 광주로 시집을 온 김필례는 김함라와 김마리아의 종고모(從姑母)로 최흥종의 동생 최영욱(崔永旭)의 부인이다.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한 김마리아는 동경에서 부산을 경유하여 언니 김함라와 종고모 김필례가 살고 있는 광주에 2월 중순 도착한다. 이 때 광주에는 동경유학생 정광호가 귀국해 서울에서 인쇄한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2월 5일부터 내려와 있었다. 이는 광주 3·1운동 전에 동경 2·8 독립선언서가 두 갈래 길로 와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수피아 100년사’(2008)에는 “수피아 교사 출신인 김마리아가 동경 2·8독립선언서를 당시 수피아 교사로 있던 언니 김함나에게 전해주었다.”라고 쓰여 있다. ‘광주제일교회 110년의 발자취’에는 “김마리아가 광주로 가져와 종고모인 김필례에게 전달했고, 김필례는 남편 최영욱의 서석병원 지하실에서 그것을 복사하였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광주 3·1 만세운동에 정광호와 함께 동경에서 활동했던 황해도 출신 김마리아도 기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주 3·1운동 전에 김마리아는 수피아학교의 교사로 있던 김함라와 김필례의 주선으로 교직자와 간호원들을 초대하여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그런 다음 2월 21일에는 서울로 가서 황애덕(黃愛德)·박인덕(朴仁德)·신준려(申俊勵) 등을 만나 동경 2·8독립선언의 소식을 전하면서 여성 독립운동의 전개 문제를 논의했다. 교육계, 기독교계, 천도교계의 지도자들도 만나 재일 동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보고하면서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3·1운동이 발발한 날에도 황해도 봉산(鳳山)과 신천(信川) 등지를 돌며 지방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3월 5일에는 모교인 정신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남대문역 앞에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가 학생들의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피체되었다.

김마리아는 경무총감부에서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은 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 된다. 6개월의 시간동안 선생은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이를 이겨내고 8월 4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활동폭을 넓혀갔다. 서울, 대구를 비롯 부산, 전주, 진주, 평양, 원산 등 15개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는 등 2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 수합 활동을 벌여 6천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실적을 올렸다. 그러던 중 조직원의 배신으로 1919년 11월 28일 김마리아를 비롯한 임원진 등 52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북도 경찰국으로 압송되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받았으나 수감기간 도중 선생은 일제의 고문에 몸이 너무 상해서 병보석으로 1920년 5월 22일 출감하게 된다. 이후 1921년 고문으로 병든 몸을 이끌고 상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온갖 고문을 이겨내고 상해로 망명해온 김마리아에 대해 도산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사람이 10명만 있다면 한국은 이미 독립을 했을 것이다”라고 김마리아의 불굴의 독립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김마리아의 형부인 남궁혁은 광주 3·1운동의 주도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남궁혁은 1882년 경성출신으로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해 서양 문물과 언어에 매력을 느끼고 졸업하자마자 1901년 인천세관에 관리로 취직했다. 잠시 세관원으로 이곳에서 일하다가 1903년에는 전라도 목포세관으로 발령이 나 경성을 떠나 전라도생활이 시작되었다.

남궁혁이 목포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외국 선교사가 미국 남장로교 파송을 받아 왔던 변요한(Rev. John Fairman, Preston 邊要翰, 1875~1975)이다. 남궁혁은 변요한 선교사를 만나 목포 양동교회에 출석해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훈련을 받고 있던 중 선교사의 권고로 목포세관원의 자리를 포기하고,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영흥학교(永興學校) 영어선생으로 취직했다. 남궁혁은 게일(J. S. Gale) 선교사의 주례로 1908년 서울 연동교회에서 김함라와 결혼했다.

남궁혁이 광주 3·1운동에 관여하게 된 것은 목포의 변요한 선교사가 1909년 광주에 있는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장으로 가면서 남궁혁도 숭일학교 학감으로 옮겨 함께 근무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때 그는 북문안교회(北門內敎會, 현 광주제일교회) 출석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 교회 장로장립을 받았다. 1917년에는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목사가 된 후에는 광주양림교회를 시무했다. 그는 신학교 입학 전 광주 숭일중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을 때 영어실력이 뛰어나 젊은 청년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남궁혁은 1919년 3월 1일 민족독립만세운동이 서울, 정주, 대구를 위시 전국으로 확산되자 3월 6일 그의 집에서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비밀모임을 하게 된다. 남궁혁의 집에 모인 사람은 김철(김복현)을 비롯 김강, 황상호, 강석봉, 한길상, 최영균, 김용규, 최정두, 서정희, 김태열, 흥승애 등 교인들과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던 김함라, 김필례, 박애순, 삼합양조장의 비밀독서회 회원 정상호, 최한영, 한길상, 김복수, 김용규 등이다.

이 모의에 참여한 사람들이 양림동 기독교인과 삼합양조회 회원들로 광주 3·1운동의 주도층이다. 이 일로 남궁혁은 지도층 인사 21명과 함께 구속되어 온갖 고초를 겪게 되지만 광주지방법원 재판에서 최기순, 이기호와 함께 무죄로 석방된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우리나라 1호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평양신학대학 최초 한국인 교수가 된다. 그는 불행하게도 6·25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사망했다. 미국에 거주하며 북한을 1993년부터 70여회 방문하며 북미관계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남궁혁의 손자 토니 남궁(Tony Namkung)도 할아버지의 행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황해도와 경성에서 광주로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광주 3·1운동 적극 참여했던 남궁혁과 김함라, 김마리아, 김필례 가문을 기록하여 기억하고자 한다. 남궁혁은 애석하게도 6·25 전쟁에 납북되어 북한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김필례의 남편 최영욱도 6·25 때 인민군에게 희생당했다. 광주 3·1운동의 주역으로 상해로 망명, 궐석재판을 받은 동경 유학생 정광호도 납북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광주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분들이 분단과 전쟁의 참화를 피하지 못하고 희생된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이 된 2019년, 분단된 한민족에게 주는 메시지는 한반도에서 대립과 적대를 끝내고 화해와 평화가 긴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김재기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재기 교수는 한민족 독립운동과 디아스포라 연구, 광주학생독립운동 연구, 중국의 소수민족 분리독립운동 연구를 오랜기간 해 온 대한민국독립운동과 통일연구 전문가다. 현재 (사)재외한인학회 회장과 통일부 광주통일교육센터 사무처장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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