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79. 3·1만세운동과 광주·전남 <下. 3·1만세운동과 전남>

장날이면 곳곳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중순부터 4월까지 전남 전역

남녀노소·신분 관계없이 만세 부르며 행진

야산봉우리에서 횃불 피우는 산상 봉화 시위

해상에서 배에 태극기 달고 만세 부르기도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 등 종교계가 주도

목포 정명·영흥, 순천 매산학교생 큰 역할

일제, 항일 본산인 전남 중점 감시한 탓에

타 지역 비해 시위 건수 적으나 强度 높아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전남전역으로 번져 3월 중순부터 4월말까지 50여 일 동안 계속해서 벌어졌다. 전남지역의 3·1만세운동은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 등 종교계가 주도했다.

기독교 종교지도자들과 신자들이 대거 만세운동에 참가한 지역은 광주와 목포, 순천, 여수, 구례, 광양 등이었다. 특히 광주를 비롯 목포와 순천은 유진벨 선교사( Eugene Bell, 한국명 배유지) 등이 세운 교회와 학교가 조선민족사상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양한묵 선생
1947년 광주서중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모습.
영암회사정
1910년 10월 11일에 촬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 뒷줄 맨 좌측이 김철선생이다. 김철 선생은 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구성에 참여해 자금조달과 통신연락, 독립운동가 양성을 담당하는 교통부 차장직을 맡았다.
덕수궁 앞에서의 3·1만세운동.
목포만세운동 정명학교 학생 재판관련 기사(1922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
목포시의 3·1독립운동탑.
함평 3·1만세기념탑.
문장문장장터 만세재연. 함평 문장장터에서 열린 ‘4·8 독립만세운동’ 추모식 및 재연행사 모습(2018년) /함평군 제공
낙안3·1독립운동 기념탑.

■전남지역 3·1만세운동과 종교계의 영향

유진 벨 등이 세운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 광주의 수피아학교, 순천의 매산학교 등은 만세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다. 교사들과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주도면밀하게 만세운동을 준비했고, 함께 거리로 나가 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 후 학생들 상당수는 일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이 만세운동 과정에서 키워진 자주정신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비롯한 각종 학생운동으로 표출됐다.

1983년 전남 목포 정명여고 선교사 사택 보수 공사 당시 천정에서 3·1독립선언문을 비롯한 독립가와 2·8독립선언문, 격문 등의 문건들이 발견된 것은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가 조선독립운동의 산실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3·1운동의 발발과 일제의 잔혹한 진압행태를 본국에 보고하고 국제여론의 지지를 호소했다. 또 조선을 위해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광주 YMCA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3·1운동 전수조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호남신학대학교 송인동 교수는 3·1만세 운동 기간 중 만세운동을 국내외로 확산시키는데 기독교 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송교수는 3·1만세 운동 확산에 천도교 등 민족종교 역시 큰 역할을 했지만 기독교가 조선민족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을 한 민족대표 33인 중 16인도 기독교인이다. 전남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은 170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송 교수는 “조선에 기독교가 전래된 후 외국의 자유스러운 사상은 물론이고 글을 배우기 힘들었던 농민이나 하층민들이 선교사가 소개하는 기독교나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를 통해 지식을 쌓았다. 또 교회와 학교를 통해 자유민주사상과 독립사상을 배우고 느낀 사람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조선사회가 일제에 능동적이고 자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회적 변혁의 기틀이 마련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제는 기독교가 조선민족혼을 깨우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일병합 이전에 기독교의 교세를 약화시키려 했다. 일제는 조직적으로 기독교 조직을 와해시켜 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의도와는 달리 기독교는 더욱 강해져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1914년 장로교와 감리교에 의해 YMCA 전국 조직이 만들어졌다.

한일병합과 이후 조선 강점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저항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기독교인들은 ‘눈엣가시’였다. 때문에 만세운동 당시 일제는 시위에 참가한 기독교인이나 기독교인이 살고 있는 마을에 참혹한 일을 저질렀다. 교인들을 교회 안에 몰아넣고 불태워버리는 제암리 학살과 같은 일을 곳곳에서 벌였다.

기독교와 천도교의 영향이 함께 미쳤던 곳은 강진, 고흥, 순천, 완도 등이었다. 전남 동부지역은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펼쳐진 곳이 많다. 강진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제의 잔학한 토벌과정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보전한 김재계 선생이 천도교의 교세를 이어가면서 장흥·강진지역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유림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혹은 주도한 곳은 나주, 강진, 해남, 담양, 광양 등이었다. 학교교사가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곳은 영광, 곡성 등지였다.

전남지역 만세운동의 특징은 장날에 벌어졌으며 산봉우리에서 불을 피우는(山上烽火示威)나 산 정상에서 만세를 부르는(山上萬歲示威) 등 다른 지역과는 달리 특이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는 점이다. 또 연해안에서는 어민들이 배 위에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이는 전남이 산과 섬이 많은 지형적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농민군 후손이나 의병 후손들이 깊은 산과 섬으로 들어가 은거했던 것과도 관련이 깊다.

■전남지역의 만세운동 규모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전남전역으로 번져 3월 중순부터 4월말까지 50여 일 동안 계속해서 벌어졌다. 국사편찬위 데이터베이스에 의한 전남지역(광주 포함) 만세시위 건수는 36건이며 참여추정인원은 모두 9천30명이다. 사망자는 단 한명도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북지역 시위 건수 44건, 시위 참여인원 1만1천115명, 사망자 12명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전남지역의 만세운동 규모나 강도가 뒤떨어진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전남에서 치열했던 동학농민혁명이 벌어졌고 전남이 호남의병투쟁의 본거지였음을 감안할 때 언뜻 납득이 되지 않는 조사결과다.

이에 대해 2019년 2월 27일 국사편찬위원회와 동아일보가 공동으로 주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학술회의 ‘백년만의 귀환:3·1운동시위의 기록’에서 ‘조선총독부의 3·1운동 탄압책과 피해현황’을 발표한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은 “호남지역의 체포자 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면서 “일제군경 보고에서 시위가 누락됐을 소지가 있다”는 견해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에 앞서 광주에서 2월 20일 열린 ‘광주3·1혁명100주년학술세미나’에서 전남대 5·18연구소 임선화 연구위원은 ‘항일의병 전쟁의 중심지였던 전남지역에 대한 일제의 감시체제가 삼엄해 사전발각 사례가 많았기에 전남지역 시위 수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임 위원은 이날 ‘전남지역 3·1운동의 재조명’이란 발제논문을 통해 “전남 동부지역은 천도교, 목포 등 서부지역은 기독교가 중심이 돼 만세시위가 벌어졌으나, 사전에 발각돼 무산된 사례가 많았다”고 밝혔다.

임 위원은 “전남지역의 3·1 만세시위 규모가 다른 지역보다 크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의병들이 모두 체포되거나 사살됨으로써 항일조직이 와해돼 만세시위 규모가 작았다는 기존의 학설은 수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남의병의 맥이 끊어져서 만세시위가 적은 것이 아니라 항일의 기운이 매우 높고 항일지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일제의 감시가 치밀했던 것이 전남지역 시위가 상대적으로 적은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호남신학대학교 송인동 교수는 전남지역의 3·1운동 규모가 작은 이유로 일본 헌병 증원과 검문소 설치 등 항일투쟁의 본산인 전남에 대한 일제의 강력한 감시체제 작동을 들고 있다. 일제는 항일의병 때 광주·전남지역에 332개소의 검문소를 설치했다. 경남지역의 검문소는 285개소였다. 그만큼 전남지역에 대한 일제의 검문과 검속 활동이 두드러지게 펼쳐졌음을 볼 수 있다.

전남지역의 만세운동, 시위 횟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적지만 독립운동을 벌이다 수형생활을 한 전남지역의 독립지사 수는 매우 많다. 2018년 국가보훈처의 조사 결과를 보면 전국의 독립운동자 수형자 수 5천323명 중 광주·전남의 운동가는 1천985명으로 37.3%를 차지했다. 이는 그만큼 전남지역 독립지사들의 항일운동의 강도가 거셌다는 것이며 일제가 전남지역 항일지사들의 체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는 반증으로 삼을 수 있다.

전남도는 2018년 말을 기준으로 해 1919년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전남 전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한 군중 수를 2천863명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 시위에 가담했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 국사편찬위가 추정하고 있는 전남지역 시위 참가 인원은 모두 9천30명이다. 전남지역의 만세운동 규모와 희생자 수에 대한 정밀한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한편 전남도는 3·1운동 당시 펼쳐진 자주 정신과 애국애족 정신을 전남도정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지역정신으로 삼기 위해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기획, 추진해 눈길을 끌었다. 도는 횃불 전국릴레이 행사와 연계해 3월 23일 목포에서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갖고 상황극 등 다채로운 부대행사를 열었다. 도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독립역사의 길 투어와 3·1 만세운동 재현 시·군 독립만세운동 재현은 4월 11일 함평에서 마무리될 예정이다.

도움말/송인동, 박선홍, 김정호, 향토수호사(보병제31사단)

사진제공/광주시립사진전시관, 전남도, 목포시, 순천시, 함평군, 위직량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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