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4장 환도(還都)<292>

광해가 다시 물었다.

“누루하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네. 누르하치는 명민하고 용맹스런 부족장입니다. 명으로부터 도독첨사로 임명되어 사르흐, 영원성에서 복무하다가 지금은 용호장군으로 만주벌판을 누비고 있습니다. 해서여진(海西女眞)을 멸망시키고 독자적 힘을 기른 뒤 독립하였습니다. 다른 여진족에 비해 선진된 부족을 이끌고 제 부족을 통합하여 명국과 맞짱 뜰 정도로 힘이 커졌습니다. 이런 세라면 천하를 잡을 것입니다.”

“그 힘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그는 치밀하게 이길 조건들을 만들어놓고 싸움을 벌이지요. 요충지 확보와 기동전, 첩자 파견, 매복과 기습전 같은 전술을 구사합니다.”

“그건 우리가 배워야 하지 않겠나?”

“제가 쓰는 전술입니다. 우리 지형에 맞는 병법입니다.”

“다른 병법이 또 있을 것인데?”

“그는 자신을 뺀 나머지를 다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대부와는 다르지요.”

“우리 사대부는 자신을 뺀 나머지를 모두 적으로 돌리지. 그럴 듯하군. 하여간에 조선의 사대부란 것들이...”

그가 실망하는 빛으로 투덜거렸다.

“저하, 누루하치라는 이름은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입니다. 멧돼지 가죽은 질기고 추위를 잘 견디지요. 그의 기질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변방의 일개 부족이었던 누루하치가 명과 맞짱뜨고, 중원의 지배자로 서려 하는 힘은 그런 기질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오랑캐라는 여진족이 특유의 야생성으로 중국대륙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기동력에 의한 전환과 변화에 능합니다.“

“그건 우리도 배워야 하겠지?”

“당연합니다. 그들은 명의 문명된 것을 자기화했지요. 얼른 보면 명의 신국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중국을 정복할 야욕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감히 종주국을 어떻게 정복하느냐, 어림도 없다고 우린 꿈도 꾸지 않지만 누루하치는 아들들에게까지 야망을 키우고, 자기 대에 이루지 못하면 너희 대에 이루라고 가르치고 있나이다. 진취적 기상은 생명력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진취적 기상은 생명력의 근원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결속해야 합니다. 어느 면에서 그들은 우리와 같은 종입니다. 여진족은 우리의 고구려에 복속되어 살던 종족이었지요. 고구려는 성 안에 도시와 촌락을 이루면서 살고, 여진족은 기마족답게 유목생활을 하면서 사는 게 우리와 다를 뿐입니다. 우리가 올망졸망 수렵생활을 즐기는 사이 여진족은 정벌을 꿈꾸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와 차이가 있습니다.”

“무식한 것들이 우리와 같은 종이라는 걸 알랑가 몰라?”

“알 것입니다. 그러나 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고토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한민족이 최초로 세운 고조선 땅에 그들이 들어와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만주와 발해만 일대를 차지하고, 그 여세로 연경(북경)을 함락시키러 나서는 것입니다.”

“우리도 기마민족의 습속과 기질이 남아있잖나. 그 특질을 살려서 우리의 새로운 길을 가야지. 장차 이상적인 대륙국가를 건설해야 하지 않겠나.”

“옳은 말씀입니다.”

꿈은 좋지만 그게 가능할까. 답답한 기득권 세력이 권력 심부에 포진하고 있는데...그런 그들은 후궁이 국모가 되었을 때 상(喪)을 일년상으로 치를 것이냐, 3년상으로 치를 것이냐, 상장(喪章)을 오른쪽에 달아야 하느냐, 왼쪽에 달아야 하느냐로 피터지게 싸우는데, 어느 세월에 그런 꿈을 꿀 수 있겠는가. 열린 세계관이란 것이 도대체 그들의 가슴에 터럭만큼이라도 남아있을까. 이익만 추구할 뿐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

“발해만과 만주 일대에 역사를 일군 우리의 선조, 기마민족의 후예로서 진취적 기상이 깃발처럼 나부낀다. 듣기만 해도 시원한 말이군. 하지만 맨날 안방에서 싸우는 땅에서 과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겠나. 이걸 확 잡아야 하는데...”

광해가 답답하다는 듯 가볍게 자기 가슴을 쳤다. 정충신은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세자야 함부로 말할 자유가 있지만 정충신이 뭘 잘못 믿고 함부로 나섰다간 한 칼에 갈 수 있다.

“변방에 다시 가고 싶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알았다. 변경으로 보내주마. 그리고 밀명을 내리겠다. 누루하치를 만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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