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80. 구름과 마음이 쉬어가는 곳, 화순(和順) 적벽(赤壁)

붉은 절벽과 맑은 물에 마음을 빼앗기다

동복천 상류의 창랑천(滄浪川) 일대 총칭
丹心 품은 깎아지른 절벽이 빚어낸 秘境

조선 초기까지의 이름은 그냥 석벽(石壁)
최산두 선생이 적벽(赤壁)이라 이름 붙여

1985년 동복댐 조성 장항적벽 일부 수몰
수자원 보호 위해 통제, 6년 전에 부분 개방

오는 23일부터 이서외 2개 적벽 코스 추가
현지에서 탑승 신청 가능한 셔틀버스도 운행
 

하늘에서 본 동복호와 적벽의 풍경. 적벽은 동복천 상류 창랑천 일대 7㎞에 걸쳐 자리하고 있다. 옹성산의 절벽이 동복천의 물과 어우러져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과 그 절벽이 품고 있는 붉은 가슴, 그리고 그 단심(丹心)을 식혀주려는 듯 유장하게 흐르는 물줄기.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라도 맺혀 있는 날이라면 붉은 절벽과 푸른 물이 어우러져 있는 풍경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곳은 목청 좋은 이들에게는 노래 한가락을 바람에 실려 보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곳이다. 글을 아는 이들은 그 감흥을 일필휘지로 적어 보고픈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이런저런 세상사로 마음이 어지러운 날이면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곳이기도 하다. 혹 사랑하는 이, 아끼는 이와 함께 찾는 날이면 뛰는 가슴은 더 뛰고 따뜻해지게 된다. 눈을 크게 뜨게 해주고, 가슴을 뛰게 하는 곳이다. 예부터 많은 이들이 그곳을 찾았다. 시인들은 노래했고, 묵객들은 그렸다. 시화로 그 감흥을 내놓지 못한 이들은 그곳의 풍경을 마음에 담아왔다. 그리고 주위사람들에게 그 절경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곳은 아주 유명한 곳이 됐다.

그곳은 화순(和順) 적벽(赤壁)이다. 적벽은 동복천(同福川) 상류 창랑천(滄浪川) 일대 7㎞에 걸쳐 자리하고 있는 수려한 절벽경관을 총칭(總稱)하는 말이다. 동복천과 옹성산(瓮城山 573.5m)의 절벽, 절벽이 동복천의 물에 비치는 경치 등 산·물·수면풍경이 어우러진 빼어난 경치 때문에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왔다. 그리고 시와 글, 그림으로 감흥을 남겼다. 육당 최남선은 화순 적벽을 조선 10대 비경이라 칭송하면서 그 빼어난 절경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가을적벽. /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상수원 확보를 위해 1982년부터 1985년에 걸쳐 동복천에 댐이 건설되면서 일부가 수몰됐다. 이 때문에 상류인 장항적벽(다른 이름으로 이서적벽 혹은 노루목적벽) 25m정도가 물에 잠겨 버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해 자연경관이 보전될 수 있었던 이점도 있었다.

하지만 적벽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적벽’을 마음으로만 품고 사는 것을 너무도 아쉽게 여겼다. 그래서 화순군민들을 중심으로 해 많은 이들이 적벽공개를 행정당국에 요청했다. 동복댐 일대는 광주광역시에 상수원을 공급하는 보호구역인 관계로 광주시의 동의가 필요했다. 화순군과 광주시는 상수원보호를 위해 사전예약제를 통한 전용차량 운행과 주3회 개방 등에 합의하고 드디어 2014년 9월 24일부터 적벽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적벽을 찾고 있다. ‘화순적벽투어’는 전국적인 인기 관광 상품이 됐다. 개방 6년째를 맞은 2019년 2월말 현재 12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2019년 2월까지 적벽 버스투어는 이서 방면 적벽 중심으로 운행됐다. 그렇지만 3월 23일부터는 다른 지역 적벽 2개 코스가 추가된다. 사전예약 없이 현장에서 신청하고 탐방할 수 있는 셔틀버스도 운행된다. 더 많은 이들이, 더 많은 적벽을, 더 편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천하절경 화순적벽

1750년에 제작된 해동지도에 그려진 적벽주변. 물염정(勿染亭), 창량정(滄浪亭), 적벽(赤璧), 만폭대(萬瀑臺),고소대(姑蘇臺) 등이 묘사돼 있다.

화순 적벽은 천(川)과 산(山), 절벽(絶壁)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비경이다. 천은 동복천을 말한다. 동복천 상류인 창랑천유역과 무등산(無等山, 1,187m)에서 발원된 영신천(靈神川)이 합류돼 흘러가고 있다. 산은 옹성산이다. 옹성산은 화순군 북면, 동복면, 이서면에 걸쳐 자리하고 있다. 옹성산이라는 이름은 큰 옹기를 거꾸로 엎어놓은 듯한 옹암바위(해발 398m)와 고려시대 때부터 쌓아진 철옹산성이 합해져 생긴 이름이다.

절벽은 셰일층(진흙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층)이 절리(切離)되면서 만들어졌다. 지질학적으로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층으로 산성응회암과 셰일층이 결합되면서 붉은빛을 내고 있다. 동복천 상류인 창랑천을 따라 7㎞에 걸쳐 자리하고 있는데 장항적벽((獐項赤壁), 물염적벽(勿染赤壁), 창랑적벽(滄浪赤壁), 보산적벽(寶山赤壁) 등 4대 적벽으로 나뉘고 있다.

장항적벽은 이서적벽으로도 불린다. 또 다른 말로 노루목적벽이라고도 한다. 적벽 주변의 경관이 빼어나고 절벽의 규모가 웅장해 화순적벽을 대표하는 적벽이었다. 하지만 동복댐의 건설로 일부가 수몰돼 예전의 풍광과는 다르다. 물염적벽이나 보산적벽 등은 규모가 장항적벽에는 미치지 못하나 매우 아름답다.

1920년대 무렵의 노루목적벽과 망미정.(조선총독부 유리원판)

물염적벽에는 물염(勿染) 송정순(宋庭筍)이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세운 물염정(勿染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디지털 화순문화대전>에는 화순적벽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화순 적벽은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보산리·창랑리 일대 창량천 주위에 약 7㎞에 걸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경승지이다. 화순 적벽은 무등산 국립공원이 품고 있는 제일의 비경으로 예로부터 호남 제1의 명승지로 알려져 왔다. 무등산은 행정 구역상 광주광역시와 화순군·담양군에 걸쳐 있는 남도의 진산(鎭山)이다. 2013년에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고, 총 면적 75.4㎢ 중 화순군의 면적은 15.8㎢으로 약 20.9%를 차지하고 있다.

선조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낸바 있는 임훈(林薰,1500~1584)은 고을의 선비들과 1574년(선조 7) 4월 20일에 떠나서 25일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적벽을 유람한 바 있다. 70세를 넘긴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하제일의 명승을 탐승하려는 열망으로 무등산을 넘었다. 동행한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유서석록>(遊瑞石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으며 당시 날짜별로 들렀던 곳을 기록하였다.

한반도의 13정맥의 하나인 호남 정맥 중심에 무등산이 있고 백마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별뫼(星山)가 불끈 솟아 있으며 산의 끝자락은 적벽강에 담그고 있다. 해발 1,187m의 무등산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크고 작은 산들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백운산이 아득히 멀리 보인다. 그 사이에 화순군 동복면에 위치한 옹성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산 아래에 위치한 동복호는 파란 하늘처럼 맑고 푸르다. ‘옹성’이라는 이름은 거대한 암봉들이 하나 같이 옹기 항아리 형태를 띠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그 중 쌍바위는 조형미가 뛰어나다.

동복댐을 이루는 동복천 수계는 별산·안양산(安養山)·무등산(無等山)·연산(連山)·차일봉(遮日峰)·백아산(白鵝山)·옹성산의 산열을 유역 분수계로 삼고 있다. 위의 수계에서 발원한 지류들이 이서면 창랑리와 도석에서 만나 적벽으로 흘러든다. 수원지는 동복천 하류 달내(達川)에 건설되었으며 높이 44.7m, 길이 188.1m로 1985년에 완공되었고 담수 능력은 9,200만 톤이다. 이 공사로 말미암아 이서면 서리(西里)·장학(障鶴)·창랑(滄浪)·물염(勿染) 등 10여 개 마을이 수몰되었다.

댐 상류 4㎞ 지점에 화순 적벽이 위치하고 수면이 약 14m 정도 올라와 있다. 높이가 약 100m에 이르며 약 400m 길이의 퇴적암층으로 형성되어 있다. 강폭은 약 70m이고 상류 7㎞에 이르는 물가에 퇴적암의 일종인 점판암이 마치 병풍처럼 형형색색으로 펼쳐져 빼어난 경관을 이룬다. 화순 적벽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었다.’

옹성산에서본 한반도 모양의 적벽. /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적벽 이름의 유래

화순군과 동아시아역사문화연구소가 지난 2018년에 발행한 <화순 적벽의 옛 전경과 생활모습>책자에 따르면 화순 적벽은 조선 전기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석벽(石壁)이라 불렸다. 석벽이 적벽이 된 것은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때 동복에 유배된 최산두(崔山斗,1483~1537)선생이 화순 동복천과 옹성산 절벽이 어우러진 풍광이 중국의 적벽과 같다하여 그렇게 부른데서 연유하고 있다.

중국 후베(湖北) 지역에는 ‘적벽’(赤壁)이라 불리는 네 곳이 있다. 삼국시대 주유(周兪)와 조조(曹操) 군(軍) 간에 대전이 벌어진 양쯔강 변 적벽이 그 한 곳이다. 그리고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赤壁賦)라는 유명한 글을 남긴 황주(黃州)의 적벽이다. 나머지 두 곳은 무창(武昌)과 한양(漢陽)의 적벽이다. 고경명(1533∼1592) 선생의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따르면 최산두 선생은 화순의 ‘석벽’이 황주의 적벽과 비견될 만하다하여 적벽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0)선생이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 칭하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이 <적벽시>를 읊음으로써 석벽이 적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는 것이다. 장항적벽 즉, 노루목적벽에는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80m에 달하는 절벽 중앙에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는 적벽동천을 쓴 이가 임억령 선생이라는 주장이 있다. 일각에서는 ‘신선이 사는 곳’이란 뜻으로 화순 현감 이인승이 새겼다는 견해도 보이고 있다.

최산두·임억령·고경명 선생은 중국 황주의 적벽을 실제 구경하지 않았다. 중국의 문인들이 황주의 적벽을 절경으로 묘사한 글들을 읽으면서 그 이미지만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황주의 ‘동파적벽’과 ‘화순적벽’을 모두 다녀온 이들의 입을 빌리자면, 실제로는 화순 적벽이 훨씬 더 아름답고 규모도 웅장하다는 것이다. 중국 쪽이 먼저 알려져서 그렇지,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친다면 화순 적벽이 우위에 있다는 평이다.

■화순 적벽을 노래한 시들

노루목적벽 주변의 겨울 풍경. 수몰 이전의 눈 내린 풍경이다.(화순군 제공)

최산두와 임억령·김인후 선생이 화순적벽을 노래한 이후 화순적벽은 호남을 대표하는 절경

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화순 적벽의 옛 전경과 생활모습>에는 조선시대 문인들이 남긴 화순적벽과 관련된 시와 글이 많이 실려 있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였으며 또한 나주목사 등을 지낸 성리학의 대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1586년(선조 19)에 지은 <유적벽기>(遊赤壁記)에서 ‘동복(同福)은 호남(湖南)에서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데, 기이하면서도 아주 뛰어나 온 경내에서 으뜸가는 명승지로는 적벽(赤壁)이 있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뛰어난 문장가였던 임영(林泳,1649∼1696)도 다음과 같이 적벽을 노래했다.

복사꽃은 물결 타고 낚시터로 감돌고/방초는 무성한데 제비들은 오락가락

나그네 붙드는 주인의 뜻 알겠구려 /꺾어온 새 고사리 광주리에 가득하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도 <다산 시문집>에 실려 있는 <遊赤壁亭子>(적벽강 정자에서 노닐며)를 통해 화순적벽의 아름다움과 그 묘묘한 정취를 노래했다. 정약용 선생은 화순 현감을 지낸 정재원(丁載遠,1730~1792)의 아들이다. 다산 선생은 물염정에서 적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백성들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외면한 채 물놀이를 하고 있는 관리들의 행태를 꼬집은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화순 적벽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적고 있다.

역역추사세경분(歷歷秋沙細逕分)(해맑은 가을 모래 오솔길이 뻗었는데)

동문청취욕생운(洞門靑翠欲生雲)(동문의 푸른 산은 구름이 피어날 듯)

계담효침연지색(溪潭曉浸?脂色)(새벽녘 시냇물엔 연지 빛이 잠기었고)

석벽청요금수문(石壁晴搖錦繡文)(깨끗한 돌벼랑은 비단무늬 흔들린다)

자사연유수득취(刺史燕游誰得趣)(수령의 한가한 놀이 누가 흥취 즐기나)

야인경조자성군(野人耕釣自成群)(시골 사람 무리 지어 밭 갈고 낚시하네)

독련산수안고벽(獨憐山水安孤僻)(사랑홉다 고운 산수 외진 곳에 자리 잡아)

부방명성여세문(不放名聲與世聞)(명성 흘려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오)

운계루굴절(雲溪屢屈折)(구름 시내 여러 번 꺾어진 끝에)

요조견고정(窈窕見孤亭)(아련히 외론 정자 눈에 들어와)

적석류하기(赤石流霞氣)(붉은 돌 노을 기운 어리어 있고)

청촌낙조령(靑村落鳥翎)(푸른 숲엔 새들이 날아 내리네)

괘의풍함창(掛衣風檻敞)(옷을 건 바람 난간 훤히 트였고)

계람수화형(繫纜水花馨)(뱃줄 맨 곳 물풀 꽃 향기롭기만)

시간귀시로(試看歸時路)(돌아가는 길목에 눈 들어보니)

봉두이수성(峯頭已數星)(산봉우리 저 위에 별이 하나 둘)

조선 후기의 뛰어난 시인이었던 김창협(金昌協)도 1677년 겨울, 영암에서 부친을 뵌 뒤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적벽에 들린 뒤 ‘적벽(赤壁)’이라는 제목의 글을 아래와 같이 남겼다.

잇닿은 봉우리들 푸른 하늘 치솟고/그 아래 쪽빛 물결 한 줄기 감아도네

깎아지른 험한 바위 귀신 모습 영락없고/맺혀 서린 산 안개 구름 연기 흡사하이

소나무 전나무들 못 속에 다 비치었고/해와 달은 그야말로 돌 위에 매달린 듯

높은 비탈 저 위에 둥지 튼 학 있다 하니/깊은 밤 잠자리에 깃옷 신선 꿈을 꾸리

수몰 이전의 적벽 풍경.

조선 말기의 학자로 순국했던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은 생전에 적벽 주변의 정자와 그 절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송병선 선생은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고종을 알현해 일제를 물리칠 수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결한 우국지사다.

경치 좋은 터 잡아 정자를 지으니/아름다운 풍경이여, 모두가 즐겁구나

강물이 잠잠하여 꽃 그림자 비치고/산조차 고요하니 새소리도 한가롭다

고표(高標)에는 옛 정취 남아 있고/그윽하고 조용하여 속세가 아니로다

난간마루에 기대어 옛정을 생각하니/해가 서산에 지도록 돌아갈 길 잊었네

한편 ‘적벽’은 세상을 등진 선비들이 비의(悲意)를 표현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이는 적벽부를 지은 소동파가 한평생 중앙권력자들의 횡포와 내침에 시달리면서 불우했던 삶을 살았던 배경에서 비롯된다. 화순 적벽을 노래한 일부 문인들은 권력에서 밀려난 자신의 답답한 처지를 소동파의 마음에 빗대 적벽을 노래했다. 또 어떤 이들은 소동파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인생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염두에 두면서 적벽을 읊었다.

중국 북송을 대표하는 시인 소동파는 소식(蘇軾)이라고도 불린다. 1037년 중국 쓰촨성 메이산에서 출생했다. 22세 때 진사시에 급제했다. 첫 관직으로 궁정 사무를 담당했는데 이때 실세였던 왕안석에게 밉보여 좌천과 유배, 투옥이 거듭됐다. <적벽부>는 후베이성 황저우(黃州)에 유배됐던 1082년에 쓴 시다. 소동파가 양쯔강을 바라보며 가을과 겨울에 쓴 것으로 가을에 쓴 것을 <전(前) 적벽부>, 겨울에 쓴 것을 <후(後) 적벽부>라 한다.

<전 적벽부>에 나와 있는 한 대목의 글은 다음과 같다.

‘하루살이 목숨을 하늘과 땅에 맡기니/아득히 푸른 바다에 뜬 좁쌀 한 알 같구나/나의 생이 순간임을 슬퍼하고/장강(長江)의 무궁함을 부러워하노라/하늘의 신선 만나 즐겁게 노닐고/밝은 달 안고서 오래 살다 가고 싶지만/그럴 수 없음을 아니/아쉬움은 슬픈 바람에 실어 보내리.’

유배생활에 지친 소동파는 세상에 대한 모든 애착을 버렸다. 그리고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권력을 쥔 것이나, 권력에서 밀려난 것이나 결국에는 모두가 허망한 일이라고 깨달았다. 노년에 그가 남긴 <법혜사 횡취각>이라는 시의 한 대목에서는 소동파의 담담한 마음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비움의 미학이 엿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쓸쓸함과 비애가 느껴진다.

‘아름다운 이 난간도 오래가진 못할 터/난간에 기댄 나 혼자 늙어가는 건 아니구나/백년의 흥망을 생각하자니/내 마음은 더더욱 슬플 뿐.’

조선의 묵객들은 화순적벽을 노래하면서 한편으로 소동파의 아픔에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전라도 관찰사였던 한준겸은 1605년 화순적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적벽이란 이름만 부질없이 남았구나/소동파는 아득한 옛날의 기억들

오로지 한 조각 달빛만 남아 있어/이 긴긴 세월을 비추어주네

하얀 이슬에 강물은 싸늘한데/맑은 바람만 소매 끝을 스쳐간다

삼경 깊은 밤에 퉁소소리 끊어지고/북두 별빛마저 고요히 잠들었다.

선조 때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던 윤두수(尹斗壽,1533∼1601) 역시 ‘적벽’이라는 시에서 소동파를 언급했다. 시에 등장하는 ‘소선(蘇仙)’은 소동파를 일컫는다.

며칠 밤 이어진 풍우에 평호가 어두우나/적벽에서 노니는 일을 어찌 그만두리오

검은 치마 흰옷은 도사가 변한 학이요/큰 입 가는 비늘은 송강의 농어로다

하늘은 저물녘 되자 개어서 좋고/가객은 나를 따라 흥이 외롭지 않네

퉁소 소리 한 곡조에 산 대나무 갈라지니/소선(蘇仙)의 남은 뜻이 지금에 전해지네

■적벽의 정자와 누대

화순의 석벽을 신재 최산두가 ‘적벽’이라 부른 이후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러면서 많은 정자와 누대가 들어섰다. <여지도서>와 <대동지지> 등에는 적벽 주변에 세워진 정(亭)과 대(臺), 사찰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옛 기록에 등장하고 있는 누정과 사찰은 물염정(勿染亭)을 비롯 창랑정(滄浪亭), 사천정(沙川亭), 담관대(澹觀臺), 옹산정사(甕山精舍), 독락정(獨樂亭), 모락재(慕樂齋), 삼우당(三友堂), 탁영정(濯纓亭), 금사정(錦沙亭), 구석정(龜石亭), 탄금대(彈琴臺), 월담정(月潭亭), 백구정(白鷗亭), 강선대(降仙臺), 망미정(望美亭), 환학정(喚鶴亭), 낙화대(洛花臺), 한산사(寒山寺), 삼명각(三明閣), 보산사(寶山寺), 송석정(松石亭), 고소대(姑蘇臺), 성양정사(星陽精舍), 죽천정(竹川亭), 미암(美菴), 성산재(星山齋)등이다.

○창랑정(滄浪亭)

적벽 최초의 정자이다. 조선 중기의 인물 창랑(滄浪) 정암수(丁岩壽, 1534∼1594)가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창랑천의 절벽 위에 세운 정자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이 맑기 때문에 창랑이라 했다고 한다. 정암수는 판결사(判決事) 인례(仁禮)의 6세손이고, 진(璡)의 아들이다. 정암수는 1589년(선조 22) 을축옥사(己丑獄事) 후 세상을 등지고 창랑정을 짓고 은거했다. 훗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청정재(淸淨齋)로 이름을 바꾸었다.

1584년 동복현감에 부임한 한강(寒岡) 정구(鄭述, 1543∼1620)가 청랑정을 방문한 후 지은 시 등이 남아 있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아버지 김극효(金克孝, 1542∼1618)가 지은 시(詩)도 전한다. 김극효는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있을 때 창랑정을 찾았다. 이외에도 수많은 문인들이 창랑정을 찾아 이곳에서 느낀 감흥을 주옥같은 시로 남겼다. 창랑정은 1950년 6·25 전쟁 때에 월영정, 물염정 등과 함께 불타버렸다. 물염정은 복구됐으나 월영정·창랑정은 다시 세워지지 못했다.

○물염정(勿染亭)

물염정.

물염정은 물염적벽이 잘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을사사화 때 관직에서 물러나 화순에 은거한 송정순(宋庭筍, 1521~1584)이 건립했다. 송정순은 성균관전적과 구례·풍기군수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의 호는 ‘물염’으로 ‘속세에 물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의 호를 따서 물염정(勿染亭)이라 지었다.

송정순은 물염정을 외손 나무송(羅茂松)과 나무춘(羅茂春) 형제에게 물려주었다. 물염정은 6·25 전쟁 때에 소실됐으나 전후 다시 복구됐다. 물염정의 난간 현판에는 김인후(金麟厚)·이식·권필·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등이 남긴 시문(詩文) 20여 개가 걸려 있다.

○망미정(望美亭)

망미정은 장항적벽의 절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있다. 1646년(인조 24) 적송(赤松) 정지준(丁之雋, 1592∼1663)이 건립했다. 정지준은 창원 정씨로 청정재(淸淨齋) 정암수(鄭岩壽)의 손자이다. 정지준의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금산에서 순국한 참의공 정유성(鄭有成)이다. 정지준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을 향해 출병했으나 임금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했다. 그 뒤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망미정을 칫고 일생을 마쳤다.

망미정은 1873년(고종 10)에 증축됐다. 1950년 6·25 전쟁 때에 불타버렸으나 복구됐다. 동복호가 들어서면서 수몰될 처지에 놓여1985년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추사 김정희(秋史 동생 금미 김상희가 쓴 글씨가 걸려 있었으나 수몰 과정에서 분실됐다고 한다. 현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쓴 현판과 소암 현중화(素菴 玄中和)의 글씨가 걸려 있다.

■적벽 팔경

정지준은 적벽팔경을 지정하고 관련 기록을 처음 남겼다. 정지준은 적벽에 강선대(降仙臺)와 환학정(喚鶴亭), 망미정(望美亭) 등을 짓고 팔경을 읊었다. <동복읍지>에 실려 있는 적벽8경은 다음과 같다.

① 강선명월(降仙明月) 강선대에서 바라본 적벽 산 위에 솟아오른 밝은 달

② 환학청풍(喚鶴淸豊) 환학정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③ 금사어화(金沙漁火) 밤에 횃불을 들고 여인들이 고기 잡을 때 모래밭에 비쳐진 아름다운 모래 빛

④ 한암효종(寒庵曉鐘) 한산 암에서 울려 퍼지는 새벽 종소리

⑤ 한산폭포(寒山瀑布) 한산암 바위 위에서 내려 떨어지는 폭포

⑥ 화표귀운(華表歸雲) 화표봉 허리를 감고 도는 아침 운해

⑦ 고소락조(姑蘇落照) 고소대에서 바라보는 해지는 풍경

⑧ 황니설경(黃泥雪景) 황토밭 위에 눈 덮인 광경

김삿갓 시비.

김삿갓 역시 화순적벽의 아름다운 경관을 팔경으로 노래했다. 김삿갓은 생전 세 차례나 화순을 찾았으며 6년을 머물렀다. 그는 구암리의 창원 정씨 사랑채에서 1863년 3월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삿갓은 적벽을 자주 찾아 그 절경을 4언 절구로 노래했다. 현재 화순군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적벽팔경은 김삿갓의 4언 절구를 토대로 한 것이다.

① 적벽낙화(赤壁落火) 적벽 위에서 떨어지는 불꽃놀이

② 한산모종(寒山暮鐘) 한산사의 저녁 종소리

③ 선대관사(仙臺觀射) 선대에서 보는 활쏘기 놀이

④ 부암관어(浮岩觀魚) 부암에서 물고기 떼

⑤ 고소청풍(姑蘇淸風) 고소대의 맑은 바람

⑥ 금사낙안(金沙落雁) 금모래 위에 내리는 기러기 떼

⑦ 학탄귀범(鶴灘歸帆) 학탄에 돌아오는 돛단배

⑧ 설당명월(雪堂明月) 눈 덮인 집에서 보는 밝은 달

화순 문화원에서 제작한 적벽낙화 홀로그램 영상.

도움말/심홍섭, 화순군, 동아시아역사문화연구소

사진제공/위직량, 화순군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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