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5장 변경<298>

“왜 그렇다는 것인가.”

“제가 군마를 빌리러 온 처지에 적을 하나 더 만든다는 것은 앞뒤가 안맞습지요. 제가 여기 온 것만으로도 화친의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조명(朝明)간에는 군신관계, 혈맹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렇다고 여진과 척을 질 수 없다는 것이 광해의 뜻이었다.

“딴은 그렇다. 우리와 화친해야 한다. 하지만 말로만 화친을 말하면 믿을 수 없다. 실질적인 근거를 대라.”

“실질, 좋은 말씀입니다. 제가 조선의 옥수수 씨앗과 감자 씨앗을 가져왔습니다. 여진 땅은 박토인데 품질좋은 조선의 감자와 옥수수를 심으면 식량이 개선될 것입니다.”

당장에 누르하치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좋은 생각이다. 우리는 수렵으로 육류만 먹고 사니 한결같이 치아상태가 좋지 못하다. 찰옥수수와 하지 감자를 재배해 수확하면 식생활이 개선되고, 치아 상태도 나아지겠지. 실질 중에서도 상급이로다. 너의 깊은 뜻을 이제 헤아리겠다. 너나 광해는 생각이 다르구나. 신선하구나. 우리 군에 합류하면 어떻겠느냐.”

“저는 용호장군의 군사지휘법을 배워가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완곡하게 거절했다.

“내 군사철학은 깊은 것이 아니다. 군자부구 십년불만(君子復仇 十年不晩)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군자의 복수는 10년 뒤에 해도 늦지 않다, 그런 뜻 아닙니까.”

“맞다. 군자의 뜻은 길게 보고 멀리 가는 것이다. 흔들리지 말고 일관성이 밀고 가야 한다. 여진족은 오랫동안 한족으로부터 야만족이라고 멸시를 받은 변방의 족속이었다. 그런 모멸이 당연한 것이, 여진족은 중국의 분열정책에 놀아나고, 단결하지 못한 채 내부자끼리 서로 헐뜯고 싸우고 죽였기 때문이다. 하등 종족일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통합해 힘을 길렀다. 여진의 팔기(八旗) 아래 모이니 힘이 솟구치고 있다. 이 힘으로 명나라를 부술 것이다.”

“조그만 부족이 2억의 명을 친다는 것, 무모하지 않습니까?”

“만력제라는 명 황제가 너의 군왕과 비슷하게 무능하거든, 하하하.”

“거기에 저희 상감마마를 끼워넣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조선 왕이란 자가 백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면 끝판왕이다. 도망가면서 나룻배를 불지르고, 민가를 다 태워버렸다면서? 도성을 사수한다고 해놓고 몰래 도망가버리면 누가 그를 나라의 어른이라 부르겠나?”

막료장 오쿠타이가 받았다.

“왕이 한양을 빠져나가던 날 밤 비가 억수로 쏟아졌는데, 그때 많은 궁인들이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 갔다고 합니다. 피난 도중에 아랫것들이 몇날 며칠씩 굶고 있는데도 왕은 새우 눈알을 뽑아 만든 젓갈을 가져오라고 성질 부렸다 합니다.”

“그건 헛소문이옵니다.”

정충신이 대뜸 부정했다. 그건 모함이고 음해다. 실체가 보이지 않으면 잔영이 크게 보이는 것일까, 헛소문이 사실처럼 부각되고 있었다.

“내 일찍 싹수를 알아보았다. 좋은 이웃은 살붙이보다 가까운 법, 하지만 조선왕은 틀렸다. 세자 광해에게 왕위를 물리고 은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주제넘은 말이었지만 직접 광해의 밀명을 받고 왔으므로 정충신이 정중히 받았다.

“그 말씀은 저희 세자 저하를 욕먹이는 일입니다. 저희 세자 저하를 너무 모르고 하신 말씀입니다.”

“익히 알고 있다.”

누르하치는 광해의 기다림의 미학을 자신의 ‘군자부구 십년불만’(君子復仇 十年不晩)과 결부시키고, 그것으로 그의 됨됨이를 가름하고 있었다.

왜란이 터지자 두만강 변경까지 진출해 진을 살피며 군사를 모으는 모습을 보았다. 누르하치는 어느날 광해의 도감군에게 군량과 마초(馬草)를 제공했다. 2만 군사를 구원병으로 보내겠다는 호의도 베풀었다. 그러나 조선 사대부에 의해 그것은 여지없이 거절되었다. 어버이 나라를 위협하는 야인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조선의 예법에 어긋난다고 반대했다. 얼어죽을망정 도둑의 쌀을 얻지 않는다는 명분론이다.

“조선왕 휘하의 백관들은 여진족을 숫제 날강도 취급을 하더군. 어려움에 처한 조상의 나라를 돕겠다는 선심어린 호의를 노림수가 있다고 거절해버리니 싸울 생각이 있는 것이냐? 싸움에는 지푸라기라도 취하는 법이거늘....”

그런데 미래를 심자는 뜻으로 광해가 옥수수 씨앗과 감자씨앗을 선물로 보내온 것이다.

“내일은 종마장으로 가야 하니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자.”

누르하치는 정충신을 아들들과 연을 맺어주리라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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