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5장 변경<300>

“왜 여기로 왔느냐.”

누르하치가 물었다.

“적을 무찌르고 승전보를 알리러 왔는데 아버님께서 군마소로 가셨다기에 달려왔나이다.”

“이겼다니 잘했다. 나는 언제나 이기는 자를 우대한다.”

“이겨봐야 부족 열댓 명 죽이고 온 것 아니겠소?”

추엥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추엥과 다이샨은 한 뱃속에서 나왔지만 성격도 다르고 하는 행동도 달랐다. 추엥이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아 거칠 것없는 용맹성과 직선적이고 돌발적인 성격이라면 다이샨은 행동에 앞서 사고하는 신중한 성격이었다. 다이샨은 형과 아버지가 말 문제로 다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다이샨이 누르하치에게 제안했다.

“아버님, 퉁화 북변 마을을 공략하면서 상당량의 노획물을 확보했습니다.”

“어느만큼 되느냐.”

“노비 팔십에 부녀자와 아이들 일백, 그리고 말 일백오십 두입니다.”

“그러면 그중 쓸만한 것으로 골라서 백 두를 이 젊은 군관에게 주거라. 나머지는 내 진에서 주겠다. 조건은 없다.”

두 아들의 태도를 보고 누르하치는 둘의 사람 됨됨이와 효성을 가늠했다. 큰 아들 추엥은 어려서부터 전선을 따라다니며 거친 용맹성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장남이라 후계자의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지만 덕이 부족해 아비의 욕심을 충족하지 못했다. 탐욕적이고 거칠고 안하무인이다. 나중 칸이 되어서 권력을 휘두를 적에 피를 부르지 않을 날이 없을 것이다. 벌써부터 아비의 처첩에 눈독을 들이는가 하면 툭하면 동생들을 두둘겨 팼다. 후계자가 된다는 것이 소년시절부터 인정되었기 때문에 다른 패륵과 대신들이 그에게 충성했다. 그래서 더 기고만장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반대의 길로 간다. 누르하치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의 비행이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을 때 칠 요량이었다. 그는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하나의 치세술이었다. 자식과의 관계도 엄연한 권력관계다.

“조선의 왕세자가 특별히 우리한테 지원을 요청한 바, 고마운 일이다. 우리가 3만 병사를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 거절한 것에 비하면 얼마나 발전된 일인가.”

당장에 추엥이 반발했다.

“조선은 장차 명과 함께 우리를 칠 것입니다. 명과 합세해서 왜국을 물리친 다음 우리를 격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기를 지원하다니요?”

“추엥,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조선의 군관이 앞에 있는데 말을 구분해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 미리부터 전략을 말하면 뭐가 되겠느냐. 어리석은 놈.”

누르하치는 이 말을 남기고 말을 타고 먼저 떠나버렸다. 정충신은 다이샨을 따라 말을 달렸다. 다이샨이 정벌한 부족마을은 압록강 상류 관마산성이 길게 뻗어있는 퉁화였다. 칭허, 지안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면 우리땅 만포였다. 거리로는 이백여리 남짓이었다.

“말을 끌고 가는 법을 알겠지?”

다이샨이 고을의 양마장에 이르자 정충신에게 물었다.

“그야 주면 안고라도 가겠다.”

“욕심으로 되는 게 아니야. 요령이 있지. 발정을 한 암말들을 앞에 세워라. 지금이 한창 발정기다.”

그런 말 다루는 법을 정충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첩실 하양 허씨의 말을 듣고 평양성에 이르는 길목에서 탐학질하던 명나라 사신의 말을 그런 식으로 잡아버린 경험이 있었다.

“나는 네가 좋다. 우리 영원한 친구로 하자.”

다이샨이 말했다.

“조건없이 이렇게 도와주니 고맙게 생각한다. 친구로 하자니 내가 더 고맙다.”

“하지만 우정은 하루 아침에 깨지는 수가 있다. 우정이라는 것은 깨지라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겉만 보면 안되지. 사랑은 겉만 보고도 가능하지만 우정은 그렇지 않아. 그래서 우정은 키 작은 감자나무라고 하지 않나.”

“감자나무?”

“그래. 감자나무는 겉으로는 볼품없고 빈약해보이지만 그 뿌리는 굵고 튼실한 열매를 맺거든.”

“야, 너는 참 어른스럽다. 나는 싸움만 했을 뿐, 문자를 잘 모른단 말이다. 네가 너의 나라 변경에서 복무했으면 좋겠다. 나랑 자주 만나게.”

실제로 정충신은 몇 년 후 함경도 최북단 조산보 만호 발령을 받았다. 조산보 만호는 이순신 전라좌수사가 복무했던 곳이다. 녹둔도를 관할하는데 야인여진이 활개를 치는 곳이었다. 녹둔도는 오늘날로 치면 러시아 땅으로 편입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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