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81. 서재필, 비운의 혁명가이자 개화·독립의 선각자

上. 서재필 선생의 파란만장했던 삶

서재필, 조선의 개화·독립 위해 뜨거운 가슴을 바치다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 거쳐 미국 망명
미국서 의사 자격 취득 제2의 삶 시작

1895년 귀국해 자주독립 위한 계몽활동
일본, 암살 위협하면서 신문창간 저지

독립협회·독립신문 만들어 외세배격운동
1898년 日·露 압력으로 조선조정이 추방

광복되자 50여년 만에 미군정 고문 귀국
조국 근대화와 민주주의 실현 위해 헌신

정략가 이승만 대통령 취임하자 미 귀국
열정 넘친 개혁가였으나 뜻은 이루지 못해

서재필 선생의 평생 삶은 조국 조선을 개혁해 자주적이고 강한 나라로 만드는데 바쳐졌다. 그렇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서재필 박사의 업적에 대해 전체적으로는 높게 평가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번 81회에서는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던 서재필 선생의 생애에 대해 개략적으로 알아본다. 다음 82회에서는 일부 역사학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서재필의 ‘일부 행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서재필 박사의 생애와 관련된 비판적인 견해를 살펴보는 것은 역(逆)으로 ‘인간 서재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송재 서재필 선생. 서재필 박사는 조선의 개혁을 위해 몸부림치던 혁명가였다. 그러나 정변이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해 의사가 됐다. 이후 두 차례 귀국해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의 뜻을 완전히 펼치지는 못했다. 지식과 학문이 뛰어났으나 격변의 시대는 그를 한국정치의 중심에 놓아주질 않았다.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 선생의 ‘두 번 귀국’ 배경

어쩌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 아니라 ‘그’였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광복 후 혼란기에 미국은 대한민국의 정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삼느냐는 문제는, 사실 미국에 달려 있다고 과언이 아니었다. 미군정 시기에 미국은 이승만보다 ‘그’가 한국의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그런 제의를 거절했다. 그래서 결국 이승만이 한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됐다.

여기서의 ‘그’는 서재필이다. 송재 서재필은 1947년 7월 1일 인천항을 통해 일제의 압제에서 풀려난 조국 조선에 돌아왔다. 1898년 5월 조선정부에 의해 추방된 지 50년만의 귀국이었다. 그런데 그의 ‘귀국’은 실은 두 번째의 귀국이었다. 1884년 12월, 서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의 냉대로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1893년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그리고 1895년 12월 박영효 등의 권유로 조선에 다시 돌아왔다. 첫 번째 귀국이었다.

미군정 시절의 서재필.(앞줄 우측에서 네 번째)

○서재필 선생의 첫 번째 귀국

1895년 조선에 돌아온 서재필에게 김홍집내각은 주요관직을 제의했다. 하지만 서재필은 조선민중에 대한 계몽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벌였던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은 민중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조선을 침탈하려는 일본과 러시아의 야욕에 맞서려면 조선민중이 깨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독립신문을 창간해 조선민중을 계몽하는데 헌신했다. 국민개혁운동이 조선을 살리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고 논설을 통해 조선의 교육제도 개선, 민주주의, 산업개발의 중요성과 여성평등, 악습 폐지, 공중보건 개선 등을 주장했다. 또 중앙 및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학정을 비판했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서 세계사를 강의하면서 학생들이 세계정세와 민주주의, 정치적 자유의 사상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하고 토론을 지도했다. 이때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영향을 받은 인물이 이승만과 주시경 등이다.

독립문.

서재필은 조선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확실하게 알리기 위해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그 옆에 독립공원을 조성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열강들의 독립을 위해서는 독립문 건립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는 한편 대중 토론회도 열었다. 마침내 1897년 독립문이 세워졌다.

영은문.

실내에서 열렸던 독립협회 토론회도 1898년 12월부터는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열리게 돼 많은 대중이 참여할 수 있었다. 이른바 ‘만민공동회’다. 만민공동회에 참석한 연사들은 일본과 러시아, 독일 등의 부당한 이권 요구에 맞서 조선정부와 민중이 강력히 대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독립협회가 주도한 반대로 러시아의 ‘부산 앞바다 절영도 대여’요구가 좌절되기도 했다. 만민공동회는 조선민중의 뜻을 하나로 모아 표출하는 강력한 통로가 됐다.

○미국으로 추방되는 서재필 선생

열강들은 서재필 제거에 나섰다. 일본은 서재필이 조선침략의 강력한 장애물이 되자 공개적으로 암살협박을 했다. 일본과 러시아는 미국정부에 서재필을 미국으로 소환해줄 것을 수차례에 걸쳐 요구했다. 결국 서재필은 1898년 5월 조선정부에 의해 추방되고 만다. 두 번째 타의에 의해 조선 땅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자주독립국 조선을 위해 민중계몽과 외세배격에 앞장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재필 선생의 미국 내 한국독립운동 활동

1차 한인회의.

1905년 일본이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조선의 국권을 빼앗자 이승만 등이 찾아와 조선국권보호운동에 앞장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미국대통령에게 조선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1919년 한국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이승만, 정한경 등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고 한국독립을 위해 미국을 비롯 세계 각국이 협조해줄 것을 호소했다.

서재필과 안창호.(1925년 촬영)

제1차 한인의회 직후 서재필의 주도로 결성된 ‘한국 친우동맹(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n)’은 미국 내 20여 곳에 지부가 만들어졌다. 서재필 선생의 영향을 받은 안창호 선생도 적극 가담했다. 미국의 여러 유력인사들도 후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이 친우동맹은 한민족 독립의 열망과 한국독립 당위성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 ‘한국 홍보국(Korean Information Bureau)’을 설립하고 ‘한국평론(The Korean Review)’를 발행했다.

한국평론은 매월 2천부가 발행돼 미국 정부기관과 대학, 교회 등지에 배포됐다. 유력한 미국인들도 각종 글을 통해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1926년 하와이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한국독립 문제를 부각시켰다. 이후에도 계속해 신문과 잡지에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하는 한편 미국 내 여러 독립운동가들에게 물질적인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1941년 미국과 일본 간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징병검사관으로 자원해 3년 정도 봉사했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이런 서재필의 공로를 인정해 1945년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한국이 광복을 맞자 1947년 7월 미군정 최고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앞에서 밝힌 그의 ‘두 번째 귀국’인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그의 ‘귀국’은 조국애 때문이었다.

○서재필 선생의 두 번째 귀국과 쓸쓸한 이국(離國)

서재필은 한번은 정변실패에 따른 망명으로, 또 한 번은 외세의 농간에 의해 참담하고 암울한 마음으로 조선 땅을 떠났었다. 그렇지만 조국의 정치적 안정과 발전을 위해 82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 땅을 밟았다. 하지중장을 정점으로 한 미 군정은 1947년 6월 3일 군정청 한국인 기관을 ‘남조선과도정부’라 칭하고 서재필이 귀국하기 전인 그해 6월 20일 그의 특별의정관 취임을 발표했다.

한국인들은 서재필의 귀국을 대대적으로 반겼다. 서재필은 귀국 후 1947년 7월 3일부터 과도정부 특별의정관으로 일하면서 한국의 건국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 애썼다. 이런 과정에서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한국의 정치는 이념과 계파에 따라 혼란스러웠다. 서재필은 자신이 한국에 있으면 정계의 혼란과 분열이 더욱 커질 것이라 염려했다.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이승만의 노골적인 반감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서재필은 미국시민으로 남겠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서재필(가운데)과 김규식(왼쪽 끝), 여운형.

미군정 이후 반탁과 친탁 등으로 혼란이 이어졌다. 불안정한 한국의 정치상황을 우려하던 미국은 결국 이승만을 선택하게 되고 이승만은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서재필은 남한에서 단독정부가 세워지자 미군정을 따라 미국으로 돌아왔다. 1950년 조국에서 6·25전쟁이 터지자 충격을 받았고 이후 계속된 전쟁의 참담한 소식에 지병이 악화됐다. 서재필은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몽고메리병원에서 87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서재필의 유년시절과 김옥균과의 만남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다

서재필은 1864년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태어났다.(신복룡 교수는 1863년 11월 생으로 추정한다.) 아버지는 서광효(徐光孝), 어머니는 이기대(李箕大)의 다섯째 딸인 성주 이씨다. 서재필은 이들 부부의 둘째 아들이다. 보성 가내마을은 외갓집이 있는 곳이다. 친가는 충남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리다. 서재필은 6~7세 때 아들이 없던 칠촌아저씨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어머니는 서재필의 총명함을 눈여겨보고 서울에 있는 그의 동생 대관(大官) 김성근(金聲根)의 집으로 보냈다.

○김옥균을 만나다

서재필은 18세가 되던 해인 1882년 알성시(謁聖試:국왕이 문묘에 가서 제례를 올리거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시험을 치러 성적이 우수한 몇 사람을 선발하는 시험)에 합격해 교서관 부정자를 지냈다. 외숙 김성근의 집에서 머물던 그는 김옥균을 비롯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파였던 청년지식인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그보다 12살 연상이었던 김옥균은 서재필을 동생이라 부르며 매우 아꼈다.

○일본 무관학교로 유학가다

일본 도야마육군학교 사관생 시절의 서재필.

김옥균은 조선의 자주권을 확립하려면 군사력을 키워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재필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근대식 군사기술을 배워올 것을 권유했다. 서재필은 이에 1883년 일본 도야마(戶山)육군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으며 근대식 군대 조련법을 익혔다. 그렇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1년만인 1884년 6월 8일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 설립을 건의했다. 하지만 청나라와 손을 잡고 있었던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갑신정변과 개화파의 몰락

갑신정변 주역들.(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1884년 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했다. 김옥균 등 개화파는 조선에서 정변이 일어나도 청이 경황이 없는 국내 사정 때문에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개화파는 드디어 1884년 12월, 행동을 개시했다. ‘우정국’ 설립 축하연에 참석한 수구파 대신 5명과 내시 1명 등 집권세력을 제거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개화파는 ‘혁신정강 14조’를 선포했다. 주요 내용은 청나라에 대한 조공 폐지, 문벌 폐지, 평등권의 수립, 탐관오리 처벌, 국가재건 등이었다.

서재필은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던 사관생도들과 조선에서 훈련시킨 조련국(操鍊局)사관들을 이끌고 행동 전위대로 나섰다. 정변이 성공하자 서재필은 이 공으로 병조참판에 내정됐다. 그러나 명성황후 측에서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해 개혁파 군사들을 공격해왔다. 정변군의 수는 일본군을 포함해 150명이었다. 이에 반해 청군의 수는 1천500여명이었다. 군사 수가 부족한 개화파는 청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개화파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우정국.

이로써 갑신정변은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조선 최초의 개혁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발발 50주년이 되던 1935년에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을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점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점 ▲폭력적 혁명이 당시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적 가치관에 어긋난 점 ▲젊은 청년들이 개혁에의 열정에만 불타 있었을 뿐 치밀한 준비를 하지 않은 점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한 점 등으로 토로하기도 했다.

구 한말 신식군인들.(경복궁 동쪽에서 찍은 사진)

○서재필 가족의 처참한 죽음과 일본·미국 망명

갑신정변 이전에 서재필은 광산 김씨와 결혼해 어린 아들을 두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갑신정변을 역모로 규정했다. 그래서 정변에 참여한 자들을 체포해 처형하는 한편 참여자들의 부모·형제 등을 몰살시켰다. 서재필의 아내 광산 김씨는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며 음독자살했다. 어린 아들 역시 죽었다. 형 재춘은 자연사했으나 동생 재창은 살해됐다. 또 다른 동생 재우는 투옥돼 고초를 겪다가 가까스로 석방됐다.

갑신정변에서 살아남은 개화파는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이규완·유혁로·정난교·신응희·변수 등 9명이었다. 이들은 임오군란의 경우처럼, 역적으로 몰린 자신들이 체포되면 사형에 처해질 것을 알았다. 이들은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도피할 것을 결정하고 어렵게 인천에 도착했다. 그러나 친청(親淸) 수구파의 입장을 대변한 독일인 재정고문 묄렌도르프 등은 군사들을 이끌고 추격해왔다.

개화파들은 가까스로 인천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선박 치도세마루(千歲丸)에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개화파 인사들의 신병을 넘겨줄 것을 일본 측에 강력히 요구했다. 묄렌도르프와 조선조정의 신병인도 요구가 워낙 강력해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이에 응하려 했다. 그러나 선장 츠지 가츠산로의 도움으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일본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 정부에게 부담이 됐다. 일본 측은 열강들의 ‘개화파 정변 배후는 일본’이라는 비난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개화파 인사들을 냉대하고 이들의 조선 송환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서재필과 박영효, 서광범 등은 3개월 동안 어렵게 일을 하면서 미국으로 갈 수 있는 여비를 모았다. 그들은 1885년 4월 초 미국선적 차이나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떠났다. 그리고 2주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미국 망명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서재필의 미국 망명생활

○미국 정규 고등학교 졸업

서재필은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188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미 서부에 도착한 서재필이 동부지역에 정착한 것은 조선에 선교사로 와있던 언더우드의 주선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임창영 박사의 저서에 따르면 언더우드선교사는 서재필의 도움요청에 자신의 친형에게 연락을 해 서재필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연유로 서재필은 미국 동부인 뉴저지로 가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왜 서재필이 박영효와 서광범을 뒤로 하고 혼자 동부로 떠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박영효는 미국생활을 접고 귀국했으며 서광범은 떠돌이 생활을 했다. 미국생활 초기, 서재필은 가구점의 광고지를 배달하며 생계를 꾸렸다. 주말에는 교회를, 저녁에는 YMCA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영어를 배웠다. 이때 서재필은 어떤 친구 집에서 홀렌백(John W. Hollenback)이라는 펜실바니아 출신 사업가를 만나게 돼 1886년 펜실베니아로 거처를 옮겼다.

홀렌백은 펜실바니아 윌크스 배리어(Wilkes Barre)의 유지인 동시에 그곳 명문 고등학교인 해리 힐맨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의 이사였다. 그의 배려로 서재필은 해리 힐맨 아카데미에 입학해 미국의 정규학교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서재필은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됐고 1887년 6월 졸업식에서는 대표로 졸업생 고별연설을 하기도 했다.

○야간대학 졸업 및 의과대학 진학

컬럼비아대학교 의학부 졸업사진의 서재필.(맨 뒷줄 왼쪽 세 번째)

1888년 1월, 서재필은 미국 의무총감실 소속 도서관의 빌링스(Billings) 박사 밑에서 동양 의학서를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됐다. 서재필은 그해 가을부터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현 조지워싱턴 대학의 전신)의 야간부인 코코란 과학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3년 과정이었는데 서재필은 1년 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미 교육당국은 서재필의 뛰어난 능력과 조선에서의 고위관리 경력을 참고해 이 같은 학위수여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수련의 시절 서재필 선생.

서재필은 마침내 1889년 컬럼비아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해 3년 과정의 공부를 마치고 1892년 한인 최초로 미국 의학사(M.D.)가 됐다. 1893년에는 정식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서재필은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10일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이 역시 한인 최초였다. 그는 가필드 병원에서 1년간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1895~1896년에는 모교에서 세균학 강사로 일했다.

○서재필의 미국 여성과의 결혼

아내 뮤리엘. 결혼 당시 23살이었다.

서재필은 1894년 미국인 여성인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과 결혼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 등 언론은 극동의 먼 나라에서 온 망명객과 미국 여성과의 결혼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뮤리엘은 남북전쟁(1861~1865) 당시 철도우편국장이었던 조지 부케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이다. 조지 부케넌 암스트롱의 아버지는 미국 15대 대통령 제임스 부케넌(James Buchanan)과 이종사촌 지간이었다.

당시 서재필을 만났던 윤치호의 일기에 따르면 서재필은 의사자격을 취득하기는 했으나 미국사회의 인종차별로 인해 환자진료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해 한국공사관 측의 배려로 공사관 내에 있는 방에서 뮤리엘과 살았다고 한다. 한국공사관 직원들을 통해 서재필은 조국의 소식을 항상 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 그의 고민도 깊어갔다. 강대국 미국과 비교하며 바라본 조국의 현실과 운명은 참으로 암담했고 초라했다.

○서재필의 조선 귀국

1895년 가을, 서재필은 워싱턴에서 10년 전에 헤어졌던 박영효를 다시 만나게 됐다. 박영효의 권유로 서재필은 그해 12월 귀국하게 된다. 10년만이었다. 조선의 정치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조선조정에는 친일내각이 들어서 있었다. 자연히 갑신정변 연루자들에 대한 죄도 사면됐다. 조선의 친일내각은 서재필에게 관직을 제의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조선의 개혁이 성공하려면 민중에 대한 교육이 우선이고, 국가개혁에 대한 민중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문발행 작업에 착수했다.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The Independent)을 발행했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 등 외세를 경계할 것을 호소했다. 또 정치혁신과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일본과 러시아에 위협이 됐다. 결국 이들 나라의 압력에 따라 조선정부는 1898년 5월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하게 된다.

독립신문.

■서재필 박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

서재필 박사는 구 한말의 개화사상가이면서 <독립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이다. 굴곡진 구한말 시대의 격랑 속에서 갑신정변에 동참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박사가 됐다. 조선이 일제의 침략으로 속수무책 무너지고 있던 1895년 조선에 돌아와 자주정신 고취를 위한 계몽활동을 다양하게 벌였다. 하지만 결국 다시 추방되고 말았다.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되자 미국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애썼다.

서재필의 평생 삶은 조국 조선을 개혁해 자주적이고 강한 나라로 만드는데 바쳐졌다. 그렇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서재필 박사의 업적에 대해 전체적으로는 높게 평가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음 회에서는 일부 역사학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서재필의 ‘일부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서재필 박사의 생애와 관련된 비판적인 견해를 살펴보는 것은 역(逆)으로 ‘인간 서재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도움말/김중채, 권오기, 신복룡, 송건호

사진제공/김원옥, 사단법인 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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