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82. 개화·독립·민주의 선각자 서재필 선생
下. 서재필 선생에 대한 오해와 진실

“내 평생 소원은 백성이 주인이며 주권을 잘 지키는 한국”

개혁과 조선민중 계몽·외세 배격에 평생 헌신
그러나 미국인으로서의 처신에는 부정적 시각

미국공사관 보호 덕에 신랄한 정부 비판 가능
독립신문·독립협회 창설 후 일본 측 암살 위협

신변보호 위해서는 미국인으로서 활동이 최선
일본·러시아 압력에 조선조정 미국으로 추방

광복 후 재 귀국 시에도 정국안정위해 안간힘
50여 년 사용하지 않아 한국말 잊어 영어연설

가족몰살·두 차례 추방·이승만 배척 등 상처 커
전체적인 차원에서 ‘인간 서재필’ 이해 노력 필요
 

일본 육군학교 사관생 시절의 서재필.

■서재필 선생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평가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 선생은 ‘개화·독립·민주의 선각자’라고 평가받고 있다. 선생은 구한말 개혁가이면서 혁명가였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혁명(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의 실패는 그에게 좌절과 비극을 안겨다 주었지만 일본으로의 망명과 미국에서의 정착은 새로운 삶을 안겨주었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의사가 됐으며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귀국,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중계몽을 위해 헌신했다. 50여년 만에 귀국했던 미군정 시절에는 혼란스러운 한국의 민주주의 정착과 정치발전을 위해 부단히 애썼다.

미국에서 정착해 의사로 생활하던 중년의 서재필.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고 있다. 물론 조선의 개화와 자주독립, 광복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공로가 더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895년의 1차 귀국과 1947년 2차 귀국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과 행동은 ‘조선인’이라기보다는 ‘미국인’이었다. 자신을 미국인이라 생각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고종을 만날 때도 절을 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인사만 했다. 조선인들이 보기에는 그런 점들이 상당히 거슬렸다. 2차 귀국 때는 한국어가 어눌해 영어로 연설을 했다.

귀국 후 방송연설하는 서재필.(1948년 7월 21일)

○원망스러웠을 조국 조선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1890년 6월 10일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1895년 12월이다. 1차 귀국 전 10년 동안 서재필은 5년은 조선인 망명객으로, 5년은 미국인으로 살았다. 조선인으로서의 5년 세월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라 여겨진다. 정변에 실패해 일본으로 도망가고, 일본에서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워지자 가까스로 미국으로 건너온 서재필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복잡한 모습으로 인식됐을 것이다.

서재필이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는 한성신보기사.(1895년 1월 27일)

조선은 고통을 안겨준 조국이었다. 조선의 정적들은 자신의 가족을 무참히 살해했다. 아내와 아들, 동생 한명이 변을 당했다. 다른 가족들도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일본과 미국 망명 당시 조선은 그에게 고통과 원망의 나라였을 것이다. 서재필은 20대 초반에 망명객의 생활을 시작했다. 현실은 암담했다. 조선인으로서의 서재필은 희망이 없었다. 돌아갈 수 없는 나라였다. 조선에는 그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정적들만 가득했다.

서재필의 서소문 주택.

○제2의 인생을 살도록 해준 미국

그렇지만 미국은 서재필에게 제2의 인생을 다시 살도록 해준 나라였다. 우연히 만난 홀렌백(Hollenback)은 서재필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미국 의무총감실 소속 도서관의 빌링스(Billings) 박사는 그가 의학도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 동양 먼 나라에서 쫓겨 온 초라할 데 없는 ‘실패한 유부남’을 사랑해준 여인을 만난 곳도 미국이었다. 서재필이 재혼한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은 평범한 가정의 아가씨가 아니었다.

뮤리엘의 아버지 조지 부케넌 암스토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은 남북전쟁 당시 철도 우편국장이었다. 뮤리엘은 명망가 집안의 딸이었다. 조지 부케넌의 아버지는 미국 15대 대통령 제임스 부케넌(James Buchanan)과 이종사촌 지간이었다. 결코 쉽지 않았을 결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지 부케넌은 아끼는 딸이 보잘것없는 동양인과 결혼하는 것을 허락했고 결국 사위로 받아들였다.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해진 서재필

박영효.

여기서 우리는 서재필이 자신을 도와주고, 자신을 받아준 많은 미국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졌음을 헤아릴 수 있다. 서재필은 뮤리엘과의 결혼을 통해 미국에 정착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서재필은 조선에서 과거에 합격하고 일본 군사학교 교육을 받은 엘리트청년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김옥균, 박영효등과 함께 거사한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좌절과 고통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일본·미국 망명시절 서재필에게 조선은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아마도 정적들이 득세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죽음의 땅’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시민권을 취득한 이후의 5년 동안 서재필에게 조선은 또 어떤 나라였을까? 아마도 애증이 교차하는 조국이었을 것이다. 원망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 일본의 지원을 받는 개화세력이 집권하면서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결국 서재필은 박영효의 권유를 받아 조선에 돌아오게 된다.

서재필을 맞아들이는 입장에서 보면 서재필은 여전히 조선인이었다. 봉건적인 관점에서 보면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였어야 하고,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인 예의와 질서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예전의 서재필이 아니었다. 생각이 달라진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미국이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사상과 질서’의 틀에서 ‘조선의 봉건주의와 혼란’을 바라봤다.

당시 조선의 정치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일본과 러시아 등이 조선에서의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당시 지나치게 일본에 의존했다가 배신을 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 외세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결국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자신을 필요로 해 미국에서 불러들였지만 어떤 일을 당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개혁내각에 들어가 ‘조선인 관리’로 일을 하기보다는 미국인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한 채 조선의 계몽가가 되는 길을 택했다. 정세가 불안한 조선에서 신변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미국인’으로 사는 것이었다. 그런 서재필을 조선인의 잣대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일방적인 편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서재필의 심리와 처지에 대한 심층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이 선행돼야 서재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

■서재필 박사에 대한 역사학계의 상반된 견해

역사학계 및 역사학자들의 서재필 선생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 지난 2014년 4월2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언론학회 언론사연구회 세미나는 서재필에 대한 학자들의 여러 가지 평가를 여과 없이 지켜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한국외국어대 정진석 교수가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관한 논쟁점들’이라는 발제논문을 통해 서재필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비판적 시각을 대비·정리해 소개했다.

○서재필에 대한 우호적 평가

정교수는 이날 세미나에서 서재필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학자들과 저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1. 대전대 이광린 전 총장, 조선근대화에 기여한 서재필의 사상과 노력을 높이 평가. (<한국의 개화사상 연구>일 조각, 1979)

2. 서울대 신용하 교수, 서재필의 주권재민의식 계몽과 언론 발달에의 획기적 기여, 과감한 한글 전용을 조명. (<독립협회 연구>일조각, 1976)

3. 오세응 전 의원, 서재필의 독립협회 창설과 독립문 건립·배재학당 강의에 대한 의미를 강조. (<서재필의 개혁운동과 오늘의 과제>고려원, 1993)

○서재필에 대한 비판적 평가

또 한편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학자와 그들의 저서·논문·기사에 나오는 비판내용들을 각주로 달아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1. 경상대 여증동 교수(서재필의 친일적인 행적과 미국인 행세를 비판. <고종시대 독립신문>형설출판사, 1992)

2. 부산대 채백교수(서재필이 중추원 고문으로 매월 300원의 급료를 조선 정부에서 받았으므로 <독립신문>은 순수한 민간지가 아니라고 평가. <독립신문의 성격에 관한 연구>한울, 1992)

3. 상명여대 주진오 교수(‘유명인사 회고록 왜곡 심하다-서재필 박사 자서전’ <역사비평>1991년 가을호, ‘서재필 신화 왜곡된 진실들’<시사저널>1994)

○서재필 박사에 대한 주요 비판 내용

전남역사 111회 편에서는 서재필 선생에 대한 전반적인 삶과 사상, 그리고 활동상에 대해 소개했다. 이번 회에서는 서재필 박사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주요 비판 내용을 소개하고 이런 비판들에 대한 작가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서재필 선생에 대한 비판론자들의 견해는 타당성이 있고 그 근거가 분명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서재필 선생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삶 전체를 놓고 이뤄져야 한다. 부분적인 사실을 전체의 삶을 재단하는 척도로 삼아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서재필 선생에 대한 주요 비판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서재필 박사는 조선인이 아닌 미국인으로서 살아갔다. 그의 생애 중후반은 미국인으로 살았다. 1919년 한인연합대회 의사록에서도 그가 미국인으로서 행동한 것이 나타나있다.

2. 서재필 박사는 <독립신문>창간 주역이 아니라 <독립신문>제작의 실무자였다. 그리고 <독립신문>의 일부 사설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정부를 찬양하는 내용이 채워져 있다.

3. 서재필 박사는 자서전을 통해 독립문 건립비용을 자신이 모두 충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독립문 건립비용은 왕실은 물론이고 각계각층의 모금을 통해 충당됐다.

4. 서재필 박사가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들의 조선독립후원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서재필 박사가 전 재산을 쏟아부으면서 조선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서재필 박사는 조선독립을 홍보하는 책자를 만들 때도 재미동포들의 모금을 받아 자신이 운영하는 업체에서 인쇄했다. 따라서 재미동포들의 조선독립운동 지원을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졌다는 회고는 과장됐다.

5. 서재필 박사는 광복 이후 미군정 고문 자격으로 귀국하지만 자신의 부모 묘소를 한 번도 참배하지 않는 등 한국인으로서 동질성을 보이지 않았다. 서재필 박사는 미국시민권을 얻은 1890년 이후 자신을 서재필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한국인으로 살기보다는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미국인으로 살기를 희망했다.

■미국인 서재필과 조선인 서재필 사이의 괴리

○뿌리의식에서 비롯된 ‘미국인 서재필’에 대한 섭섭함

고종에게 절을 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인사만 했다거나, 혹은 당시에는 윗사람 앞에서 안경을 벗는 것이 예의였는데 서재필은 고종 앞에서 그러하지 않았다는 식의 비난이 있다. 조선인의 관점에서 보면 불경스럽고 오만한 행동이다. 하지만 이는 ‘현재의 미국 시민인 서재필’을 ‘과거의 조선인 서재필’로 본데서 비롯된 비난이다.

서재필을 향한 비난의 핵심은 쉽게 말해 ‘그가 뿌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에 이민 가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던 동포가 한국을 잠시 방문했을 때 드러나는 ‘미국식 행동과 사고’를 비난할 수 없듯이, 서재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어쩌면 같은 뿌리라 생각했던 서재필인데도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대한 서운함, 혹은 이질감이 그런 반감을 크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귀국 후 조선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행동했다는 비난

서재필이 미국인이 돼 조선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95년 12월이었다. 서재필은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는 대신 독립신문을 간행해 조선의 정치·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또 독립협회 등을 만들어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하면서 민중계몽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많은 이들이 부국강병과 자주독립, 자주자강을 강조하는 그의 사상과 가르침에 감명을 받고 세계정세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서재필은 일본과 러시아의 압력을 견뎌내지 못한 조선정부의 추방조치에 따라 1898년 5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조선의 개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렇지만 이때의 행적을 놓고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서 밝혔던 대로 1895년 12월부터 1898년 5월까지 조선에 머무는 동안 미국인으로 산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조선 진출에 매우 비판적인 서재필을 위험시했다. 정치적인 방해공작을 벌이고 공공연하게 암살위협까지 했다. 만약 서재필이 미국국적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실제 암살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서재필이 1896년 1월 신문창간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자 일본은 강력하게 저지활동에 나섰다. 당시 일본은 일본거류민 신문으로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행하면서 조선침략정책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외세배격을 주장하는 서재필 등 개화파의 주장이 실리는 신문이 발행된다는 것은 일본에 매우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주한 일본공사 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은 유길준을 위협했다. 유길준은 제3차 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서재필의 신문창간을 지원했다. 심지어 소촌수태랑은 서재필을 만나 직접 암살 위협을 했다. 당시는 일본이 일본공사관과 군인, 낭인들을 동원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직후였다. 대한제국의 황후까지 죽인 일본이 암살협박을 했으니 서재필로서는 신변의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윤치호일기>1986년 1월 31일조에는 이와 관련해 서재필이 윤치호에게 말한 내용이 아래와 같이 담겨있다.

‘일본인들이 이것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은 한국이 두 개의 신문을 가질 만큼 발전되어 있지 않는 한, 그리고 그들의 <한성신보>가 존재하는 한, 그와 경쟁적인 어떠한 신문창간의 기획도 단연코 분쇄해 버릴 것이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의사에 반대하는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도 누구나 암살해 버리겠다고 그들은 강력하게 암시하였다.

그들은 나를 독약처럼 미워한다. 내가 며칠 전 한국 상인들에게 석유를 일본의 중개를 거치지 말고 미국으로부터 직접 수입하는 것이 가격을 저렴케 하여 소비자의 이익이 된다고 연설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혼자이다. 미국정부는 나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정부나 인민들은 일본의 암살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도 없고 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보호받지 못한 채 혼자이다.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서재필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주위에 적극적으로 각인시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일본으로서도 미국인 서재필을 암살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됐다. 미국시민을 죽인다는 것은 미국 정부와 심각한 갈등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깊은 사정을 모르는 조선민중들은 ‘미국인인 척하는 서재필’이 탐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어로 연설한 것에 대한 반감

독립문 건립 50주년기념식에 참석한 서재필.(1945년 11월 16일)

서재필은 1920년대 일시적으로 활발하게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도 미국인임을 들어 스스로 한인단체의 주요자리를 사양했다. 광복 후인 1947년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는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동했다. 그는 자신이 서재필보다는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연설을 할 때도 영어로 했다. 이런 모습은 몇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철저히 알리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는 영어에 능통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세 번째는 어눌한 한국말로 말하는 것보다 영어로 말하는 것이 더 편했기 때문이다. 만약 첫 번째 의도였다면 이는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청중들은 그의 영어연설을 듣고 그의 신분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찌됐든 민중들은 그를 조선인으로 여겼다. 이런 괴리가 서재필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킨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 한인관리들과의 기념촬영.

두 번째 시각인,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영어로 연설했을 것이라는 시각은 사실과 달라 보인다. 그보다는 세 번째 이유인 한국말을 잊어버렸기 때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50여 년 동안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은 탓에 실제로 한국말을 잘 하지 못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이를 밝히고 양해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눌한 한국말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통역을 통해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던 듯싶다.

○‘실리를 밝히고 자신을 과장했다’는 서재필에 대한 비난

유길준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 유길준은 서재필의 신문창간을 돕기 위해 정부예산을 지원했다. 신문사 설립자금 3천원과 서재필의 정착비용 및 가옥임대비 1천400원등 4천400원을 책정해 지원했다. 또 서재필의 생계비 지원을 위해 월봉 300원을 기준으로 해 10년 기간으로 중추원 고문직책을 계약했다.

1898년 5월 서재필은 조선을 떠나면서 남은 계약기간의 봉급으로 3만원을 요구해 수령했다.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서재필이 열악한 조선재정을 감안하지 않고 거금을 챙겨갔다고 비난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그가 조선을 떠나면서 독립신문을 팔아넘기려 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이는 ‘계몽가 서재필’과 ‘계산속이 밝은 서재필’의 양면이 극도로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1895년 12월 귀국한 서재필은 ‘미국식 계약문화’에 철저히 길들여진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재필이 조선으로 귀국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그가 귀국(1차 귀국)을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김홍집내각으로부터 ‘외무대신 자리 제안’이 있어서였다. 개혁정권의 핵심인물이 되면 조선개혁을 쉽게 이룰 수 있겠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또 경제적인 어려움이 조선으로 발길을 향하게 했을 수도 있다. 서재필은 개업의였지만 동양인 의사를 경원시했던 미국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생계를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귀국을 종용하는 박영효는 서재필을 설득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기에 충분한 연봉을 약속했을 수도 있다. 그 사정이 어떠하든, 일단 조선정부는 서재필과 10년 계약을 했으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를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조선정부의 강요로 미국으로 돌아갈 처지에 놓인 서재필이 계약준수를 요구하며 나머지 계약기간의 봉급을 요구하는 것은 계약문화에 익숙한 ‘미국인 서재필’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를 ‘돈을 밝혔던 서재필’로 폄훼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독립신문 창간과 관련해 서재필이 자서전 등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과장한 부분이 있지만 독립신문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재필 자신이 재미동포들의 조선독립운동 지원을 전적으로 책임졌다는 회고도 사실보다는 과장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서재필이 상당한 사재를 털어 미국 내 조선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미 정계인사들을 만나 조선독립을 호소하고 미국 각 지역을 돌며 강연활동을 전개, 친한(親韓) 여론을 조성했다. 그의 조선독립운동은 필라델피아에 국한되지 않고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의 역할은 대단했다. 사소한 이유로 그를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서재필의 자서전 등에서 보면 자신의 행동을 지나치게 미화 혹은 과장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같은 부분은 서재필의 약점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과장이 전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역할을 좀 더 부각시키고 싶은 인간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받아들인다. 인간 서재필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독립신문> 사설에 일부 친일적 내용을 게재했다는 비난

서재필은 독립신문 사설을 통해 일본과 러시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주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또 조선의 교육제도 개선, 민주주의, 산업개발의 중요성과 여성평등, 악습폐지 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했다. 일부 사설에 친일적인 표현이 있다는 지적이 있으나 이는 오해다. 서재필은 일관되게 일제의 조선침략을 경고하고 이에 대해 대비할 것을 주장했다.

○조상 묘소를 찾지 않는 서재필에 대한 비난

서재필이 귀국해 조선에 머무는 동안 생모의 묘를 찾지 않은 것은 사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서재필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렸던 송건호 박사는 재단법인 송재 서재필박사기념재단에서 지난 2007년 발간한 <인간 송재 서재필> 제 3편 ‘해방 이후 송재 서재필의 두 번째 귀국’이라는 글에서 서재필이 생모의 묘소에 성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귀국 후 미군정 고문으로서 또 남조선 과도정부의 특별의정관으로서 공무에 바쁜 나날을 보낼 뿐 그의 생모의 묘소에 성묘를 가지 못했다. 나라의 공사(公事)가 그에게는 더욱 중요하였다. 서씨 문중에서는 그가 생모의 묘소에 성묘조차 하지 않은 것에 대단히 불만이었다. 그는 동양적인 조상숭배의 관념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의 파란에 찬 과거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서재필은 성묘를 가지 않은 이유를 궁금하게 여기는 문중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송건호 박사는 전하고 있다.

“지금 나라의 일로 한 시 한 초라도 아껴 일해야 할 위급할 때인데 내가 공인으로서 어찌 개인적인 일로 시간을 허비할 수 있겠소”

어쩌면 그의 이런 대답은 변명일 수도 있다. 서재필이 여러 사람들을 만나느라 매우 바빴던 것은 사실이나,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생모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바빴다’는 물리적인 이유보다는 생모의 묘를 찾았을 때 감당했어야 할 고통과 회한, 그리고 아내·아들·동생을 사지로 내몬 죄책감 등과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 실제 이유였을 것이다. 선의로만 해석하자면, 못난 아들·남편·아버지·형으로서의 죄책감 때문에 ‘차마 묘소를 찾지 못했던’ 것이라고 여겨진다.

■서재필의 진정성

전남 보성의 서재필기념공원 전경.

○신의를 중요시했던 서재필

서재필은 신의를 중요시 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이전과 이후 어떤 상황에서도 김옥균과 박영효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익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서재필이 미국 망명 초기 은혜를 입은 홀렌백을 떠난 것은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홀렌백은 서재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해 조선에 선교사로 간다면 모든 학비를 부담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달콤한’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서재필은 자신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으로 돌아가면 자신이 역적으로 처형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 사실을 알고도 홀렌백의 지원을 얻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상대를 속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서재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가기로 결심했다.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상대를 속이는 일과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2008년 7월 8일에 있었던 서재필기념공원 개관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관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사단법인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 김중채 이사장.

○불굴의 의지를 지녔던 서재필

서재필은 온갖 시련을 강한 의지로 이겨낸 인물이다. 문인이었지만 장차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인(武人)으로 변신했다. 힘을 길러야 열강과의 경쟁 속에서 조선을 지킬 수 있으며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일본 도야마 군사학교의 훈련을 받았다. 미국으로 망명 후에는 언어장벽을 극복하고 미국의사자격까지 취득했다.

1895년 1차 귀국 시에는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설, 토론회와 만민공동회 개최, 강연 등을 통해 민중계몽운동에 심혈을 바쳤다. 일본의 협박과 러시아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1947년 7월 83세의 고령으로 49년 만에 다시 귀국했을 때는 통일된 근대민주주의 국가건설과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을 정돈하는데 자신을 희생했다. 그는 어떠한 환경에도 지배당하지 않았다. 도전하고 이겨냈다. 좌절도 있었지만 그 실패를 성공의 디딤돌로 삼았다.

서재필기념공원내의 조각공원.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실패와 도전, 성취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훌륭한 뜻을 갖고 있었으나 모든 일을 너무나 성급히 서둘러서 본래의 훌륭한 목적을 잃어버리고 비참한 실패를 하였다. 그 결과 나는 고귀한 목적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달성하고자 노력함에 있어서 매일 주어진 일을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서재필이 1948년 9월 11일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당부는 다음과 같다.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소원이다’

도움말/김중채, 권오기, 신복룡, 송건호, 정진석

사진제공/위직량, 김원옥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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