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5장 변경<308>

하룻밤 게르에서 유숙하자 다이샨이 말을 몰고 돌아왔다. 그는 50마리의 말에 전리품을 가득 싣고 왔다. 그리고 스무명의 젊은 소녀, 아낙네를 가마에 태우고 왔다. 성욕에 굶주린 군관과 장졸들이 여자 포로들을 막영지로 끌고 가는데,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들이 흡사 짐승들 소리와 같았다.

다이샨이 이런 광경을 바라보며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먼지 풀풀 날리는 꿩깃 모자를 손으로 털고 게르로 들어왔다. 정충신과 시선이 마주치자 만면에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친구, 우린 언제나 극적인 때 만나는군. 자넨 내가 전승을 거둘 때마다 찾아온단 말이야. 마치 나의 승리를 몰고 오는 전령같이.”

“반갑다 친구야. 그랬다면 내가 행운의 사도로군.”

두 사람은 굳게 손을 잡았다. 정충신은 곁에 서있는 장만 장군을 소개했다.

“내가 모시는 함경도 관찰사 어른이시네. 자네들의 적인 야인여진 놈들을 혼내주신 분이야. 자네가 여진 통일을 하도록 야인여진을 치신 분이니 고마운 어르신 아닌가. 인품이 훌륭하고, 학문이 깊고, 마음씨가 크고 너그러우신 분이야.”

장만이 두 사람이 중국말로 나누는 대화를 알아듣지는 못하나 자신을 칭찬하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노정(路程)에 용맹스런 전사를 만나니 반갑소. 허나 나는 좀 더 잠을 청해야겠소. 두 사람이 좋은 대화 나누기 바라오.”

장만이 자리를 피했다. 옆 천막으로 사라진 장만을 보고 다이샨이 정충신에게 물었다.

“저 냥반 외로우면 여자 하나 넣어줄까? 객고라는 게 별 게 있나?”

그는 금방 포로로 잡아온 여인네 중 하나를 넣어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예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네. 점잖은 분이셔.”

“여자 밝히는 게 점잖고 안하고가 어디 있어? 니네 나라 사람들은 그게 문제야. 겉으로는 근엄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맨먼저 여자 궁둥이 까는 족속들 아닌가. 그런 방면엔 도가 트였다는 걸 내 다 알지. 자네 나라 사대부들 타락은 금수만도 못하다는 우리 뺨 친다던데? 후이파 여자 맛 한번 보면 뿅 가버릴 걸? 후이파 여자들은 해서여진 부족 중 제일 맛좋은 여자들이라 잡아온 거야.”

“남자들은 어땠나?”

“없애버리지 별 게 있나. 그 자들은 살려주면 언젠가는 덤비거든. 지 마누라 잡아갔다고 눈에 쌍불을 켜고 대들지. 그럴 때의 그놈들 눈에 부싯돌을 붙이면 금방 불이 붙어버릴 거야.”

“하여간에 무자비하네. 죽이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죽이는 것만 가질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도 가져보게. 그걸 두고 문화라고도 하고 정신이라고도 하지. 자, 징기스칸 한번 보게. 천하를 점령했지만 통치의 철학이 없으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잖나. 그의 무덤조차도 없잖나. 기껏 쳐부수는 것만 가지고 있으니 남는 것이 없잖나. 징키스칸의 몽골 문화, 몽골정신이 어디에 있나? 쳐부수고 조지고 먹고 마시고, 그러고는 끝이니 공허하지 않나. 파괴만이 능사가 아니야.”

“허튼 소리 그만하고, 늙은 장군을 모시고 무슨 일로 왔나를 말해보게. 우리한테 군사 요청하러 온 것은 아닐테고...”

“사실은 명나라에 가는 길이야.”

정충신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연행(燕行)에 차질이 없도록 길을 열어달라고 당부하고 덧붙였다.

“광해 세자가 후계 왕으로 책봉되면 여진 제국과도 가까이 지낼 걸세. 그러니 건주여진이 여진 통일을 이루기 바라네. 광해 세자께서도 그러길 축수하고 있네.”

“고마운 말이야. 그런데 왜 명나라 새끼들은 광해 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거야?”

“그야 후궁의 서차남이란 것 때문이지. 서자 중에서도 장자가 아니라 차남이라는 거야. 세자 저하가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공을 쌓았는데도 우리 상감마마께서도 광해 세자에게 대권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기도 하고...”

“왜 그런 거야?”

“명분은 없어. 다만 정실로 맞은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았지. 상감마마는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나봐. 하지만 아직 핏덩이란 말일세. 치사율이 높은 핏덩이에게 물려주겠다고 하니 나 역시도 돌아버리겠어. 조사(早死)하면 어지러운 세상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아이가 다섯 살이 되어야 정명(正名)이 주어지는데 아직 핏덩이를 가지고 권력놀음 하니 한심할 지경이야. 조정은 사대부가 동인 서인 남인 북인 소북 대북, 갈갈이 찢겨있어. 그런데 명나라도 미적거린단 말이야. 무슨 꿍꿍이속이 있나봐. 그래서 장만 관찰사가 진청부사로 중국으로 가시는 거야.”

“왕이란 자가 용렬한 것 아니야? 자기보다 똑똑하면 밟아버릴려고 하니 말이야. 우리도 명과는 철천지 원수다. 이분법적으로 말하면, 조선이 명과 친하면 우리와 원수가 되는 거야.”

“왜 자네는 명을 잡아먹으려고 기를 쓰는 거야?”

“그 새끼들이 우리 증조부와 할아버지를 죽였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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