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5장 변경<312>

오갈피대는 여느때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너희 사신단을 따르는 것은 명의 정정을 살피면서 너희들의 하는 수작을 보겠다는 것이다. 너희를 감시하기 위해 동행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날 아침, 행장을 꾸릴 때 정충신이 장만 관찰사에게 보고했다.

“우리가 명에게 접근하는 방식도 중요하지만 여진 군관에게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들이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역으로 그들의 심장을 꿰뚫어봐야 합니다.”

“도적놈들 상대할 필요 있어? 내버려둬!”

“소소한 도적이라고 말하기엔 저들이 너무 강대해졌습니다. 우월적 위치에서 내리깔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위세로 가면 곧 명을 제압할 세력입니다.”

“감히 산적들이 대명을 이긴단 말인가?”

“누르하치는 겉으로는 명나라에 복종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대항할 힘을 기르고 있습니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을 절묘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명이 우리나라에 원병을 보내면서 여진족에 대해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지자, 그 틈을 노려서 저 자들은 명을 칠 기회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명나라의 대 여진족 정책이란 것이 각 부족을 분열시켜서 통치하는 전략인데, 조선 원병으로 이완된 틈을 타서 누르하치가 군소 여진족들을 하나로 복속시킨 다음, 명의 땅으로 진격해 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자들이 그런 야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명에게 알려주는 것도 방법이겠군. 오갈피대가 조선의 피를 받았다 해도 그는 철저히 여진인이야. 믿으면 안된다. 여차하면 그들의 흉심을 명에 고변하도록 하자. 우리도 패를 잡고 있어야 할 것이야. 그러니 이렇게 하여야 한다. 우리가 북경에 들어가면 나는 명에 충실할 것인즉, 정 첨사는 여진 간자들을 관리하기를 바란다. 역할분담이다.”

“옳은 생각이십니다. 하지만 의리에는 흑심이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대할 때 저들도 따르는 것입니다. 저들과 신의를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이 강대해졌다면 우리 변경이 위험해질 것이다. 대비해야 한다.”

“물론입니다. 광해 세자의 국경관리 방책을 따라야 합니다.”

“국경관리 방책? 나는 그게 마땅치 않다. 등거리 외교, 균형외교를 말하는 것인데, 힘도 없으면서 줄타기하듯 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신의를 잃을 수 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자께서는 ‘안으로 힘을 쌓고,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쓴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거야 누구나 하는 말이지. 쉬운 말이면서 갖추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야.”

“그건 우리 태도의 문제일 것입니다. 세자 저하께서는 ‘우리는 겉으로는 결전을 벌이자고 하면서 막상 변경에 가라면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하고 기피하고, 이 또한 고려와 견주면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광해군일기)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권세 가진 자들이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진 자, 배운 자들이 솔선해서 책무를 다해야 하는데 반칙, 특권을 누리며 나라의 힘든 일에는 아랫것들만 내보내고 자기들은 뒤로 쏙 빠져버린다는 비판이지요.”

“곧은 생각이다. 이제는 광해의 시대렸다?”

“그렇습니다. 새 시대에 맞는 외교와 국방력을 세워야 합니다.”

그들이 명을 다녀온 뒤 조정은 변경 관리를 장만 관찰사와 정충신 첨사에게 위임했다. 장만은 평안병사, 함경도관찰사직을 번갈아 수행하면서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했다. 호지(胡地:여진의 땅)의 지도를 완성하고 지형 특성에 맞게 개발한 정탐전을 주도하는 한편으로 유명무실해진 특수부대 별무반을 재편성했다. 기병 위주의 병력으로 성곽과 평야를 순회했다. 통일 여진이 발흥하면서 국경 지역의 방어가 나라의 큰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니 대대적으로 군제(軍制)를 개혁해 국경선을 보강한 것이다.

정충신은 여진 부족장에게 공첩(公牒)을 보내 그동안 폐지되었던 4군이 조선의 땅임을 인식시키고 들어와 살고 있는 여진 부족들을 철수시켰다. 국방의 최일선에서 거친 여진족을 몰아낸 것은 정충신의 원만한 협상력이 큰 힘이 되었다. 정충신은 북변에서 누루하치의 여러 아들 가운데 둘째 다이샨과 여덟째 홍타이지와 특히 친했다. 둘째와 여덟째 사이라고 하니 나이차가 많아 보이지만 여러 배에서 동시에 나온 것들이라 나이 차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것은 국경 문제를 해결하는 디딤돌이 되는 셈이었다.

일석 점호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선조 임금이 승하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1608년 2월의 일이다. 이제 광해의 시대인가? 정충신은 만감이 교차했다. 그래도 그를 어여삐 여기던 군왕이 아니던가. 하지만 왕의 몽진을 생각하면 쓰디 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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