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83.독립신문과 보성 서재필기념공원

쉽고 담대한 글로 민족의 각성과 외세배격을 호소하다

서재필선생 독립신문 창간해 민족정신 고취
무능한 정부·부패한 관리 등 권력·외세비판

독립신문은 구한말 조선민중의 정신적 지주
만민공동회 등 통해 민의결집…‘촛불’의 始源

정론직필·권력 감시·여론형성 언론 소명 다해
1896년 4월 7일 창간일이 ‘신문의 날’기념일

서재필선생, 평생을 조선개화·자강 위해 헌신
보성 기념공원에서 선생의 뜻 살필 수 있어

■전남 보성의 서재필기념공원과 서재필 선생의 삶

서재필 선생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신문의 날은 서재필 선생이 중심이 돼 1896년 4월 7일에 선을 보인 독립신문 창간일에서 비롯됐다. 서재필 선생은 조선과 조선민중 개화와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헌신했던 분이다. 외세를 배격하고 관리들의 부패를 시정키 위해 앞장섰던 선생의 기개는 독립신문의 논설에 그대로 담겨 있다. 또 조선민중의 각성과 민주제도 실현을 호소했던 선생의 충정은 독립협회 활동상을 통해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전남 보성에는 선생의 선각자적인 삶과 조국애를 느껴볼 수 있는 서재필 기념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보성에서 태어난 서재필 선생의 위대한 삶을 기리기 위해서 조성된 공원이다. 서재필 선생이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동복군(同福郡: 지금의 寶城郡)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이다. 선대의 고향은 충청남도 은진군(恩津郡) 구자곡면(九子谷面) 화석리(華石里)다. 서재필 선생의 아버지는 서광언(徐光彦: ?~1884)으로 서재필이 태어날 당시 동복군수로 부임해 있었다.

서재필 선생의 어머니는 성주(星州) 이씨 이기대(李箕大)의 다섯째 딸이다. 이기대는 동복의 부호였다. 당시의 여인들은 친정에서 출산을 했는데 선생의 어머니도 산속(産俗)에 따라 친정인 보성에 내려와 서재필을 낳았다. 서재필 선생의 4형제가 모두 보성에서 태어났다. 차남인 서재필이 몇 살 때까지 보성에서 자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태어난 직후 곧바로 충남 은진으로 갔다는 설이 있는 가하면 아버지가 동복군수 임기를 마쳤던, 5살 때까지 보성에서 자랐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서재필 기념공원은 4만6천㎡의 부지에 조성됐다. 지난 2008년 완공됐다. 기념공원 정문에는 개화문이 있고 그 뒤로 자강문과 송재사가 일렬로 자리하고 있다. 왼쪽으로 서재필 선생의 동상과 기념관이 위치해 있다. 오른쪽에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을 실물크기로 그대로 본떠 만든 독립문이 있다. 독립문 옆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조각공원을 만날 수 있다. 공원과 생가를 잇는 2㎞ 길이의 송재로(松齋路)도 만들어져 있다.

2008년에 열린 서재필 기념공원 개관식.

서재필 선생은 1947년 7월 83세의 고령으로 49년 만에 다시 귀국했을 때는 근대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해 헌신했다.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에서 광복 한국이 건강한 민주국가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추대할 때도 정치적 안정과 정파간의 갈등이 생기는 것을 우려해 이를 사양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개화기 조선에서부터 광복 후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온몸을 던져 살았던 혁명가이자 선각자였다.

서재필기념관에 있는 독립신문 독립협회 관련 안내문. 김중채 송재 서재필 기념사업회 이사장(맨 앞. 설명하고 있는 이)이 방문객들에게 서재필 선생의 사상과 활동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서재필 기념공원에서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몸부림쳤던 우리 선인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는 관리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권력자가 나라를 이끌면 결국에는 나라가 약해지고 국권까지 빼앗긴다는 사실을 목도할 수 있다. 우리 근현대사를 오욕에 물들게 했던 정치인들의 탐욕과 무지·몽매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모두들 냉정한 시각과 지혜로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전남 보성의 서재필기념공원이다.

독립문 건립 50주년 행사에 참석한 서재필(가운데).

■독립신문 발간의 의의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 당시 김홍집내각의 지원을 받아 서재필선생이 주축이 돼 발행했다. 독립신문의 논조는 정부와 부패관리들에 대한 비판,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 있다는 민주정신의 함양, 외세의 침략에 저항해야 한다는 자주정신 결집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국가혁신과 민족자강, 부국강병이 주 논조였다.

독립신문 창간호 1면.

독립신문의 권력에 대한 비판기능과 외세에 대한 민족의 각성 촉구는 1896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 언론을 관통하고 있는 정신이자 가치이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정론직필과 권력비판을 생명으로 삼는 한국 언론의 출발점이자 정신적 원류(源流)이다. 저항과 비판정신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독립신문 창간일을 한국 언론이 ‘신문의 날’로 삼는 이유다. 따라서 서재필의 정신은 한국 언론의 기본정신이랄 수 있다. 권력을 감시해 부당한 일을 비판하고 세계정세를 널리 알려 민중이 눈을 뜨게 했다. 그리고 민중의 뜻을 모아 외세에 저항했다. 독립신문은 구한말 조선민중의 정신적 지주였다. 열강들의 조선침략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당시 조선민중의 힘을 한데 모아 나라를 지키는 힘이 됐다.

독립신문 창간호 영문판.

서재필은 조선정부와 외세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행한 기간은 2년1개월에 불과하지만 독립신문에 담겨있던 대쪽 같은 기개와 냉철한 지성은 지금도 한국 언론과 언론인들이 추구하는 지향점이다. 광고게재를 통한 수입원확보로 자주경영의 틀을 마련한 것도 독립신문이다. 독립신문은 한국 언론의 기본정신과 경영의 기본 틀을 제시했다.

독립신문의 영문판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는 당시의 조선사정을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 공사와 외국인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했다. 영문판은 주한 외교관들과 교육수준이 높은 외국인들을 독자로 했던 만큼 세련된 문장과 높은 지성이 필요했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윤치호와 호머 헐버츠, 아처 헐버츠 등은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청년시절이었던 1948년 서재필 박사에게 대한독립당 당원자격으로 보낸 대통령출마요청서. 이 요청서에는 당시 정치, 언론계 등 사회 각 단체에서 모두 1천929명이 서명했다.

■독립신문의 언론사적 의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독립신문의 언론사적 의미를 ▲정부와 백성의 가교 ▲권력과 외세에 대한 비판 ▲신문을 통한 여론형성 ▲한글전용과 영문판 발행 ▲신문경영전략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진석 교수가 <서재필의 신문경영과 언론사상>이라는 글을 통해 밝힌 독립신문의 언론사적 의미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부와 백성의 가교(架橋)

서재필은 창간사를 통해 독립신문이 정부와 백성사이의 다리역할을 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창간사에서 ‘정부에서 하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것이요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전할 터니 만일 백성이 정부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만이 있을 터이요 불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밝혔다. 즉 정부와 국민의 상호이해를 독립신문 발간의 중요한 목적이라 강조한 것이다.

○권력과 외세에 대한 비판

독립신문은 시국의 여러 사안에 대해 당당하게 논평했다. 1면 머리에 논설을 실어 정부와 관리들의 잘못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서재필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 관리들의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미국 국적을 지녔기 때문이다. 미국 공사관의 신분보호를 받고 있었기에 거침없는 태도로 정부와 관리들을 비판할 수 있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에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페일 터이요’라며 그릇되고 부패한 관리들에 대한 폭로를 이어갈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었다. 독립신문의 ‘권력에 대한 성역 없는 비판’은 후에 발행되는 신문들도 이 같은 ‘권력 비판적 논조’를 이어갈 수 있는 토양이 됐다.

○신문을 통한 여론형성

서재필은 <독립신문> 구독료를 매우 싸게 책정했다. 일반 백성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해 여론형성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서재필은 1897년 1월부터 독립신문을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분리해 발간했는데 한글판 구독료는 1장에 동전 2푼(2전), 월 25전, 연 2원 60전이었다. 이에 반해 영문판은 1장당 동전 5푼(5전), 월 75전, 연 6원이었다. 영문판 구독료가 2~3배 더 많았다.

영문판을 보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다소 비싸게 받아 신문사 경영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의도였다. 독립신문은 1897년 3월부터는 영국의 로이터통신과 독점계약을 체결해 기사를 공급받았다. 그리고 영어·프랑스어·일어로 된 신문과 잡지의 기사내용을 인용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독립신문이 영문판에 인용했던 외국신문이나 잡지는 모두 113개에 달한다. 최근의 뉴스를 공정하고 신뢰 있게 전달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글전용과 영문판 발행

독립신문은 한글을 전용하고 띄어쓰기를 사용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한글을 사용한 것은 누구나 쉽게 독립신문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띄어쓰기를 한 것은 읽기가 쉽고 뜻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글인 한글을 사용한 것은 조선의 정체성을 확립하겠다는 것과 조선사회의 계급적 폐쇄성을 깨뜨리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서재필은 회고록에서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 신문이 한문은 아니 쓰고 국문으로만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함이라. 또 국문을 이렇게 구절을 떼어 쓴즉 아무라도 이 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 속에 있는 말을 자세히 알아보게 함이라’

서재필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를 발행해 조선민중의 주장과 뜻을 널리 알리는 수단으로 삼았다. 서재필은 창간사에서 영문판을 발행하는 목적에 대해 ‘외국 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물은 즉 혹 편벽된 말만 듣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봐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 하여’라고 밝혔다. 이 같은 일은 조선조정이 해야 할 일이었으나 사실 관리들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조선민중의 생각과 조선조정의 입장을 밝히는 대변인 역할을 했다.

○신문경영전략

서재필은 여론전달과 수렴이라는 언론의 1차적인 기능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독립신문의 구독료를 매우 싸게 책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창간 당시의 독립신문 구독료는 가판이 동전 한푼(1전)이었고 월 정기 구독료는 12전, 1년은 1원30전이었다. 앞서 적은 대로 1897년 1월 독립신문을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분리해 발간하면서부터 구독료가 조금 비싸졌지만 창간 당시에는 백성들이 쉽게 사볼 수 있도록 매우 싼 가격이었다.

한글전용도 한자를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쉽게 신문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독립신문은 광고를 적극적으로 게재했다. 창간 당시에는 격일간으로 가로 22㎝, 세로 33㎝의 지면 4페이지를 발행했다. 이중 두 페이지는 한글기사, 한 페이지는 영문기사로 채워졌고 나머지 1페이지는 <광고>라는 제목아래 각종 광고를 실었다. 서재필은 광고도 기사 못지 않게 중요한 정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광고수입은 독립신문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됐다. 김은용의 논문 <대한제국시대 신문광고에 대한 일고찰>에 따르면 독립신문 창간부터 1899년 12월 4일까지 3년 8개월 동안 게재된 광고는 모두 4천693개로 호당 평균 7.2개꼴이었다. 한글광고는 3천817개, 영문 광고는 876개였다. 한글광고 중 가장 많은 광고는 독일무역상이 운영하는 세창양행의 상품광고였으며 영문판 역시 무역상, 잡화상 광고가 가장 많았다.

■독립신문 설립배경과 창간

○신문사 설립배경

신용하 교수의 <서재필의 독립협회운동과 사상>글에 따르면 1895년 12월 서재필이 귀국하자 갑오개혁 개화파들은 그를 크게 환영했다. 특히 서재필의 능력과 지식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내부대신 유길준은 내각입각을 권유하며 연설회를 갖도록 해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서재필은 내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귀국 후 며칠 동안 국내정세를 살펴보니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상황이 달랐다. 무엇보다 개화파 정부는 조선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이 민중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내각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외곽에서 미국인 신분으로 민중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것이 조선사회를 개혁하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재필은 내각에 들어갈 경우 정세변화에 따라 자신의 신변이 매우 불안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래서 신문 창간 준비에 들어갔다.

농상공부 고문 겸임장.

유길준은 서재필의 신문창간 제안을 적극 지지했다. 유길준은 서재필의 신문창간을 돕기 위해 정부예산에서 신문사 설립자금 3천원과 서재필의 정착비용 및 가옥임대비 1천400원등 4천400원을 지원했다. 또 서재필의 생계비 지원을 위해 월봉 300원을 기준으로 해 10년 기간으로 중추원 고문직책을 계약해 주었다. 당시 중추원은 별다른 업무가 없었는데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한 것은 순전히 봉급을 지원해주기 위한 배려였다.

서재필은 1896년 1월에 일본 오사카에 인쇄기와 활자를 주문하는 등 본격적으로 신문사 창간에 들어갔다. 그런데 일본 측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일본은 민족사상 고취와 외세배격에 앞장서고 있는 서재필이 신문사를 창간해 여론을 주도할 경우 일본의 조선침략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본공사가 직접 나서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암살해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일본은 서재필의 조선에서의 추방을 은밀히 추진했다.

이런 가운데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일본의 겁박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온건했던 갑오개혁파 정부가 붕괴되고 러시아공사관 안에서 박정양(朴定陽)을 서리로 한 친러 정부가 세워졌다. 일본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하고 러시아의 입김이 강해졌다. 한편으로 아관파천은 서재필에 대한 일본의 협박이 약해지는 계기가 됐다. 다행스럽게도 박정양은 서재필의 신문발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독립신문 창간

박정양의 친러 정부는 김홍집내각이 결정한 대로 서재필에게 신문사 설립에 필요한 3천원과 주거구입비등 4천400원을 지급했다. 그리고 정동의 정부소유 건물을 독립신문사 사옥으로 무상 사용토록 허락했다. 또 농상공부는 독립신문의 우송비를 다른 인쇄물보다 훨씬 저렴하게 받도록 조치해주었다. 농상공부는 업무지원을 쉽게 할 수 있도록 1896년 3월 13일자로 신문체신담당부서인 농상공부의 임시고문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사장 겸 주필을 맡았다. 국문 판 논설(사설)과 영문판 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편집을 책임졌다. 신문사 직원으로는 국문 판 조필을 담당한 주시경(周商鎬), 시정출입 기자인 孫承鏞 등 2명, 그리고 약간의 인쇄 직공이 있었다. 국문 판 편집과 교정은 주시경이 담당했다. 월 급여는 서재필이 150원, 주시경이 50원, 기자가 15원 등이었다. 주시경은 독립신문사에서 서재필 다음의 위치에 있었다.

독립신문은 당초 1896년 3월 1일에 첫 호가 발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인쇄기기가 1개월이나 늦게 도착했다. 게다가 아관파천으로 정세가 상당히 뒤숭숭했다. 이런 사정상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 세상에 첫 선을 보이게 됐다. 순 한글과 영어로 만들어진 독립신문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민중들은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시원하게 정부를 비판하는 독립신문의 내용에 환호했다. 외국인들 역시 여러 소식을 쉽게 읽을 수 있는 독립신문을 반겼다.

서재필은 창간호 사설에서 독립신문의 취지와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우리가 독립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하는데, 조선 속에 있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 주의를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 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 위하며,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 백성만 위할 게 아니라 조선 전국인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함. 정부에서 하시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터이요,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권할 터이니, 만일 백성이 정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올바른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만이 있을 터이요, 불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없어질 터이옴.’

■서재필과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자강운동

독립문 기공식.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 직후 주변의 개화파 인사들에게 독립협회 창립을 제의했다. 이와 관련해 박은식(朴殷植)선생은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조직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신용하 교수 등은 ‘독립협회를 창립 조직한 것은 국내의 이전 건양협회세력, 정동구락부 세력, 온건개화파 관료세력 등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창립돼 1898년 2월 21일 해체될 때까지 민족운동과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현을 위한 정치개혁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의 건립·조성사업을 추진했다. 이들 사업에는 개혁세력은 물론 고위관리, 조선민중들이 대거 참여했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협회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시민단체였다. 독립협회는 자주·민권·자강운동을 벌였다. 초기에는 민중계몽운동에 주력했으나 나중에는 민중들의 참정권 주장과 함께 입헌군주제로의 정치개혁을 주장하면서 의회설립까지 추진했다.

준공 당시의 독립문. 독립문의 설계는 서재필의 스케치를 기본으로 했다. 서재필은 파리의 개선문을 모형으로 해 기본스케치를 했다. 세부설계도는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러시아인 기사가 했다는 주장도 있음)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공은 당시 유명한 서양식건물 건축기사였던 심의석(沈宜碩)이 맡았다.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건립 비용은 조선 민중들의 성금으로 충당됐으며 독립문 건립에는 모두 3천825원이 지출됐다.

독립협회가 추진했던 주요 운동들은 열강들의 이권침탈반대 투쟁을 비롯 생명과 재산의 자유권 운동, 언론·집회의 자유권 운동, 친러 수구파 정부 해체와 개혁정부 수립 운동, 의회설립운동, 의학교 설립 운동, 황실호위 외인부대 창설 저지운동, 진남포·목포 조차(租借) 반대운동, 관민공동회 운동, 만민공동회투쟁 등이다.

독립협회가 본격적인 정치개혁 운동을 벌이게 된 것은 서재필과 윤치호의 ‘이심전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1898년 2월7일 서재필을 방문한 자리에서 독립협회가 주요 국정문제에 대해서 정치개혁운동을 벌일 것을 제의했고 서재필은 이에 적극 찬성했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제의에 따라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독립관에 모여서 토론회를 개최했다. 첫 토론회는 1897년 8월 29일 독립관에서 <조선의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첫 토론회에는 76명만 참석했는데 뒤에는 500여명이 모일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토론회는 조선민중들에게 민주주의 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절감케 했다. 또 근대교육과 여권신장(女權伸張)의 필요성을 느끼게끔 했다. 실내에서 열렸던 이 토론회는 후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조선민중들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만민공동회운동의 기틀이 됐다.

정치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추진했던 독립협회의 활동은 전제 군주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고종에게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수구 기득권 세력에게도 위협이 됐다. 고종과 수구세력들은 독립협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친정부단체인 황국협회는 보부상을 동원해 폭력사태를 유발했다. 또 공권력을 동원해 독립협회를 무력화시켰다.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기득권 세력과 열강들의 배후지원으로 결국 독립협회는 1899년 해산되고야 만다.

■독립신문 폐간

박정양 친러 정부는 독립신문의 창간과 운영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제작과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독립신문은 물론이고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정부 고위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러시아 등 열강들의 이권침탈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차츰 서재필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갔다. 러시아·일본은 노골적으로 서재필 제거에 나섰다. 미국을 압박해 서재필을 미국으로 소환해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 측은 처음에는 서재필을 적극 보호하려 했다. 그런데 미국의 외교정책과 방향이 달라지면서 입장에 변화가 생겼다. 미국은 1898년부터 팽창주의·제국주의 노선을 택했다. 대외이권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런데 1898년 2월 21일 독립협회가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租借)를 반대하는 <구국선언상소>를 올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즉각 2월24일 미국공사알렌(Horace N. Allen)을 방문해 서재필의 본국소환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주미 러시아대사 캐시니백작 역시 미국대통령을 면담하고 서재필의 소환을 부탁했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조선침략에 있어 서재필이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일본은 일본정부 고문로 일하고 있던 윌리엄스를 앞장세워 미국정부 측에 서재필소환을 요청했다.

서재필은 고종과 친러 정부의 관리들에게도 눈엣가시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논설과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전제 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立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하려고 했다. 고종은 서재필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친러 정부의 조병식은 이미 1897년 12월부터 러시아와 함께 서재필 추방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 미국, 조선조정 모두가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서재필이 신한민보에 기고한 재미한인들에게 당부하는 글(신한민보 1949. 2.3)

결국 서재필은 1898년 5월 14일 미국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로도 독립신문은 계속 발행됐다. 조선정부가 1899년 12월 4일자로 서재필에게 4천원을 지급하고 독립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매수한 뒤 독립신문은 폐간됐다. 창간된 지 43개월 만이었다. 발간된 총 호수는 한글판 776호, 영문판이 442호였다. 서재필은 자신의 추방과 독립신문 폐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친아(親俄:러시아) 친일할 것 없이 두 편 정당들을 모두 매도하였다. 그 까닭은 그 두 편이 너나없이 외적세력의 괴뢰노릇을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글로나 말로나 조선의 민리민복만을 위하여 일하고, 남의 굿에 놀지 않음이 조선위정자의 의무라고 역설하였다. 이 종류의 설교가 민간에 효과를 내기 시작하여 일반은 점차로 정부의 행사와 그 정치적동향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 기운이 가속도로 농후해져 매 일요일 서대문 밖 독립관에서 내가 연설을 할 때에는 청중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이 민중의 각성되어가는 형상이 황제와 그 완명 고루한 각신(閣臣)들과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양적 음적으로 활약하고 있던 열국 사신들을 놀라게 하였다. 사교적으로는 그네들과 별 충돌 없이 지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모두 나를 증오하였다.(중략)

어느 날 미국공사는 내가 황제와 모종 세력에 적대적 태도를 취함은 가장 불현명한 일인즉 위해가 신변에 미치기 전에 가족 동반하여 미국으로 다시가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얼마 동안을 더 계속하여보다가 내가 종자를 뿌렸은즉 내가 떠난 뒤에라도 거둘(秋收)이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품고 나는 할 일없이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기로 결심하였다.’

도움말/김중채, 정진석, 신용하, 김은용, 권오기, 신복룡

사진제공/위직량, 김원옥, 사단법인 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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