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광해시대 1장 역사 청산 <316>

인원을 점검해보니 병졸의 반이 비어있었다. 정충신은 화가 났다. 기강 해이 정도가 아니라 이건 숫제 진영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엄숙하게 국경을 지켜야 할 자들이 자리를 비우다니, 이러니 오랑캐의 침입이 뻔질나는 것 아닌가. 그는 군졸들을 비상소집했다.

“병사들 모두 어디 갔나?”

정충신이 소리치자 한 군졸이 앞으로 나섰다.

“도망 갔습니다.”

“도망을 가? 어디로?”

“저도 모릅지요. 항용 그러니까요.”

“그러면 국경수비는 누가 하느냐?”

“국경이 따로 있습니까요. 여긴 야인여진 땅이고 해서여진 땅이고, 조선 땅이고 구분이 없습니다요. 그냥 굴러가는 것이지요.”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이 고따구로 근무할 적시면 모두 모가지다!”

“모가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인생 막장에 와있는데 사는 것에 무슨 애착이 있겠습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필경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았다. 정충신은 군졸을 더 닦아세웠다.

“그간의 사정을 솔직히 말해보렸다.”

“이곳으로 부임해오는 첨사 나리나 사또 나리, 하다못해 이방·호방·병방들까지 한탕 해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지요. 관청은 과다하게 농지세를 부과하고, 닷새에 한번 꼴로 백성들 노역에 동원하고, 이것을 어길 적시면 쇠푼으로 닦으라고 하고, 병사들은 급료가 나오면 상관이 투전판을 벌여서 홀라당 따까마시해버리고, 몸파는 기생 집에 병사들을 집어넣어 이익금을 포주와 반분하고, 원님이든 누구든 돈을 써서 타지로 나가려고만 하고, 그래서 그 돈을 벌충하느라 고을마다 전별금을 할당하고, 이런 식입니다요. 돈을 내지 못하는 자는 딸자식을 첩으로 내놓거나 장성한 아들놈을 노비로 내놓아야 한답니다.”

“그 말이 사실이렸다?”

“두 말하면 개소리지요. 제가 누구 안전이라고 헛소리 하겠습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군졸이 나직히 속삭였다.

“이 변경에 급행료가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하고, 살았다 할 것이 없습니다요. 사또든 군관 상급자든 첩이 없는 자가 없습니다요. 변경의 여인들은 모두가 쭉 뻗은 미인들입죠. 한번 빠지면 헤어나질 못하지요. 여러 종족의 씨가 섞이니 미모들이 출중하고, 속궁합이 문어 빨판처럼 힘이 대단합지요. 정 첨사 나리도 한번 빠지면 뿅 갈 것입니다요.”

“농담하지 말고 상세히 말해보렸다.”

군졸에 따르면, 지방 관속들이 내놓고 이럴진대 사회상이 혼란스럽고, 국경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고, 그러니 여진 오랑캐들이 뻔질나게 안집 드나들 듯하며 고을마다 분탕질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변경일수록 아전과 세리 등 하급관들의 횡포가 극심했다. 중앙 통제가 어려운 것을 기화로 국법 대신 사법(私法)으로 고을을 관리했다. 사법은 정해진 규칙없이 꼴리는대로 운영되는 제도였다. 호구세, 토지세 따위가 없는 집구석에 더 많이 징수되고 있었다. 중앙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니 호족에게 자치를 맡긴 결과였다. 향리가 외지에서 파견된 첨사나 원님과 짜고 조세, 공물징수, 노역징발 권한을 남용했다.

관찰사는 조선건국 초기까지는 지방청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관직을 띤 채 지방행정을 순찰하는 것으로 임시직에 불과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지방 상주했다. 그러나 상징적 자리였고, 실무는 이방 등 하급관들이 전담했다. 이방은 인사·비서·서무직이었으며, 호방은 호구·전곡 등 재정사무를 분장했다. 예방은 예의·제사·사당에 관한 사무를, 병방은 군정에 관한 사무를, 형방은 법률·소송 등에 관한 사무를, 공방은 공장·영선 등에 관한 사무를 각각 분장하였다.

각 방에는 비장이라고 하는 수장을 두었으며, 그외 각방에 종사하는 자를 이속(아전 또는 이서)이라 했다. 비장이나 이속은 토착민 중에서 관찰사가 임명하지만 관위를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고, 사무만을 전담하는 자로서 양반계급을 제외한 서민계급이 취임하는 직위였다. 그런데 이 자리가 알짜였다. 실무자인지라 대민 접촉이 활발하고, 그런 면에서 돈 챙기는 알짜배기 자리였다. 이러니 관찰사보다 이속이 상급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중 함경도가 심했다. 첩첩산중인지라 행정력이 더욱 미치지 못하고, 에먼 백성을 쥐어짜니 난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정리한다? 정충신은 고민에 빠졌다. 나라를 튼튼히 보전하는 것은 내치의 가치관이 바로 서야 한다. 내부가 썩으면 나라는 저절로 무너진다.

이렇게 고민에 빠져있는데 한 젊은 선비가 정충신을 찾았다. 해맑은 얼굴에 지적 풍모가 풍기는 청년이었다.

“정 첨사께 인사차 한양에서 왔소이다.”

“누구시관대 이 먼 길을...”

“나는 최명길이란 사람이오. 장만 관찰사의 사위 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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