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광해시대 1장 역사 청산 <317>

나이는 정충신보다 대여섯 살 아래로 보이는데 체모는 의젓하고 고상해보였다. 양반 귀족의 자제라는 것을 단박에 알게 해주었다.

“장만 관찰사의 사위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장인 어른을 찾아뵙고 인사드릴 겸 변경의 사정도 알 겸해서 왔습니다. 어른께서 정 첨사 나리를 꼭 한번 만나보라고 하시는군요.”

“잘 왔소. 그럼 우리 자리를 옮깁시다.”

두 사람은 아래쪽 마을의 주막으로 자리를 옮겼다. 색주가인 듯 분냄새 풍기는 젊은 여성들이 부산나게 주방(酒房)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여기는 산판이 많아서 초부들이 나무를 찍어내리는 산역을 하다가 술 한잔 걸치러 내려오는 자들이 많소. 거칠게 사는 모양이 꼭 만인(蠻人) 부족 같소. 우리 군사들도 들어와 술 먹다가 이자들하고 한판 붙곤 하지요. 그런데 내 부하놈들 상당수가 어디론가 사라진뒤 열흘째 돌아오지 않고 있소.”

“어디를 갔단 말입니까?”

“내가 부임해보니 기강이 엉망이오. 술방에 왔으나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을 양해하시오. 모범을 보여야 하니까요. 새파란 젊은이이니 색을 쓰도록 해야 도리이나 나 역시도 금욕생활을 하고 있소. 대신 배부르게 막걸리나 마십시다.”

“좋지요. 장인 어른 만나러 와서 오입질하는 꼴 보이면 제 얼굴도 안서지요.”

두 사람은 막걸리를 동이로 들여서 바가지를 술동이에 띄워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들어가자 최명길은 다변이었다.

“정 첨사께서 군 기강이 엉망이라고 했는데, 그것만이 아니지요. 도성 역시 어지럽습니다. 현실적이고도 개혁적인 이념은 퇴조하고, 보수적이랄까, 사림정치라는 것이 세상을 꽉 막히게 누르고 있습니다. 도대체 변화라는 것이 없어요. 불필요한 예론(禮論), 이딴 거가 삶의 바탕을 지배해요. 그러니 생기가 돌지 않지요. 구질서만이 아니고, 진취적인 새로운 것을 찾아서 발전의 동력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니 기력이 자꾸 쇠해져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란이 따지고 보면 이런 것들이 쌓여서 불러들인 것 아니겠소? 부패와 오만이 하늘에 닿고 있소. 특권의식에 젖어서 면세(免稅)와 면역(免役)을 당연시 여기고, 백성들이 고혈을 짜고 있습니다. 그들이 먼저 앞선 자의 책무를 다해야 하거늘, 내놓고 신역(身役)을 면탈하려 하고, 병역·부역을 면하려고 자제들을 일찍이 어느 곳으로 보내버린단 말이오. 변경에선 돈 받고 죄수의 옥살이도 제역(除役)시킨다는 소문이 있소.”

그러나 탄식만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두서없이 얘기를 나누다가 결론을 찾아냈다.

“광해 세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은즉, 뜻을 모읍시다.”

“좋은 생각이오. 나는 일찍이 그의 뜻을 알고 있소.”

“뜻이라고요? 언제 만났습니까.”

최명길이 귀를 바짝 세우며 물었다.

“분조 때 관서지방에서 병사 모집할 때 만났지요. 궁에서도 만났고요. 그는 균형외교라는 것을 압니다.”

“균형외교?”

“그렇소. 그건 무기만 없다 뿐이지 전쟁이나 똑같소. 보다시피 우리는 위로는 후금, 명나라, 몽고와 연결되고, 아래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왜국과 마주하고 있소. 우리는 늘 2,3국과 상대하는 나라였고, 상대할 때마다 우리가 개피 보았소.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서로 상대가 없으면 안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오. 외교란 이익과 손해에 따라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고, 반대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것이오. 그렇다고 우정이 없는 것이 아니오. 우정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지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받을 건 확실하게 받고, 줄 것은 확실하게 주는 것이오. 그러니 서로에게 이익이 되어야겠지요. 그것이 현실적인 외교론이오.”

“우리 처지가 묘합니다. 서로 얕잡아보고, 기회만 있으면 갈구고 짓밟고 있지 않습니까.”

최명길이 한숨을 쉬며 쌍통을 찌푸렸다.

“그러니 독자적인 힘이 없는 외교는 외교가 아닌 것이요. 그것이야말로 허망한 일이지요. 상대방을 이용할지, 아니면 끌려다닐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외교의 힘입니다. 힘도 없으면서 자주노선이라고 강하게 나가는 것은 어느새 밟히기 쉽고, 무언가를 주고 은전을 바라는 태도는 비굴한 사대주의가 되지요. 힘이 바탕이 되지 않는 외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때 건주여진의 김말대가 숨을 헐떡이며 주막으로 찾아왔다.

“정 첨사 나리, 야인여진의 오탕개 무리가 다이샨 패륵을 체포해갔소. 빨리 구해야 합니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