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84.백제고찰 보성 대원사와 티벳박물관

천년 백제고찰 대원사에서 생과 삶을 생각하다

아도화상 창건·慈眞 중창한 천년 고찰
두 차례 火魔, 현장스님 佛事로 큰 절

93년 지장보살 봉안, 태아령 극락천도
붉은 모자쓴 동자상은 아픈 영혼 상징

티벳 불교 교감할 수 있는 박물관 위치
‘지혜로운 죽음맞이’ 산사수련도 인상적

아름다운 연못과 연지문 큰 목탁 눈길
벚꽃 길 오가며 힐링 만끽할 수 있어

대원사 연못과 범종. 왼쪽에 연지문이 있다.

전남 보성에 있는 대원사(大原寺)를 찾은 날은 대원사 벚꽃축제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날씨는 스산했다. 바람은 차가웠다. 하늘 역시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후 가끔 햇님이 구름에서 얼굴을 내밀 때는 겉옷을 입지 않아도 될 만큼 포근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추운 날씨였다. 찬바람과 비가 잦은 ‘잔인한 4월’인데 대원사 벚꽃들은 무탈할까? 그런 염려가 있었다.

그날, 대원사 가는 길에는 꽃눈이 쌓여있었다. 하루 전 내린 비에 몸무게가 무거워진 꽃잎들이 그리 된 모양이었다. 길 위를 하얗게 덮은 꽃잎에 눈이 부셨다. 그런데 그 꽃잎 위로 다시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 꽃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아픈 것은 그 꽃눈, 꽃비가 된 벚꽃 잎들이 미처 활짝 피워보지도 못하고 스러진 것들이라는 점이었다.

대원사 가는 길은 적요한 길이다. 벚꽃 때문에 4월이면 화사한 모습이나 그때를 제외하고는 조용하다. 주암호와 맞닿아 있는 입구에서 대원사까지 6㎞가 넘는 길은 고즈넉하다. 최근 들어 큰 절로 변한 대원사와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티벳박물관 때문에 쉽게 차량들을 볼 수 있지만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수십 굽이 길을 돌아가는 동안에도 지나가는 차 한 대 보기가 힘들었다.

대원사의 동자승. 대원사는 태아령 천도 사찰로 유명하다.

대원사는 벚꽃 길과 티벳박물관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그러나 이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경우다. 대원사는 불력(佛力)이 깊은 천년고찰이다. 백제 무녕왕 3년인 서기 503년, 아도화상에 의해 산문이 열린 곳이다. 이후 1천500여년의 세월동안 석가의 가르침을 깨우치고 실천하는 도량이 돼 왔다. 고려 원종 때의 원오국사 부도와 영조 때 세워진 극락전이 대원사의 오랜 역사를 묵묵히 전하고 있다.

최근 들어 대원사는 다소 특화된 사찰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 사람이 돼 버린 낙태아들의 영령(태아령)을 천도하고 그 부모들이 참회하며 공덕을 쌓는 사찰의 역할을 중(重)하게 하고 있다. 태아령 천도사찰(胎兒靈 遷度寺刹)로 유명하다. 또한 불교왕국 티벳의 영적인 지혜와 예술세계, 죽음관 등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티벳 불교와 대면할 수 있는 색다른 장소다.

대원사에는 태아령 천도를 주관하는 지장보살과 어린 영혼들을 상징하는 붉은 모자차림의 동자상들이 즐비하다. 입구의 층층계단 위에 자리한 티벳박물관과 15m높이의 티벳식 불탑 수미광명탑은 그 이국적인 모습 때문에 방문객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한국 땅 그것도 한국불교의 요람이랄 수 있는 남도 땅에서, 티벳불교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생경스러우면서도 신기하다.

무상스님. 힐링음악을 안겨주고 있다. 부드럽고 맑고 음성은 듣는 이들이 평안을 느끼게 한다.

대원사 주차장 한 켠에서 무상스님이 부르는 힐링 음악은 대원사가 안겨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무상스님이 부르는 노래 말은 대부분 사랑·이별과 관련된 기쁨과 슬픔에 대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감정은 한낱 스쳐가는 바람일 뿐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무상스님은 강조하고 있는듯하다. 스님의 평안한 얼굴과 달콤한 목소리에 빠져있다 보면 오후 나절이 금방 지나간다.

■대원사 창건과 중창·중건

대원사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면, 이 절이 품고 역사의 깊이가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원사는 천봉산(天鳳山)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봉황이 노니는 형세의 산자락을 배산(背山)으로 삼고, 앞쪽 넓은 주암호수를 임수(臨水)로 하고 있으니 최고의 길지를 지닌 산사(山寺)다. 천봉산은 높은 산(611m)은 아니나, 주위에 이렇다 할 큰 산이 없어 맏형 노릇을 하고 있는 산이다. 도로변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어 번잡한 속세와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한 사찰이 들어서기에는 적합한 곳이다.

대원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아도화상의 법명은 아도(我道)·아두(阿頭)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아도본비(我道本碑)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인 어머니 고도령(高道寧)과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던 조위인(曹魏人) 아굴마(我堀摩) 사이에서 태어났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서축(西竺:인도)사람이라고도 하고, 오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도 적혀있다. 아도화상은 5세 때 어머니의 뜻에 따라 절로 보내졌다.

16세에 위나라로 가서 아굴마를 만나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강석(講席)에서 공부한 뒤 19세에 귀국했다. 대원사는 통일신라 때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1260년(원종 1)송광사 제5대국사인 자진(慈眞)이 크게 중창했다. 이때 중봉산(中鳳山)이 천봉산으로, 죽원사(竹原寺)가 대원사로 개칭됐다. 그뒤 탁오(卓悟),필한(弼閑), 태연(泰演), 현정(玄淨)스님 등을 통해 중창과 중건, 불상봉안 등이 꾸준히 이뤄졌다.

영조 33년의 (1757)화재로 거의 소실됐으나 복원됐다. 여순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천불전(千佛殿)을 중심으로 해 수많은 당우와 상원암(上院庵)·호적암(虎蹟庵) 등의 부속암자가 있었다. 그러나 여순사건 때 극락전과 요사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에 타 버렸다. 1990년대 이후 현재의 주지스님인 현장(玄藏)이 선원·자인당·일주문·요사 등을 지었다. 1993년에는 태아(胎兒) 영가천도를 위해 태안(胎安)지장보살과 6지장보살 및 108 동자상을 봉안했다. 1996년에는 성모(聖母)산신을 모신 산신각인 만덕전을 지었다.

■대원사 천도기도

헌법재판소가 2019년 4월 11일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전면 금지하고, 위반한 경우 처벌하도록 한 형법 규정은 위헌’이란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는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형사 처벌하도록 한 형법 규정은 임신부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다만 낙태죄를 곧바로 폐지하면 사회적 혼란이 발생할 수 있으니 2020년 말까지 법 조항을 개정하라고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이 같은 결정을 하면서 임신 초기에는 여성이 스스로 낙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낙태결정권이 존중되는 시기는 임신 22주까지이다. 이에 따라 개정법도 임신 후 일정 기간에 한해 낙태를 허용하는 쪽으로 바뀔 전망이다. 낙태허용 기한과 범위는 향후 상당한 논의를 거쳐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임신초기 낙태가 죄가 되지 않음에 따라 낙태가 상당히 자유로워질 것은 분명하다.

지장보살과 동자상.

지금까지 대원사는 낙태된 어린 영령(태아령)들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낙태아 지장기도 도량’으로 큰 역할을 해왔다. 임신 22주를 전후로 한 낙태가 허용됨에 따라 대원사의 ‘태아령 천도’ 역시 보다 공개적으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낙태에 대한 죄책감으로 시달리는 부모들의 발걸음도 이어질 전망이다. 죽음으로 몰린 어린 영령과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생명을 버린 부모, 모두들 위한 천도와 기도가 대원사에서 더 많이 벌어질 것이다.

대원사 극락전 옆 안내판에는 대원사가 태아령들의 천도에 주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안내문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태어나지도 못하고 낙태로 생명을 빼앗긴 어린 영혼들은 이승과 저승 경계의 강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며 탑을 쌓는다고 한다. 이 탑이 완성될 쯤에 저승의 사자가 나타나 탑을 무너뜨린다. 어린 영혼들은 탑이 무너져 내린 강가에 쓰러져 서럽게 운다. 그때 지장보살님이 눈물을 흘리며 나타나 어린 영혼을 품에 안는다. 그리고 오늘부터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라 하면서 강을 건네준다.’

대원사 주지인 현장스님은 위의 안내문이 불교설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현장스님은 지난 1991년부터 대원사에 낙태아들을 천도하기 위한 지장보살을 세우는 불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1993년에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천도를 위한 백일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지장보살이 세워진 곳은 예전에 지장전이 있던 곳이다. 천봉산 산세로 보면 여성의 자궁에 해당되는 자리에 지장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빨간모자의 동자상.

대원사는 지장보살이 본존으로 모셔져 있는 절이다. 동자상의 지장보살 108분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아이를 먼저 보낸 부모들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뒤늦게 후회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통한이 깊어서일까? 이곳 지장보살은 어린 영혼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잘 위로하고 속죄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상처를 잘 치유해주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으로 대원사 지장보살과 빨간 모자를 쓴 동자상들은 이곳을 찾는 불교신자나 일반인들에게 생명의 귀중함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부모의 낙태결정으로 구천을 떠도는 어린 영령들의 안타까운 처지와 생명을 앗은 부모의 업보를 널리 알림으로써 ‘잘못된 결정’을 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원사의 ‘태아령 천도 서원’이 널리 알려지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생명의 가치와 보호의 중요성이 그만큼 널리 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 대원사 문화재들

대원사 극락전의 백의관음도.

백제고찰 대원사 당우는 영조 33년(1757)에 발생한 화재로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후 복원됐으나 1948년 여순사건 때 다시 잿더미가 돼버렸다. 극락전만 화마를 피하고 살아남았다. 극락전은 불교의 이상향인 서방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극락전 서쪽 벽에는 흰옷을 입은 관음보살과 선재동사가 함께 있는 관음보살벽화가 있다. 동쪽 벽에는 달마대사와 혜가단비의 고사를 표현한 달마대사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물 1861호로 지정돼 있다. 영조 때인 1766~1767년 작품이라 추정된다.

대원사 극락전 달마대사도.

실은 이 극락전을 살려준 것이 백의관음도와 달마대사도이다. 오랜 세월동안 관리되지 않아 극락전이 붕괴위험에 처해있었는데 백의관음도와 달마대사도의 가치 때문에 극락전 개수결정이 이뤄졌다. 그래서 대원사 극락전은 내부에서 꼼꼼히 살펴보면 오래된 목재와 개수 때 새로 사용한 목재들의 뒤섞여 있다. 영조 때 세워진 극락전 기둥은 암갈색을 띠고 있다. 고색창연이다. 나뭇결에는 200년이 넘는 세월의 풍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단청 역시 마찬가지다. 오래된 나무들에 칠해져 있는 단청들은 색이 바린 탓에 그 선과 짙음이 희미하다. 하지만 최근 채워 넣어진 기둥과 천정나무들에 칠해진 단청의 색은 진하고 현란하다. 오랜 세월을 이겨낸 기둥과 단청, 그리고 새로 넣어진 기둥과 색색의 짙은 단청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파손된 범종을 붙여둔 모습.

대원사 범종은 2개가 있다. 하나는 대원사 법당에 걸려 있던 종이다. 1974년 대원사 주지가 어떤 고물상주인에게 2만원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사정이 어려워 갚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고물상 주인이 대원사 법당에 걸려있는 종을 끌어내 쇠톱으로 조각을 내 고물로 가져가 버렸다. 이 깨진 범종 조각들은 후에 도난당한 송광사 탱화를 찾는 과정에서 송광사 건물 밑에서 발견됐다. 대원사 측에서 파종 조각들을 찾아와 용접을 해 대략적인 모습으로 맞춰냈다. 현재 대원사 티벳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선암사 수장고왜 보관돼 있는 보성 대원사 범종.

선암사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다른 범종은 1657년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최고의 범종 제작 장인인 김용암이 만든 것이다. 이 범종에는 ‘천봉산 대원사 부도암 2백근 순치 14년 정유 5월 주조장 김용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지난 2008년 보물 제 1561호로 지정됐다.

현장스님은 ‘대원사 범종이야기’를 통해 대원사 범종을 ‘전체적인 비례가 아름답고 하나하나 조각이 섬세해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명품 범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원사 범종은 두 마리 용이 각기 한발을 들어 여의주를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다. 범종의 상반에는 연화문과 범자문이 둘러져 있어 생동감과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하단에는 연화당초문과 9개의 유두를 감싼 유곽·범천상과 보살상 조각, 왕실의 안녕을 비는 발원 위패가 양각돼 있다.

■대원사자진국사부도(大原寺慈眞國師浮屠)

현장스님이 자진국사부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원사에 있는 부도는 고려 때 송광사 제5세 국사를 지낸 자진국사의 사리탑이다. 자진국사는 1286년(충렬왕 12년)에 입적했다. 따라서 이 부도는 고려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체 높이가 236㎝, 비신 높이 260㎝, 너비 142㎝이다.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돼 있다. 부도의 기단부는 하대와 상대로 구분돼 있는데, 하대에는 16엽의 복련(伏蓮)이, 상대에는 하대와 대칭되게 앙련이 시문돼 있다.

탑신의 앞면에는 ‘慈眞圓悟國師淨照之塔’(자진원오국사정조지탑’이라는 명문이 음각돼 있다. 뒷면에는 3자의 범자(梵字)가 양각돼 있다. 각 면의 모서리에는 우주(隅柱 :모서리기둥)가 새겨져 있으며 명문이 없는 6면에는 신장상(神將像)들이 양각돼 있다. 대원사 부도의 형식은 송광사 경내에 있는 2세 진각국사(眞覺國師), 3세 청진국사(淸眞國師), 8세 원감국사(圓鑑國師)의 부도와 거의 동일하다.

대원사 부도는 당시 고려와 원나라의 정치적 관계를 비롯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를 헤아려볼 수 있는 역사적 유물이다. 대원사부도에는 중앙아시아 원제국과 고려 간에 벌어졌던 정치·문화교류의 도도한 흐름이 담겨 있다. 자진국사가 활동했던 당시의 고려왕은 충렬왕(忠烈王)이었다. 충렬왕은 고려 제25대 국왕으로 1274~ 1298년에 재위했고 아들 충선왕 다음으로 1299~1308년에 복위했다.

충렬왕은 원종의 맏아들로 1260년(원종 1년) 태자로 책봉됐다. 1272년 원나라로 볼모로 갔으며 1274년(원종 15년) 음력 5월 쿠발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해 원나라의 부마가 됐다. 혼인한 그해 원종이 죽자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의 요구로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도 했다. 1290년 내안의 잔여세력인 합단이 쳐들어오자 강화로 천도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충렬왕은 재위 시 모두 11차례에 걸쳐 원나라를 왕래하면서 나름대로 고려왕실의 위상을 정립하면서 여원관계 회복에 힘썼다. 대몽항쟁 중 원나라로 편입된 고려 영토를 회복하는 등 성과를 올렸다. 그런 만큼 전체적으로는 원나라에 의존하면서 왕의 자리를 지켰다. 이와 비례해 고려에 대한 원의 정치력 영향력과 북방불교의 고려불교에 대한 영향력도 그만큼 커졌다. 대원사 부도에서는 원의 지배를 받던 고려왕조의 체재와 군사적 지배, 고려불교의 위상들을 헤아려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16국사는 보조 지눌을 비롯해 수선사(修禪社)의 사주(社主)로서 국사 칭호를 받았던 15인과 조선 초기에 송광사를 중창했던 고봉(高峰)을 일컫는다. 송광사가 16국사를 배출함으로써 이 도량은 우리나라 삼보 사찰 중의 하나인 ‘승보사찰’로 불러지고 있다. 송광사 국사전에 16국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조계산 수선사 16국사 중 제5세인 원오국사 천영(天英, 1215-1286)의 속세 성은 양씨(梁氏)다. 전북남원 출신이다. 천영은 1230년 15세에 수선사 제2세인 진각국사 혜심에게 득도했다. 수선사 제3세인 청진국사의 교화를 받고 제4세인 진명국사 혼원을 스승으로 삼았다. 이후 천영은 단속사에 머물면서 1249년 최우가 창건한 창복사(昌福寺)의 주맹(主盟)이 됐다.

1256년 41세에 천영은 조계산 수선사의 제5세가 돼 입적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선풍(禪風)을 널리 떨쳤다. 천영이 송광사에 주석하는 동안 고려 왕실의 왕은 고종과 원종, 충렬왕 등으로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나 왕들의 천영에 대한 신뢰와 귀의는 변함이 없었다. 천영은 학문이 깊었으며 자애로운 성품이었다.

71세에 입적하자 충렬왕은 그에게 자진원오(慈眞圓悟)라는 시호와 정조(靜照)라는 탑호를 내렸다. 천영의 제자들은 굉묵(宏默), 충지(녑止), 명우(明友), 굉소(宏紹), 신화(神化), 만항(萬恒) 등으로, 후대에 큰 스님들이 됐다. 천영의 뒤를 이은 조계산의 제6세 충지, 제7세 일인, 제8세 정열, 제10세 만항, 제11세 자원, 제13세 복구가 모두 천영의 제자이다.

■티벳박물관

티벳박물관

대원사는 티벳불교와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티벳박물관은 티벳의 정신문화와 예술세계를 소개하고 한국 불교와 영적인 교류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난 2001년에 설립됐다. 대원사 주지 현장스님이 인도 여행 중 티베트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됐다. 현장스님이 20여 년 동안 모은 1천점이 넘는 티벳 미술품이 이곳에 상설 전시돼 있다.

대원사 초입에 들어서면 언덕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을 볼 수 있는데, 이 건물이 티벳박물관이다. 티벳박물관은 티벳사원 양식으로 건축된 지상 2층, 지하 1층의 건물이다. 박물관에는 달라이 라마실이 마련돼 있으며 티벳 불교회화인 탕카, 티벳사람들의 생필품인 티포트, 석가모니 직계 후손인 석가족 장인이 만든 불상, 티벳 불교의 정수인 만다라 등을 볼 수 있다.

대원사 티벳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티포트

티포트는 티벳을 비롯 부탄과 네팔에서 제작된 아름다운 차 도구를 말한다. 히말라야 불교문화권의 티포트들은 아름다운 조각과 문양을 지녔다. 한·중·일의 차 도구와는 전혀 다른 기형과 기품을 지니고 있다. 현장 스님이 티벳을 방문할 때마다 몇점 씩 구입한 티포트들이 전시돼 있다. 30점이 넘는다.

만다라(曼茶<陀>羅, mandala)는 부처가 도달한 해탈의 경지와 우주의 삼라만상을 도형화한 것이다. 밀교(密敎)에서 발달한 상징형식(그림)이다. 부처와 보살을 배치한 불화(佛畵)로 깨달음을 의미한다. ‘만다라’라는 개념은 소설가 김성동이 1978년 장편소설 ‘만다라’를 출간하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소설은 지난 1981년 전무송, 안성기, 방희 등의 배우가 출연한 영화 ‘만다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티벳박물관에서는 <신과 함께 저승 여행〉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불교의 사후 세계를 극적으로 표현한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에 나오는 7대 지옥과 불교의 10대 지옥이 비교·전시되고 있다. 망자의 시신을 독수리 먹이로 내주는 티베트 장례 문화를 담은 사진은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영정 사진을 찍고 유언장을 작성한 뒤 관에 들어가 죽음을 체험하는 죽음 체험실은 섬뜩하지만 자신의 삶을 성찰할 기회를 준다.

박물관 앞에는 15m 높이의 티벳식 불탑 ‘수미광명탑’이 세워져 있다. 박물관 개관을 축하하는 달라이 라마의 메시지와 티베트와 네팔에서 보내온 부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수미광명탑이 세워졌다. 또 탑 내부에는 티베트 왕궁 화가가 그린 벽화와 만다라가, 외부에는 네팔에서 제작된 마니보륜 108개가 모셔져 있다. 불교 경전이 들어 있는 마니보륜을 돌리면서 탑을 한 바퀴 돌면 소망이 이뤄진다고 한다.

수미광명탑의 꼭대기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오색 깃발이 시선을 끈다. ‘타르초’다. 타르초는 파랑·노랑·빨강·하양·초록 깃발에 불경 구절을 깨알같이 적어 끈으로 이은 것이다. 다섯 가지 색깔은 세상을 이루는 5원소(하늘, 땅, 불, 구름, 바다)를 상징한다. 불경구절이 실린 오색깃발을 바람에 날리도록 높이 매단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퍼지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대원사와 현장스님

대원사는 볼거리도 많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도 많은 절이다. 일주문과 사천왕루, 구품교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연지문을 마주하게 된다. 연지문에는 통로 가운데 큰 목탁이 걸려 있다. 머리로 치고 가는 목탁이다. 두 손으로 목탁을 잡고 이마로 세 번 치면서 “나쁜 기억 사라져라, 나의 지혜 밝아져라, 나의 원수 잘 되거라”를 염원한다.

대원사 경내에는 연못이 7개 있다. 우리 몸에는 7개의 연꽃이 피어나는 에너지 센터(챠크라)가 있다고 한다. 대원사의 7개 연꽃은 우리 몸의 7개 챠크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구품교 아래 연못은 대원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여름이면 활짝 핀 연꽃과 각종 수생식물로 생태 공원을 방불케 한다. 구품교 아래 연못에서는 방생행사가 벌어지곤 한다.

대원사에는 시선을 끄는 여러 전각이 있다. 중국에서 존경 받는 신라 출신 지장스님을 기리는 김지장전, 황희정승영각, 아도영각, 죽음체험관(수관정), 템플스테이를 위한 선방 등이 있다. 대원사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수련주제로 한 1박2일 출가생활·산사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현장스님은 1975년 송광사에서 구산(九山)스님을 은사로 해 출가했다. 혜인사 강원을 졸업했다. 1987년 티벳불교를 순례하고 곡성 태안사에서 정진했다. 1991년 대원사 주지로 부임한 뒤 태아령들을 천도하고 그 부모들을 위무하는데 정성을 쏟고 있다. 티벳불교의 정신과 문화를 전하면서 양국 불교의 발전을 이루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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