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 꽃과 나무 안녕하신가?
김홍식(광주 일동중학교 교장·문학박사)

이른 봄에 만나는 꽃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마른 낙엽 사이에서 보란 듯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화순 만연산 양지 바른 쪽 복수초꽃이 그렇고, 무돌길을 안고 있는 등촌 마을 돌담장 사이의 영춘화가 그렇다. 보는 사람 모두 대단한 뭔가를 발견한 듯이 감탄의 소리를 쏟아낸다. 어디 그뿐인가. 홍매화가 비엔날레 옆 동산에서 찬바람 맞으며 꽃망울을 키워가노라면 개화를 재촉하며 뜸했던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진다. 겨우내 꽃에 굶주린 이유만은 아닐 터. 고불매와 계당매, 화엄매를 찾아 먼 길 마다않고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 나선 걸 보면 초봄에 피는 꽃을 만나는 환희와 반가움이 그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닌가 보다.

이렇게 여기저기서 봄꽃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시샘하듯 꽃샘추위가 다가오고 세찬 바람까지 한몫 거든다. 늦잠 자는 아이들 방문을 열어 젖히면 이른 아침 찬 공기에 놀라 벌떡 잠을 깨고 일어나듯이 어서 일어나 계절을 맞이하라고 일깨우는 것처럼 말이다. 허나 예기치 못한 추위와 바람 속에서 갓 피어난 꽃잎이 시달리고 개아(開芽)를 위한 수액 이동의 위축, 이미 나온 새순의 고사(枯死) 등으로 꽃과 나무들이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임은 자명하다. 부디 잘 이겨내서 무성한 잎과 열매로 만날 수 있기를 ‘봄부터 울어대는 소쩍새’의 심정으로 찬바람 맞고 있는 꽃과 나무 앞에 옷깃 여미고 마주선다.

사람의 경우라고 다르겠는가.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겪는 크고 작은 시련도 예고 없이 찾아오고, 그럴 때마다 남모르는 아픔과 고통으로 속앓이를 한다. 이럴 때야말로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의 남다른 관심과 정성스러운 손길이 절실하다. 그래서 학교 안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 학교 밖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한겨울에 한 사람이 얼어 죽어도 모두의 책임’이라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학교에 적응 못하고서 스스로 배움의 길을 박차고 나간 아이들이라 낙인찍어 비난하고 탓하기에 목소리만 높이지 않았는지. 아이들이 왜 학교를 거부하는지, 이 아이들, 아니 수요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교육서비스를 못 다한 어른들의 책임은 무엇인지, 그 많은 전문가와 교육프로그램도 이 아이들을 온전히 껴안을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빈약한 교육력인지 자문과 자책이 앞선다. 최소한 이 아이들에게만큼은 한마디로 ‘교육이 되는 교육’을 하지 못했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엄연한 현실 앞에서 구차하게 어떤 말을 덧붙이랴. 겸허하고 차분하게 근본부터 살펴야 할 일이다.

논어에 ‘유교무류(有敎無類)라는 말이 있다. 흔히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약간 생각을 바꾸어 “그 어떤 아이도 교육 못할 만큼 어려운 아이는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어떨까?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좋은 방법과 지혜만 있다면 그 어떤 아이도 교육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우리 광주교육에서 주창하는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도 같은 맥락이다. 현재도 광주에서만 학교 안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천 명이 훨씬 넘게 학교 밖을 전전하고 있다. 이들을 제대로 끌어안을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학교 안에서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학교 밖에서라도 이들이 원하는 교육 서비스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과 내용으로 채워줘야만 한다. 이는 단순하게 몇 푼의 금전적 지원이나 제한적인 혜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책무요 의무라는 차원에서 나서야 한다. 의무는 변명이 아닌 철저한 이행만이 있을 뿐이다.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찾고 있는지, 이들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공감할 수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너희들의 탓’이 아닌 ‘우리들의 탓’이라는 생각으로 이들에게 다가서야 한다.

제아무리 예쁜 봄꽃들이 지천으로 넘쳐나도 외면하며 찾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들이 꽃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한다. 학교가 이들이 만나고 싶은 꽃이 될 수 없다면 찾아 나설 마음이 생기게 하는 꽃도 그 어딘가에는 마련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교사를 꿈꾸던 청년 시절에 E. 라이머의 ‘학교는 죽었다’를 읽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그 충격은 지금까지도 늘 학교의 존재 부정과 교육의 무용론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 속에서 줄곧 교육 현장을 지켜왔다. 학교가 죽으면 우리의 미래도 없다. 더 늦기 전에, 더 후회하기 전에 찾고 싶은 학교교육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꽃샘추위 앞에 정면으로 마주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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