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광해시대 1장 역사 청산 <320>

게르 안에는 비적(匪賊) 잔당과 그 똘마니들이 웅성거리며 쭈구려 앉아있었다. 주장(主將)이 사라지자 기세가 지리멸렬해 있었는데, 두목이 꽁꽁 묶인 몸으로 들어오자 어리둥절한 표정들을 지었다. 정충신이 그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너희놈들, 기둥에 묶인 자를 당장 풀어라! 풀지 않으면 너희 두목 목이 달아날 것이다. 너희들 또한 목이 달아날 것이다! 당장 풀어라!”

그러자 정충신의 군사들에게 허리춤이 잡혀 끌려온 그들의 두목이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나와 저 묶인 자와 목숨을 바꾸기로 했다. 풀어줘라!”

그의 부하들이 뭐라고 투덜대다가 묶인 다이샨을 풀어주었다. 자유의 몸이 된 다이샨이 자신의 옷을 손으로 턴 다음 정충신에게 다가왔다.

“내 저 놈들을 당장 목을 베겠다!”

그러면서 정충신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그것이 아니오, 다이샨 패륵. 나는 이 자와 약속을 하였소. 다이샨 패륵을 구하는 대가로 이 자를 풀어주기로 한 것인즉, 약속을 지켜야 하오이다.”

정충신이 다이샨으로부터 칼을 거두어 자기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비적의 두목 포승줄을 스스럼없이 풀어주었다.

“자,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화해하는 뜻으로 두 사람 악수하시오.”

다이샨이 주춤하더니 손을 내밀자 산적 두목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이제 두 사람은 대장과 부장이 된 것이오. 두목은 다이샨의 부장으로서 충성을 다하기로 나와 약속을 했소. 다이샨 패륵, 받아들일 수 있소?”

“그것은 월권이오. 남의 나라 군사 인사권까지 개입하는 것은 가당치 않지.”

“미안하지만 내 그렇게 약속했소. 너그럽게 보아주시오. 나는 다이샨 패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도와드릴 마음이오.”

그의 간절한 뜻을 헤아렸던지 다이샨이 머리를 끄덕였다. 정충신이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내 친구로서 이 점만은 분명히 하고 싶소. 건주여진이든 야인여진이든 다같은 종족이오. 서로 다툴 필요는 없소. 갈갈이 찢어진 부족을 아우르고 결속을 다지는 것은 다이샨 패륵의 지도력을 높이는 일일지언정 비판받을 소지가 없소이다. 이미 누르하치 대장군이 여진을 통일해 후금을 세웠는 바, 모두들 거기에 복속해 충성을 해야 할 것이오. 그래서 소소한 작은 차이를 넘어, 작은 갈등을 넘어 더 높은 것을 향해 진군하는 것을 친구로서 진정 바라고 있소.”

“고맙소.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제서야 다이샨은 정충신이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니 사실 지휘자는 자기 소속의 하찮은 부하에게 암살당한 경우도 있고, 맹수를 업수이 다루다가 다리를 물려 병신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지휘자일수록 조신하고 엄숙하고 자애로워야 한다. 정충신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두목은 앞으로 나를 따르도록 하라.”

다이샨이 산적 두목에게 일렀다.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우리 부족을 수습한 뒤 달포 쯤 후에 진영으로 찾아가겠나이다.”

그들은 산적 두목을 뒤에 남기고 두만강 변경으로 말을 몰았다. 그곳에서 정충신은 다이샨과 마주섰다.

“우리도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같습니다.”

정충신이 말하자 다이샨이 정충신의 손을 굳게 잡았다.

“여기서 헤어지지만 언젠가 우리 다시 필연코 만날 것이오. 고맙소. 앞으로 더 큰 우정으로 만나기를 바라오. 정충신 군관의 구출작전으로 생환한 것을 아버지께 보고할 것이오. 조선과 우리는 언제나 친선과 우의, 힘을 함께 쓰기로 약속하오.”

이 말을 남기고 다이샨은 환련-관먼 방향으로 말을 달렸다.

정충신이 보을하진으로 돌아오니 전령이 달려왔다.

“정첨사 나리, 급히 장만 감사께 가셔야 합니다. 사위 최명길도 찾고 있습니다.”

“알았다. 모두들 주어진 자리에서 경비에 충실토록 하라.”

그는 최명길과 함께 장만 관찰사가 묵고 있는 함경도 감영(監營)으로 달려갔다. 선화당 동헌에 이르러 정충신이 아뢰었다.

“보을하진 첨사 정충신 대령하였나이다.”

정청(政廳)에 앉아있던 장만이 달려나오듯 동헌으로 나서더니 소리쳤다.

“네 이놈! 니 멋대로 근무지를 이탈하느냐? 당장 옥에 가두라!”

장만은 화가 잔뜩 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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