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광해시대 1장 역사 청산 <321>

“장인 어른, 그것이 아니옵고, 사실은 정충신 첨사가...”

최명길이 대신 나서서 자초지종을 말하려는데 장만 감사가 말을 가로막았다.

“너는 장인한테 인사하허 왔다면 쏴돌아다니지 말고, 감영에 있어야 하거늘 정첨사한테 가서 마냥 사냥놀이나 하고 있었단 말이냐?”

숲속에서 야인여진 산적들을 쫓고, 멧돼지와 사슴을 굽는 것들을 단속한 것을 누군가 잘못 전달한 모양이었다. 최명길이 주장했다.

“그것은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정충신 첨사는 근무지에서 철통같이 국경을 수비하고, 주민을 괴롭히는 야인여진 잔당들을 격퇴하고, 그리고 산적들에게 붙잡힌 건주여진의 다이샨 패륵을 구해왔습니다.”

“다이샨을 구했다고?”

“그렇습니다. 산적들에게 생포되어 죽을 뻔했습니다.”

“거 봐라. 천하를 호령하는 맹장도 산골에서 비르적거리는 비적 부스러기에게 잡혀서 망신당하고 있지 않느냐. 아무리 용맹한 호랑이도 고양이에게 코털이 뽑힐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무릇 지도자는 경망 떨지 말고 무게있게 처신해야 한다. 여진은 좋은 부족이든 나쁜 부족이든 우리에겐 적이다. 지금도 그자들 습격을 받아 재산을 털리고, 병졸이 죽었다.”

“그래서 누르하치와 선린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무래기 비적들이 도적질을 일삼는데, 그것들을 큰 부족이 잡아 다스리면 우리는 그 큰 부족장과 협상하여 국토를 보전하는 것입니다. 잔 것들을 하나하나 상대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누르하치가 그들을 제압해 천하통일할 적시면 그와 관계를 돈독히 하면 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다이샨을 구해낸 것입니다. 그 아들 다이샨과 형제결의를 하는 것은 우리 국경선을 보호하는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장만이 그럴 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알겠다. 하긴 정 첨사를 오해한 적은 없다. 칼을 들고 나가면 반드시 전과를 올리고 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출동 계획을 본진에 알리고, 나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것이 위계질서상 합당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이용하라는 것이 봉수대다. 그런 신호체계가 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 점 충분히 가리지 못한 것 죄송합니다.”

그제서야 정충신이 허리를 구부리고 예를 취했다.

“내가 정 첨사를 특별히 찾았던 것은 이유가 있다. 지금 경상좌수영의 포이포 만호로 발령이 났다. 왜의 공격이 여전히 심상치 않고, 바다만 지킬 것이 아니라 육전(陸戰)에 대비해야 한다고 해서 병조에서 특명을 내렸다. 정 첨사는 선사포 첨사 재임 중에도 가도 바다를 지키며 공을 세웠으니 육전·수전 모두 능하다고 해서 포이포를 맡기는 것이다. 곧바로 출발하라. 최명길도 함께 길을 떠나거라.”

정충신이 포이포 만호로 발령을 받은 것이 삼십대 후반이었다. 전속 명령을 받고 정충신은 모처럼 살만하다고 생각했다. 한 겨울이면 수백년 묵은 소나무가 쩍쩍 갈라지는 맹추위와 눈이 왔다고 하면 키 이상씩 내려서 몇날 며칠 발이 묶이는 혹독한 함경도 산악지대에서 십수년을 복무했으니 지칠만도 했다. 겨울을 날 때마다 동상에 걸리기 일쑤고, 얼굴이 얼어서 버짐피듯 쌍판대기가 늘 얼룩소처럼 묘하게 얼룩졌다. 지붕까지 쌓이는 눈에 갇혀서 며칠씩 야숙(野宿)한 것도 부지기수다.

그가 변경에서만 복무했던 것도 사실은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나라의 최북단 변경에서 부하들을 통솔할 때, 병사들이 한결같이 노비 출신이거나 빈한한 농어촌 출신들이라는 것에 화가 났다. 명문 세족의 자제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노비 출신들의 억울한 입장을 간언하고, 사족층의 군역 기피의 부당성을 항변했다. 불의를 묵과하지 않는 태도와 할 말을 하는 것이 결국은 그의 탄탄대로를 가로막았다.

게다가 정충신 역시 반반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 인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대신들의 파벌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철저한 무당파였다. 바로 스승 이항복의 길이기도 했다. 그러자 분란이 나거나 반란의 기운이 돌면 조정은 그를 입에 올렸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괄의 난 때는 물론 유몽인, 박홍구, 유효립난 때도 역적들을 문초하면 단골로 거론되는 이름이 인성군(인조 숙부)과 이괄, 기자헌, 그리고 정충신이었다. 그에게는 파벌이 없으니 누가 갖다 대어도 무방했고, 그는 또 누구나 걸고 넘어지기 쉬운 바른 말을 하는 주인공이었다. 그런 그를 장만이 이윽히 바라보며 안쓰러운 생각을 했다. 그곳에 가도 넌 고생길이 환히 열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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