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민주주의, 대안인가 위험인가
박상훈(정치발전소 학교장·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20세기 전반기, 그러니까 1-2차 세계대전 사이까지만 해도 민주주의가 아닌 방법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았던 적이 있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대표적이다. ‘인민’과 ‘민족’의 의지를 앞세웠던 이들 좌-우 전체주의가 득세할 동안, 당시 10여 개에 불과했던 민주주의 국가들은 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뒤늦은 근대화를 먼저 달성하자는 권위주의 체제가 오랫동안 위세를 떨쳤다. 그런 점에서 120개 안팎의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는 대세인 듯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민주주의의 종말을 걱정하는 주장이 서구 지성계를 때렸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데이비드 런시먼 교수가 쓴 책 “How Democracy Ends”와 미국 하버드 대학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가 함께 쓴 책 ‘How Democracies Die’가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한 권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박세연 옮김, 출판사 어크로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두 책 모두 지난해 영어로 출간되었는데, 선발 민주주의 국가를 대표하는 영국과 미국에서 민주주의의 붕괴를 우려하는 책이 나온 것이다. 흥미로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기 영국과 미국에서는 의회나 정당 대신 국민이 직접 결정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한쪽에서는 EU 탈퇴(브렉시트) 국민투표를 했다. 다른 쪽에서는 위기에 처한 백인 민족(white nation)의 의지를 다시 세우겠다는 도널드 트럼프가 SNS의 위력으로 지지자를 직접 동원해 승리를 거머쥐었다. 체제 전반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의회와 정당은 기능 마비 상태가 되고 공동체는 분열되었으며 견해를 달리하는 시민 집단들 사이의 적대와 증오는 커졌다.

이 두 나라만큼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FN : 국민전선)와 덴마크(DPP : 인민당), 독일(AfD : 독일사회를위한대안) 등에서도 유사한 도전이 있었다. 이들 극우 정치세력 역시 대의 민주주의를 공격하며 직접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앞세웠다. 직접 민주주의가 극우의 전유물인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2002년 독일 녹색당이 직접민주주의강령을 폐지하고 대의 민주주의로 전환한 이후, 적어도 좌파 진영에서 무책임한 직접민주주의 주장은 절제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서구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리는 직접 민주주의론의 도전은 극우 포퓰리즘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떨까? 2015년 10월 어버이연합, 자유총연맹, 재향경우회 등 190여 개 보수 시민 단체가 ‘국회개혁범국민연합’을 결성해 ‘국회의원 국민소환’, ‘국민에 의한 국회해산’ 등 직접민주주의 개혁을 내걸었다. 2016년 1월 18일 ‘민생구하기입법촉구천만인서명운동’에 현직 대통령이 참여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듯 보수 쪽의 직접민주주의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민주주의는 보수보다 진보 쪽에서 더 많이 공명이 된다. 직접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말하는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정치인이나 정당, 의회가 민주주의를 독점하는 것에 반대하는 ‘혁신적 민주주의자’, 혹은 정치로부터 민주주의를 구출해 와서 시민과 사회에 가져다주는 ‘민주주의의 구원자’인 듯 말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자가 이런 자만에 빠지지 않아야 민주주의는 지켜질 수 있고 또 발전할 수 있다.

시민 스스로 모든 것을 직접 할 수 있다는 망상이 아니라, 선출직 공직자를 선발해 공적 결정을 이끌게 하는 것이 시민의 자유를 확대하는 길이라 믿은 것은 민주주의자였다. 정치 엘리트를 통해 정부를 운영하게 했지만, 그들 가운데 어떤 엘리트 집단이 그 과업을 맡을 자격이 있는지를 시민이 결정할 수 있게 함으로써, 시민에게 책임지는 정치의 원리를 확립한 것도 민주주의자였다. 법을 만들고(입법) 집행하고(행정) 적용하는(사법) 기능을 균형 있게 나눠 맡게 했고, 정견을 달리 하는 시민들이 정당을 만들어 다원적으로 경쟁하게 하는 것을 통해 전체주의의 유혹을 차단한 것도 민주주의자였다.

직접민주주의론은 현대 민주주의의 이 모든 제도적 근간을 공격한다. 이러한 제도의 근간이 약해지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대의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오늘날의 여러 정치 현실이 말해준다. 직접 민주주의론으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일은 아니라 대의민주주의를 제대로 잘하는 것이 수백, 수천 배 더 민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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