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2부-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전라도인 디아스포라

(1) 임시정부의 전라도사람들
(2)임시정부 의정원의 전라도 사람들
(3)임시정부의 광복군과 독립군들
(4)임시정부의 ‘비밀금고’ 전라도
(5)백범 김구와 전라도

중국내 독립군들 ‘광복군’ 깃발로 통합…조직적 항일 투쟁
1940년 9월 15일 김구 주석 ‘광복군창설선언문’ 발표
조선의용대·광복진선청년공작대·청년전지공작대 주축

1907년 8월 1일 해산 국방군 후예 자임…국가 정통성 계승
국내 진격 위해 미군과 합동훈련…인도·버마전선도 파견
해방직후 2만명 달해…미군정에 의해 6년 혈한 노력 수포로

한국광복군 제3지대 성립 경축전례 기념사진./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독립기념관

◇해방 후 국군의 주축이 되었다면?

을사늑약 직후부터 독립지사들은 망명국가의 수립과 군대보유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19년 9월 상해임시정부(상해임시대한민국 명칭이 타당,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40년 9월 중경임시정부 시기에 광복군(국군)이 창설되었다. 광복군의 주요 구성원은 기존 독립군이었다. 중국에서는 3로군으로 편성된 동북항일연군(1942년 동북항일연군교도대로 통합), 조선의용대, 광복군이 활동하였다. 만약 해방 후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국내에 진공하여 대한민국의 주역이 되었다면 악질 친일부역자들마저 친위대로 양성하여 민족정기에 오물을 뿌린 이승만이 100년의 후환을 남긴 통한의 역사를 차단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 중국내 독립군들 통합

광복군은 조선의용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주축이 되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장개석은 김구 주석의 요구에 의해 1934년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 군간부 양성을 원조하였고 중앙육군군관학교(8기 나월환, 10기 안춘생 등 졸업, 이전 황포군관학교)에도 한국인의 입학을 허락하여 한인 군간부 양성에 적극 협조하였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은 장개석의 내락을 받고 1938년 10월 무한 한구(韓口)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원 명칭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국민당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통제를 받았다.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10일 광복군에 합류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유주(柳州)임시정부 당시인 1939년 2월 낙양군관학교 출신으로 항일전투 경험이 많은 공진원(고운기)대장을 중심으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창설되었다.

연이어 중국중앙군관학교 출신 나월환이 1939년 11월 중경에서 군관학교출신 12명 등 30여명의 대원들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창설하였으며 1941년 광복군에 통합되었다. 창설요원은 대부분 김구계열이었으며 중국의 항일전 승리가 곧 한국의 독립을 위미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들이 12월 전선인 서안으로 이동할 당시 대원은 100여명이 되었다.

중국 무한에서 창설된 조선의용대./독립기념관

◇ 중국의 광복군 창설 지원

장개석은 1932년 홍구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를 은밀히 지원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항의를 두려워하여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지는 못하였다. 심지어 황포군관학교, 중국중앙군사학교에 입교한 한국청년들은 일본의 항의를 의식하여 졸업장에 중국식 이름을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추축국이 되자 장개석은 1940년 5월 22일 공개적으로 광복군 창설을 승인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을 장개석에게 보내고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임시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창설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임시정부는 9월 17일 중경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입전례식’을 통해 한국광복군이 창설을 세계에 알렸으며 창설 1년 후에는 3개 사단을 편성하려는 목표도 가졌다. 이날 발표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보고서에 의하면 한국광복군은 1907년 8월 1일 국방군의 해산과 동시에 성립되었으며 금년(1940년) 8월이 33주년이 되었다고 선언하여 국가의 정통성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의해서 계승되었음을 선언하였다. 결국 광복군 창설목적은 국내침공과 민족해방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중국군에 예속시키고 광복군에 대한 임시정부의 간여를 배재하는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을 요구하였으며 이들의 보급과 장비로 무장을 해야 하는 임시정부는 이를 마지못해 수용하였다.

한국광복군 2지대 훈련 모습./독립기념관

◇ 국내외 지지 선언 잇따라

국민당의 공개적인 지지를 얻은 광복군 창설식에는 손문의 아들 손과, 풍옥상, 공산진영에서는 주은래 등이 참석하였으며 중경에 주재하고 있던 각국의 사절들과 신문사 대표 등 200여명의 인사들이 참석하여 공식적으로 임시대한민국의 국군창설을 지지하였다. 해외의 지지를 살펴보면 10월 20일 미국 LA 재미한족연합회는 한국광복군창립축하식을 거행하였고 하와이국민회 기관지 ‘국민보’는 광복군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1940년 11월 12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참모 김학규는 중경의 국제방송을 통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적극적인 협조를 호소하였으며 국내의 민중 역시 광복군의 창설을 지지하고 후원하였다.

한국광복군 부대 뱃지./독립기념관

◇ 광복군의 편제와 활동

광복군총사령부는 창설직후 전선인 서안으로 이전하였으며 총사령부와 제1지대는 중경, 제2지대는 서안(西安), 제3지대는 안휘성 부양(阜陽)에 본부를 두었다. 1941년 1월 1일 4개 지대(支隊)와 징모처로 편성, 제1지대장은 이춘식, 제2지대장은 김학규로 안춘생(초대 독립기념관장), 노태준 등이 간부로 활약하였다, 제3지대장은 공진원이었다. 서안에서 활동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1941년 제5지대로 편입되었으며 나월환이 지대장겸 징모5분처 주임위원이 되었다. 또한 광복군은 기관지 ‘光復’을 발행하였으며 중경에 제3징모처를 발족하였다. 1941년 12월 진주만 습격으로 미군이 참전하게 되자 광복군은 이제 미국의 동맹이 되어 본격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42년 3월 1일 현이평과 나월환이 아나키스트 부하들에게 피살된 직후인 4월 임시정부는‘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합편’을 의결,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동시에 10월 개편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제1지대장에는 조선의용대의 김원봉이 임명되었다. 이전의 제1·제2·제5지대를 통합한 제2지대는 이범석이 지대장으로 취임하였다. 제2지대 본부는 서안 외각 두곡(杜曲)에 있었으며 대원은 250명 정도였다. 제2지대는 국내진공을 위해 3개월에 걸친 미국과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특무훈련을 받았고 1945년 8월 제1기생이 배출되었다.

광복군 모집을 위한 제6징모분처는 부양에 있었으며 김학규가 처장이었다. 광복군 지원자가 급증하자 한국광복군훈련반(한청반)을 운영하여 1944년 11월 1기생 48명을 배출하였으며 1945년 6월에는 제3지대로 변경되었다. 광복군은 국내 진공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광복군 대원증./독립기념관

◇학병 합류로 임시정부 위상 강화

광복군의 초모대상은 독립군, 한인장정, 일본군내 한인병사들이었다. 광복군 선무공작의 결과 일본 치하에서 태어나 일본교육을 받고 자란 학병들이 탈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44-19455년에는 많은 학병출신들이 탈출하여 수개월에 걸친 여정을 통해 임시정부에 도착하였다.

젊은 학병들이 속속 광복군에 입대하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매우 고무되었으며 중국정부도 임시정부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임시정부 위상이 강화되자 1943년 2월 외무부장 조소앙은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에게 광복군의 독자적인 지휘권 확보를 요구하였다.

한국광복군 국내진격 계획로./독립기념관 제공

◇미군정 불승인…광복군 국내진공 좌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광복군은 연합군과 합동작전에 투입되었다. 1943년 8월 영국군의 요청에 의해 광복군은 인면전구공작대를 파견하여 인도, 버마전선에서 공동작전을 수행하였다. 1945년 2월 중경 인근 토교(土橋)에 광복군토교대(최용덕)를 편성하였는데 이때 광복군은 이미 미군의 군수송기 및 물자 지원을 받은 채 8월말 국내진공을 목표로 OSS와 합동으로 군사훈련을 계속하였다.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국내에 진공하여 미군정의 정치적 간섭을 차단하고 국내 국군창설을 주도하기 위해 신속히 7개 지대(상해, 남경, 한구, 북평, 광동, 항주, 국내 등)로 편성하고 모병을 시행하자 광복군은 곧 2만 명이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6년 5월 16일, 광복군은 국내진공이 좌절된 채 해산되어 6년여 혈한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귀국한 광복군들은 독립지사들을 고문하고 죽이던 악질 친일부역자들 마저도 미군정과 이승만의 두호 아래 활개치는 조국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했다./박주성 글로벌평화연구소장

인도 버마 전선에 파견된 한국광복군 대원들./독립기념관

박주성 박사는 전남대에서 민족분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전남대에서 강의중이다. 글로벌평화연구소장과 광주통일교육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제분쟁과 정치사상, 독립운동사와 통일문제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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