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공동체’라는 ‘오래된 새길’
박미정(광주광역시의회 환경복지위원장)

얼마 전 팔순노모의 간절한 제안으로 고향마을의 70회 경로잔치에 참석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70대 이상 어르신 30여분은 경로석에 앉아계시고, 20여명의 5~60대 젊은 어르신들은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나르고 차리고 대접한다. 정성을 다해 인사를 드리고 차려진 음식을 먹는데, “꼭꼭 씹어 천천히 많이 먹어라, 무조건 건강해야 된다.” 면서 주신 밥상은 “한 아이가 성장하는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실감하고도 남았다.

태어날 때 산파역할을 하셨던 동네 아짐(아주머니)에서부터 광역의원 된 제자를 세심하게 챙기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은사님에 이르기까지 50여년의 세월동안 돌봐주고 살펴주신 분들과 한자리에서 반갑게 마주했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의 동갑내기는 46명이었고, 어림짐작으로 350여호가 모여 살던 제법 큰 마을이었다. 성장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동네 행사 중 하나가 경로잔치였다. 이날만큼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나이 많으신 어르신을 융숭하고 즐겁게 대접했다. 술과 밥이 넘쳐나고 흥겨운 음악에 몸을 싣고 한사람씩 돌아가면 부르는 노랫가락은 경로잔치를 넘어 마을축제였다. 일 년 중 단 하루, 노여움과 즐거움을 곁에서 느낀 세월만큼이나 소중한 이웃들이 음식을 나누고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은 상처들을 치유하기도 하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중적 억압 장치들을 자연스럽게 해체시켜보는 날이기도 했다.

이런 마을축제가 70회가 되었다. 이어온 비결은 “동청”과 “대동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장 어르신은 말씀하셨다. ‘동청(同聽)’은 마을 사람 누구의 목소리든지 경청하는 공간인 마을회관이다. ‘대동회(大同會)’는 350호의 마을민이 동등하게 의견을 내고, 자원을 분배하고 서로 돕는 주민자치모임이다. 소통의 공간으로서 ‘동청’이 존재하였고, 누구나 참여하는 소통방법으로서 대동회가 일상생활의 문화로 내면화 되었기에 경로잔치라는 간단하지만 의미를 담은 예식이 70여년을 이어올 수 있었다.

고향마을은 ‘촌년’이라는 나의 정체성의 진원지다. 공동체는 공간과 사람살이일 것인데, 도시의 삶 속으로 터전을 옮긴 나의 세대는 다음세대에게 전해 줄 ‘이웃’, ‘마을’, 그리고 ‘공동체’적 관계에 관한 유산이 한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다음세대에게 전할 수 있는 언어나 문화, 어떤 것도 연상되지 않는다.

2017년 기준 우리나라 도시화율 90.5%를 넘어섰고, 도시 주택 보급율 102% 중 아파트 보급률이 59%를 차지하니 우리 아이들 대다수의 고향 마을은 아파트다. 마을에 당산나무와 정자, 마을회관을 대신하여 아파트 놀이터, 경로당, 공동시설들이 기능한다. 사람살이에 필요한 기능들이 조금 다르지만 존재하고 있는데, 구성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우리들 마음속에서 스스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네 사람들, ‘이웃’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린 것은 아닐까?

이장 대신 통장 또는 입주자대표와 부녀회 등이 있는데 아이들은 공동체를 느낄 수 없다. 대동회와 같은 소속감을 가질만한 고리도 없다. 우리 아이들의 추억과 기억에는 아파트에서 마주친 어르신의 따뜻한 미소나 정중한 가르침도 없을 것이다. 동청과 같은 곳에 나갈 일도 없지만 진지한 목소리를 내거나 들은 경험들도 없이 자라고 있다.

3미터도 안 되는 거리, 위·아래·옆집에서 365일 생활하는 열사람 중 이름 석 자 기억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우리의 다음세대들은 이렇게 성장하면서 가족 이외의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다. 뭔가 적극적인 변화와 시도가 없는 한 우리 모두는 앞으로도 이웃의 온정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 것 같다. 아파트 마을에서도 내 고향 마을의 경로잔치와 같은 연례의식으로 이웃이 있는 마을임을 느끼게 할 수는 없을까? 아이들이 ‘공동체’라는 걸 잠시나마 체험할 수 있게.....,

아파트마을이 고향인 우리 아이들은 집 한 칸 울타리 안에만 있다. 지금부터라도 아파트에서 공동체적 움직임을 만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할까?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우리네 마음의 문이 열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파트 마을에서 동청과 대동회와 같은 문화공간과 소통방법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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