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광해시대 1장 역사 청산 <330>

<건거록>은 왜나라의 지리·풍토·인문·병비(兵備)와 왜의 조선 침략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적지에서 임금께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疏)」와 일본의 지도를 그린 ‘왜국팔도육십육주도’, ‘고부인격(告?人檄) 등을 통해 적국에서 당한 포로들의 참상과 일본에서 보고 들은 정보를 빠짐없이 기록해 놓은 책이다(1600년 <건거록>으로 발표되었으나 1656년(효종7년) 그 제자들에 의해 ’看羊錄‘으로 改題되었다).

“건거록의 명성은 과인 역시 알고 있다만 선왕대의 일이고, 숨가쁘게 국사를 여미느라 미처 챙겨 보지 못했다. ‘건거’라면 죄인을 끌고 가는 검은 면포를 친 수레인데, 무슨 뜻이냐.”

“강황은 포로가 된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면서 포로보고서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왜놈들이 이 글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러는고?”

“유성룡의 징비록에 비견할 서책이온 바, 우리의 방비책을 탄탄히 해야 할 것을 조목조목 열거하고 있었으니까요.”

정충신이 다시 길게 설명했다. 정유재란(1597년) 시 형조좌랑 강항이 남원에서 군량미 수송을 담당하다 원균의 칠천량해전 대패로 남원이 함락되자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서 의병을 일으켰다. 마침 이순신 장군이 논잠포구(영광군 염산면)에 와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을 이끌고 논잠포구로 향하다가 해안에 매복중인 왜 수군장 도도 다카노라에게 체포되었다. 그 보름 후 그는 왜국 이히메현 나가하마항에 도착하여 포로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는 포로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조선에 끊임없이 비밀문서를 발송했다.

일본은 수백 년 동안 사분오열되었다가 풍신수길이 천하통일해 장수들끼리 으르렁거리는 것을 조선에서 풀게 함으로써 군병의 세력을 일단 잠재웠다. 그러다가 수길이 죽었으니 일본은 다시 분열될 것이다. 수길 같은 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니, 조선은 당분간 병화(兵禍)를 입지 않을 것이며, 이때 철저히 방비해야 할 것이다.

강항은 나가하마의 사찰 승려 요시히도와 교류한 것을 기화로 승려에게 배편을 준비해줄 것을 요청하고, 항구로 포로들을 이끌고 아쿠시타니 계곡을 지나다가 체포되어 우와지마성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이때 승려 가이케이의 청원으로 풀려나 교토의 후시미성으로 이송되었다. 포로생활 중 그는 교토성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강황은 일본 왕에게 초청받아 일본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워준 아스카문화와 나라문화의 시초 왕인과 달리 포로로 간 신분이었지만 일본의 젊은 지성을 배출하면서 석학으로 인정받았는데, 이때 글씨를 팔아 배를 구해 조선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광해가 물었다.

“포로인 강항에게 왜나라 학계가 열광했다니 왜놈들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구나.“

“왜국은 학문이 취약합니다. 일본 장수라는 자들은 태반이 문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무리들이옵니다. ‘무경칠서’를 통독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 자들이 흩어져서 스스로 싸우는 데는 용감하여 족히 한때의 승리를 쾌감할 수 있지만, 장차는 병가의 기변을 잘 모르고 무대뽀로 살아갈 족속이옵니다. 내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무슨 말이냐.”

“도쿠가와 이에야스란 자가 무사들의 이런 약점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군사체계를 갖추는 한편으로 국가 동력을 해양으로 뻗어나갈 야망을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국부( 國富)를 전쟁의 전리품으로 챙기겠다는 발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실용입니다. 강항에게서 배운 학문과 자기들 전통적 실전을 버물러서 새 국가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강항을 일본의 국학으로 떠받들고, 일본 귀화를 종용했나이다.”

“그런데?”

“그런 요청을 받았지만 강항은 단호히 거부하고 조선으로 귀환한 것입니다. 포로들도 일백여 명 데려왔습니다. 우리가 쇄환사로 일본국에 다녀왔지만 강항 역시 쇄환사 역할을 톡톡히 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고향 영광에서 후진을 기르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바대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교훈을 통절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통절하게? 어떤 교훈 말이냐.”

“왜놈들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목적은 조선을 정복하고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삼기 위한 침략이라면, 정유재란은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쇄환사로 도일했지만 송환된 포로는 200명이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송환된 포로는 8,000을 넘지 못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10만명 중 10분지 1도 돌아오지 못했나이다. 무지랭이는 노동력으로 쓰고, 학문하는 고급 인력은 일본 학문 자원으로 쓰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포로에게서도 학문을 익히는 실용적 태도를 보입니다. 배움에는 왕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포로에게서도 배움을 익히는 저들의 실용정신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체면 때문에라도 외면했을 것입니다.”

광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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