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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광해시대 1장 역사 청산 <333>

정충신이 승복하지 않고 말했다.

“전하, 힘없는 자가 용서하면 비굴한 자가 되지만, 힘이 있을 때 용서를 하면 하나의 덕이 됩니다. 덕을 베푸시는 성군이 되시옵소서.”

“뭐라? 편하게 가자는 뜻이렸다? 다시 말하겠다. 반성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한단 말이냐. 용서와 사면이란 진실로 반성하고 다시는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그렇지 않은 용서는 비겁한 도피술이지.”

“그래도....”

“내 말을 더 들어보렸다. 자, 생각해보라. 가해자가 보복을 멈추라고 요구하면 어떻게 세상 만물의 질서가 잡히겠는가. 그건 오만이다.”

정충신은 대꾸를 멈추고 엎드린 채 광해를 올려다 보았다. 광해는 화가 나있는 듯했다.

“용서에도 고통이 따른다. 다 지나긴 일, 그러니 잊자, 좋은 게 좋잖나, 덮고 가자, 이렇게 가면 정의가 올바로 서겠느냐. 그런 자들은 때가 되면 다시 기어오를 것이다. 자기 과오를 인정치 않고 상황론을 들먹이며 역습해올 것이다.”

광해는 정충신이 그 당사자나 된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용서는 가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피해자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피해를 받아서 고통받는 이에게 어떤 위로가 될까를 성찰하지 않는다면, 화해는 무의미하다. 나쁜 놈들에게 너그러울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반성의 절차 없이 넘어가면 그는 필시 다시 오만해질 것이며, 용기를 얻어 또 세상을 밟을 것이다. 장차 과인에게도 그러할 것이야. 그들은 과인을 영영 무덤속에 쳐넣어버릴 것이다.”

“전하의 깊은 뜻인 줄 아오나, 잘못 쓰면 큰 화를 부를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더불어 살려면, 가해자가 진실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 죄값으로 영원히 동굴속에 갇혀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진정으로 반성하고 회개할 때, 피해자가 그를 동굴에서 꺼내줄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화해다.”

광해는 계속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정충신은 그가 처한 오늘의 상황을 보면서 변화해가는 일본을 생각했다. 일본이란 나라는 언필칭 복수의 나라다. 이쪽 무사가 깨지면 반드시 상대 무사를 보복해야 한다. 그것이 사무라이의 정의고 질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이에야스가 그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흰 기를 펄럭이고 있다. 광해가 조금만 이 이치를 안다면 성군의 길을 갈 것이다.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력, 병법 관리와 대동법 제정 등 생활혁명적 기치를 드높이는 데서도 그런 면모가 엿보인다. 그런데 원한에 사무쳐있다. 그의 눈에 불을 붙이면 당장 불이 붙을 것같다. 광해가 물었다.

“왜나라에 가서 보았다고 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다른 길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가 가보지 못한 길입니다.”

“가보지 못한 길?”

“그렇습니다. 상것들이 주무르고 있는 공상(工商)을 장려하고 있나이다. 그들 손에 무기가 제조되고, 삽이 제조되고, 호미와 쇠스랑, 어구(漁具)가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는데, 그들을 천시한 것을 반성하고 우대하고 있습니다.”

“사농공상 아니던가?”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철을 녹여서 총통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백성들이 편하게 쓸 수 있는 농기구와 수레, 어구를 개발하고 있사옵니다. 여러가지 생산 체제를 갖추고 있나이다.”

“무기라면 몰라도 물건을 많이 생산해서 어디에 쓰게?”

“왜는 지금 중국과 무역을 중시하여 류큐(琉球)와 난징과 푸젠(福建)지방의 상인들과 교역하고 있습니다. 서양과의 무역에도 관심을 갖고 포르투갈 상선을 받아들이고, 요근래는 동남아까지 교역의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해양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건을 팔 판로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금기시했던 야훼교까지도 묵인하고 있습니다.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흡연을 반대하는 야훼교도들을 불상놈들이라고 여기고 한때는 추방했으나, 지금은 결혼을 하지 않는 외국인 신부를 제외하고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국의 귀신들과 야훼교의 귀신들이 밤낮없이 싸울 텐데? 야훼교는 뜬구름 떠다니는 하늘을 보고 아버지라고 헛소리한다면서? 그래서 아비가 둘이라면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서 천 사람, 만 사람이 배불리 먹는다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면서? 왜인이란 본시 칼을 쓰고 엽색을 즐기고, 한편으로는 가무를 즐긴다고 하지 않던가. 어떤 자들은 길거리나 숲속, 강가로 아무 부녀자나 끌고 가서 성교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배에서 다른 씨가 넷도 나오고, 다섯도 나온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칼싸움으로 씨가 말라가는 종자를 퍼뜨린다고 합니다.”

이야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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