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육에 가까운 계엄군 만행…그들이 바로 폭도였다”

5·18 39주년 시민들이 전하는 참상-②차량시위 이끈 장훈명씨
“살육에 가까운 계엄군 만행…그들이 바로 폭도였다”
눈 앞에서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맞아 죽어 나가
택시·버스·화물차 등 200여대 도청 앞 시위 나서
 

80년 5월 20일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개한 택시기사들이 광주 금남로에서 펼쳤던 차량시위 장면. /5·18기념재단 제공·촬영자 나경택

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작성한 담화문에 따르면 5·18에 대해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해 여러분의 고장(광주)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 행위 등을 통해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선동하고 난도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신군부는 5·18이 비극적 사태로 확산된 근본원인을 불순인물과 고정간첩의 침투, 의도적인 유언비어 유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연 80년 5월 당시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 행위 등이 계획적으로 있었는지에 대해 현장에 있었던 시민의 증언을 들어봤다.

“민주주의가 무엇인 줄 알았간… 당장 눈 앞에서 어른·아이·여자 할 것 없이 맞아 죽어 나가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1980년 당시 20대의 평범한 가장으로 택시 운전으로 생업을 이어가던 장훈명(66)씨는 ‘5월의 광주’를 이같이 회상했다.

장씨는 “계엄군이 어르신·교복입은 학생·아줌마 할 것 없이 단단한 박달나무로 만든 곤봉으로 막 패대는데 생지옥도 그런 생지옥이 없었다”며 “흡사 살육에 가까운 계엄군의 만행을 목도하면서 이대로 있다간 광주 시민 모두가 떼죽음을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장씨는 5·18 민주화운동의 기폭제로 평가받는 ‘택시·버스기사들의 차량시위대’를 이끌었던 장본인이다.

그는 “19일 당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인근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데 사복차림을 한 경찰이 자신의 동생을 전남 화순으로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했다. 다급함과 간절함이 섞인 그때 그 경찰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경찰의 동생을 환자로 위장해 화순에 데려다 주면서 이야기를 전해듣게 됐고, 광주로 다시 돌아왔을땐 상황이 점점 더 안좋아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기고 탈환은 한참 이후에나 있었지 당초에 시민들은 맨몸으로 계엄군들에 맞섰다. 행여 무기라고 치면 바닥에서 주운 돌멩이 또는 각목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악랄해지는 계엄군의 만행을 보면서 학생들에게만 맡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역전 앞에 모인 동료 택시기사들과 의견을 모았다”며 “이름도 성도 몰랐지만 광주시민들의 처참한 모습에 각자 택시를 끌고 모였다. 영업용 택시뿐 아니라 대형 트럭, 고속·시외버스 할 것없이 200여대가 모여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도청을 향하는데 이것이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말했다.

장씨는 “솔직히 그때 일반 시민들은 정치·이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아무 이유없이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나가는 모습에 분개한 것일 뿐”이라며 “당시 계엄군들이야말로 폭도였다. 시위 진압이 목적이 아니라 살인허가증을 발급받은것처럼 살육과 폭력을 즐기는 모습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에 그런 소문이 있었다.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밥은 안 주고 술만 마시게 한다고. 그도 그럴 것이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는 계엄군들의 모습은 도저히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정희윤 기자 star@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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