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광해시대 1장 역사 청산 <335>

광해는 이런 적들로부터 나라를 어떻게 이끌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부가 문제였다.

광해는 추진력과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다. 16년의 세자 기간과 임진왜란 시의 분조를 통해 개국 왕 이성계처럼 나라의 곳곳을 누비며 실무 경험을 쌓고, 그러는 과정에서 나라 형편과 백성들의 사는 형편을 직접 목격했다. 도덕률과 품격도 엄격해 동복 형 임해군이나 이복 동생 신성군과 달리 금도를 지킨 모범생이었다. 그는 형제들처럼 엽색을 즐긴 사람이 아니었다. 정비와 후궁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만을 두었을 뿐이다. 난군이나 혼군이 될 우려가 없었기 때문에 명나라에서조차 아비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병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복수심이었다. 그는 복수심으로 내내 화를 끓이고 살았다. 하긴 그는 세자 16년동안 사면초가의 상태에서 울분과 두려움 속에 지냈다. 부왕의 견제와 신하들의 배척으로 원한을 휴대품처럼 흉중에 매달고 살았다.

부왕은 뻑하면 선위한다고 하고, 그것도 밥먹듯이 입에 올렸다. 신하들을 간보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면을 살펴보면 세자를 떠보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것이 재위 동안 열여덟차례나 되었다. 그럴 때마다 광해는 끼니를 굶어가며 뜰에 나가 엎드려 읍소했다.

“전하, 삼가 바라옵건대 다시는 그와 같은 전교를 내리지 않으신 것이 합당한 일인 줄로 아뢰옵니다. 전하의 성은이 만백성의 머리에 축복처럼 내리고 있사온데, 어찌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상감마마의 광영이 연년세세 내리도록 전위의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나라를 망친 군주는 다시 보위에 나갈 수 없다. 과인이 부끄러움을 아는 왕으로서 어찌 더 이상 왕실을 떠받들겠다고 할 것인가.”

그러면 중신들까지 나서서 선위를 거둘 것을 요청한다. 선조는 그렇게 시험 거리가 없나 하며 내질러보는데, 거기에 재미를 붙였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은 피를 말릴 지경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명나라로부터 세자 책봉에 문제가 있다고 했을 때, 부왕은 그것을 즐기는 듯 눙치고, 어린 인목왕후로부터 아들을 얻은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광해를 패대기칠 궁리만 했다.

그런 뜻에서 정충신의 생각은 단순한 면이 있었다. 시원시원하게 적들을 제거해나가며 새 나라를 세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광해를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이다. 참고 기다리고 숨죽인 세월을 산 공통점은 있지만, 삶의 궤적에서 두 사람은 확연히 다르다.

“마마, 난관을 극복하고 위급한 국사를 수습하시는 혜안에 감동하였나이다. 전하의 지혜에 힘입어 나라가 회복의 기미가 보이는데 맹세코 두 가지만 지키시면 태평성대가 이루어질 듯하옵니다.”

“무엇이냐.”

정충신이 대답하려고 하는데, 좌우 정승 이관해와 정인홍이 어전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왕이 젊은 군관과 끝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왕이 그들을 향해 물었다.

“전하, 그 말씀은 저희가 전하께 여쭙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젊은 군관과 무슨 말씀을 하셨나이까.”

“젊지 않다. 정충신도 삼십대다. 지금 사행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정충신 군관의 보고를 듣고 있다.”

“자미가 있으시옵니까.”

“재미 뿐만이 아니다.”

왕은 젊은 군관의 일본을 보는 시선이 신선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늙은 중신들의 경우, 충성도를 의심할 바 없으나 보는 눈이 고루하고 보수적이며, 늘 선례를 가지고 정사를 논한다. 선례를 따를 게 아니라 직접 선례를 만드는 일은 못하나? 광해는 그런 불만을 가지면서 말했다.

“과인이 젊은 군관에게서 취할 바가 있으니 추후 부를 때 오시오.”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모욕을 당한 듯 두 중신이 쩔쩔매는 표정을 지었다.

“전하, 대동법의 공납과 관련하여 말씀드리고자 하나이다. 그 용건 때문에 찾았사옵니다.”

“공납 문제는 이미 밝혔잖소. 공납은 지역특산물을 내는 것인데,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물품이 할당되는 불합리성이 있소. 과인이 세자 시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본즉 호랑이가 나오지 않는 지역에서 호피를 가져오라고 하고, 두메산골에서 고래고기를 가져오라고 하면 되겠소? 그것이야말로 관리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탁상행정이오. 평야지에서는 쌀로, 산간 지역은 전곡으로 가져오도록 하시오. 공납은 지역에 맞게 곡식으로 하는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두 늙은 정승이 충신을 훔쳐보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왕에게 밀린 것에 대한 불만이 있는 듯했다. 그들이 물러나자 광해가 말했다.

“너는 내 곁을 지켜라. 내 생각한 바가 있다.”

정충신이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상감마마. 저는 군인입니다. 북방을 지키는 장수이오니 현지 부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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