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광해시대 1장 역사 청산 <337>

좌의정 백사 이항복은 근무일 이외에는 주로 포천의 농막에 머물고 있었다. 조정 동향이 험하게 돌아가니 생각을 가다듬고 휴식도 취할 생각이었다. 새 임금의 친국으로 조정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항복은 서인이었지만 무당파로서 중립을 지키는 편이었지만 요즘 대북파가 설쳐대니 안심할 처지가 못되었다. 백사는 광해의 세자 위치를 굳건하게 한 사람이었다. 조선왕조 시기 중 가장 참혹한 전쟁인 임진왜란 때 광해의 활약상을 보고, 그를 세자로 책봉되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선조 마음은 달랐다. 선조는 인목왕후에게서 아들 영창대군을 보자 어느날 이항복을 불렀다.

“이 재상은 과인의 큰 약점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눈치 빠른 이항복은 대번에 왕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답했다.

“그야 적계 승통이 아닌 방계 승통이란 점이시지요.”

“그렇지. 그것으로 내가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백사가 잘 보았을 것이요. 그러니 기왕에 왕후에게서 대군이 나왔으니, 그런 약점을 일거에 해결할 방책이 나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문제를 불러올 것이 분명했다. 광해가 세자로 책봉돼 15년동안 후계자 훈련을 받았고, 왜란 시 분조를 이끌어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런데 젊은 왕비에 빠진 왕은 이 점을 묵살하고 이항복을 시켜 중신회의에서 세자 교체를 상신하라는 지침을 내릴 생각이었다.

“상감마마, 영창대군 저하 세수가 워낙 어립니다. 젖먹이인데, 세상풍파가 어지럽사옵니다. 자칫 정사의 도구로 휘둘리게 되면 어린 대군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나이다.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선결과제이옵니다.”

이리의 이빨들이 으르렁거리는 붕당체제에서 저런 핏덩이가 정권 쟁탈의 도구로 쓰일 것은 명약관화하다. 세자 교체로 인한 분열과 갈등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궁궐이 난장판이 되어서 또다시 외세를 불러들일 수 있다.

“자칫하면 상감마마께서 이룩하신 업적도 무너질까 두렵사옵니다.”

도망만 다니는 왕인지라 업적이랄 것이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세워주면 마음이 누그러질 것으로 알고 이항복은 일단 왕을 추켜세웠다.

“광해란 놈이 글쎄...” 왕은 계속 뭔가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왜란이 끝났지만 뒷수습을 하려면 추진력과 담력이 또한 필요합니다. 세자라고 해서 다 잘한 것도 아니고, 다 옳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상감마마를 위해 풍찬노숙을 마다 않고 분골쇄신 뛰신 광해 세자입니다. 이는 모두 전하의 광영이시옵니다.”

“결국 그놈이 잘했다는 뜻인가?”

“어찌 마마와 같다고 하겠습니까. 그래도 세자 훈련을 받으신 한편으로 임진왜란 개전시 분조를 이끌면서 대통을 이어받을 준비를 착실히 하였사온즉, 상감마마의 어진 행적을 이어받고, 후에 영창대군이 이팔청춘이 되실 때까지 지켜보도록 하심이 어떠하시겠사옵니까. 그 사이 실책을 하시면 교체를 앞당길 수 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항복은 시간을 벌자는 계산이었다. 생각해보니 참 한심한 왕이었다. 하긴 선조는 왕이 될 여지라곤 없었기 때문에 세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왕족으로서 글씨나 쓰고 시를 지으면서 풍류를 즐기고 여생을 보내야 할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갑자기 왕위에 오르니 주변의 말 한마디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한마디로 자격지심이 컸다. 머리가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니지만, 대신 비겁하고 교활한데다 무능하고 질투와 시기심이 많아서 군왕의 그릇이 되지 못했다. 거기에 비하면 광해는 포부와 배짱이 있고, 지혜와 통찰력이 있었다.

“영창이 10대가 되려면 내 나이가 이순(耳順)이 될텐데 그게 되겠는가. 지금도 해소에 가래를 한 웅큼씩 쏟아내고, 식은땀으로 목욕을 하고, 양물도 시원찮은데 말이야.”

이항복은 이때를 노렸다. 선조는 이항복과는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단 둘이 있을 때는 스스럼없이 기방(妓房)의 방사 얘기도 나누었다.

“마마, 양물 얘기가 나왔으니 말씀이온데, 이런 고약한 일이 있었나이다.”

“고약한 일?”

임금이 흥미를 보였다. 백사에게서 무슨 농담이 나올까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이다.

“어떤 산골에 주인 마님이 사는데, 자기집 머슴의 양물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사통(私通)하려는 마음이 간절했다고 하옵니다. 주인이 멀리 출타하니 그 정이 더 사무쳤다고 합니다.”

“물건이 얼마나 크길래?”

“호마의 것과 비견되었다고 하옵니다. 그렇게 양물이 크니 주인마님 마음이 불탔겠지요.”

어느날 여인이 생각 끝에 갑자기 아랫배를 부여잡고 배가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머슴이 안방에 들어가 쩔쩔매며 물었다.

“마님, 어디가 아프십니까?”

“배가 몹시 차가워져서 아픈 모양이다. 뜨거운 것을 갖다 대야 할 것인데 물을 부을 수도 없고 마땅한 게 없구나.” 머슴이 무슨 뜻인 줄 조금은 아는 듯 마는 듯하면서 얼겁결에 말했다.

“그렇다면 제 배를 갖다 대면 어떨까요.”

“그럼 그렇게 해보자꾸나. 하지만 남녀간에 내외하는 편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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