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광해시대 1장 역사 청산 <339>

“내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반란자들을 쓸어버리지 않고는 밥맛이 날 수가 없다.”

광해는 직접 친국장에 나갔다. 체포돼온 자들을 주리를 틀고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샅을 지지도록 명했다. 추국 과정에서 피와 살이 튀고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왕의 용포에 묻어있던 핏자국도 바로 그런 고문의 흔적이었다.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등 두 번의 사화를 치른 연산군도 직접 친국은 나서지 않았는데(세종은 한번), 광해는 210회나 관여했다. 날씨가 춥거나 무더운 것을 가리지 않았고, 중요 행사가 있어도 제쳐두고 친국장에 나갔다. 죄인들에게 직접 질문하고 배후를 캐고, 대답이 마땅치 않으면 고문 불호령이 떨어졌다. 친국할 때는 의금부 당상들과 삼정승, 삼사의 수장과 대신들이 나와 배석했는데, 지켜보는 것도 못볼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100여명의 임해군 장졸들이 죽어갔다. 원로급 대신들은 어떻게든 임해군만은 살리고 싶었다. 이항복 이원익 심희수 정구 이덕형이 그들이었다. 그중 이항복이 간절히 아뢰었다.

“상감마마, 형제의 핏줄은 천륜이옵니다. 천륜을 저버리면 하늘도 버립니다. 극형보다는 귀양을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하심이 지당하온줄 아뢰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노재상 이항복의 의견에 따라 임해군은 일단 강화도 교동으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어느날 임해군이 바닷가 백사장에 변사체로 발견됐다. 임해의 죽음은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현감 이직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지만 광해의 언질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항복은 광해의 잔혹성을 보고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 당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가졌다. 대개 불길한 예감은 불행히도 적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육십의 긴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살펴본 삶의 한 과정이었다. 그는 자멸의 길로 빠져드는 광해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이항복은 근래 사직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북파 이이첨·정인홍 등 대신들이 역적을 두둔한다고 그를 비난하면서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는 포천 농막에서 권력의 황막함은 느끼며 퇴임을 준비하고 있는데, 정충신의 방문을 받은 것이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이항복이 탄식했다.

“세자 시절의 총명과 지혜가 어디로 갔단 말이냐. 무당을 곁에 끼고 궁궐을 짓는 것이야 건물이라도 남지만, 사람을 치면 영영 그 사람의 지혜를 구할 수 없다. 임해를 잡았으니 이제 인목왕후 차례로구나.”

“대감 나리, 제가 한번 나서 보겠습니다. 선정을 베푸시도록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상감마마가 나쁜 것이 아니라 주변이 문제다. 너 또한 다칠 수 있으니 정사에는 끼어들지 말거라. 권력이란 가까이 가면 불에 델 수가 있지. 나는 선왕과 비슷한 연배고, 임금은 나의 자식과 같은 나이니 물러날 때도 되었느니라.”

이때 말을 탄 장정 둘이 농막으로 들어섰다. 왕명을 받은 선전관들이었다.

“어명이오! 이항복 정승 나리는 지금 즉시 어전으로 납시라는 명이오!”

“무슨 일이오?”

“우리야 모릅지요. 명만 따를 뿐이옵니다.”

말에 올라 한양 길로 나선 이항복 곁에 정충신이 바짝 따라붙었다. 궁궐에 도착하니 해거름녘이었다.

“내가 백사 대감을 부른 것은 지금 당도한 중국 사신들 때문이오. 명이 후금국과 사르후에서 일합을 겨룰 모양이오. 명나라의 명운이 걸린 전쟁인만큼 우리에게 군사 2만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소.”

임금이 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상당히 난감한 표정이었다. 어전에는 대북 소북, 남인 서인 가릴 것없이 중신들이 들어와 있었다. 대북 소북 세력을 보니 그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본래 이들은 한 뿌리였다. 감투 하나를 가지고 서로 갈라서 으르렁거리렸으니 군자의 자격과는 거리가 먼 소인배들이었다. 홍여순을 대사헌(요즘의 감사원장)에 임명한 것을 두고 김신국, 남이공이 성품이 약한 노친네가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겠느냐며 반대하면서 분란이 생겼다. 이때 김신국·남이공 등 소장 관료들이 소북을 이루고, 이산해·홍여순 등 나이가 든 고위관료들이 대북을 형성했는데, 그 싸움이 가관이었다.

일상의 문제에서부터 부딪치더니 왕의 승계 문제를 놓고 박터지게 싸웠다. 대북파는 이전부터 세자였던 광해군을 지지하고, 소북파는 인목왕후에게서 탄생한 어린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힘의 균형은 소북파의 유영경이 영의정이 되면서 깨지는 듯했으나 선조가 죽는 바람에 사세가 역전되었다.

광해는 대북과 소북이 격렬하게 붙자 이를 이용해 내부를 정리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명과 후금이 일합을 겨룬다는 사실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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