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 왜군 포로로 끌려간 강항, 일본 성리학의 원천이 되다

전라도역사이야기-88. 강항(姜沆) 선생과 간양록(看羊錄)
上. 왜군 포로로 끌려간 강항, 일본 성리학의 원천이 되다
영광 함락시킨 왜군 피해 바다로 갔다가 나포
강항선생, 형제·가솔들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가
日 學僧 후지하라 세이카에게 조선성리학 전수
하야시 라잔·야마자키 안사이가 학문경지 넓혀
사유·논증 깊어진 日학자들 서양학문 쉽게 수용
결과적으로 강항이 전한 성리학 日 근대화 촉진
강항, 억류 시 倭 내부정보 조선에 은밀히 전달
풀려나 조선에 돌아온 뒤 후학들 가르치며 은거

조총을 생산해 군사강국이 된 일본은 임진·정유재란을 통해 문화강국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수많은 조선의 학자들이 일본의 학문세계를 풍요롭게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수은 강항 선생이다. 일본인들은 강항선생이 소개하는 성리학의 학문세계에 빠져들었다. 일본학자들은 사유와 변증, 그리고 논쟁을 통해 성리학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실사구시 형 성리학을 만들어냈다. 깊은 사유와 실천적 기질을 갖게된 일본 학자들은 네덜란드 선박을 통해 들어온 서양문물과 학문(蘭學)을 효율적으로 받아들여 일본 화 시켰다. 결과적으로는 강항 선생이 일본에 전한 성리학이 일본의 근대화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오쓰성
내산서원. 내산서원은 1635년(인조 13)에 용계사(龍溪祠)라는 이름을 사액 받았다. 1702년(숙종 28)에 중수됐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74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다시 세워졌다. 1977년 10월 20일 전남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됐다.
오쓰에 있는 홍유 강항현창비
홍유강항비. 일본 에히메 현 오쓰 시에 가면 강 항을 기리는 현창비가 있다. 화강석으로 된 비면에는 ‘홍유(鴻儒) 강항(姜沆) 현창비(顯彰碑)’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하단에는 검은 오석판에 강항의 연보가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영광 내산서원에 모셔져 있는 강항 선생 영정.

■조선 유학자 강항(姜沆), 왜군의 포로가 되다

정유재란은 왜군의 전라도 침공 작전 성격이 짙었다. 왜군은 임진년 조선정벌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전라도를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판단했다. 전라도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왜군들을 괴롭혔고 전라도에서 수송된 군량이 조선의 관군을 먹여 살렸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년에 조선을 재침공하면서 전라도 장악과 이순신장군의 척살을 지시했다.

정유년, 남원성을 깨트린 왜군들이 전라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민간인들을 죽이고 욕보였다. 영광에도 왜군들이 몰려와 마을을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1597년 9월 14일 왜적들이 영광에 들어오자 강항의 가족들은 2척의 배에 나눠타고 바다로 피신했다. 큰 배에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타고, 작은 배에는 강항을 비롯 둘째 형 준(濬), 셋째 형 환(渙), 다른 가족들이 올랐다.

그런데 풍랑 때문에 아버지가 탄 배와 헤어지게 됐다. 신안 어의도 쪽으로 가다가 21일 왜군 수군들을 만나게 됐다. 왜군 수군들은 강항과 가족들이 탄 배를 나포했다. 강항과 가족들은 꼼짝없이 왜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강항선생이 남긴 <간양록>에는 왜군에 붙잡힐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이제 마지막 때가 됐구나 생각하며 옷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왜놈들에게 붙잡혀 굴욕을 당하기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었다. 남은 권솔(眷率:한 집에서 같이 생활을 같이하는 식구)들도 모두 내 뒤를 따라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주인이 죽으려 하는데 우리만 살아남아 무엇하겠느냐 싶은 생각에서 였을 것이다. 그러나 죽는 것도 뜻대로 되지않았다. 깊이가 얕아 왜놈들의 갈고리에 걸려 모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왜군들은 강항 가족들을 부산 근처의 안골포(安骨浦)~대마도~큐슈(九州) 서북단의 나고야(名古屋)~ 시모노세키(下關)~시코쿠의 나가하마(長浜) 항으로 끌고 갔다. 나가하마에 도착한 날은 1597년 음력 10월 15일이었다.

강항 일가족을 바다에서 붙잡은 왜군의 장수는 도도 다카토라오쓰였다. 그의 영지(領地)는 오쓰(大津)였는데, 나가하마에서 오쓰까지의 거리는 15km정도였다. 오쓰의 영주인 도도 다카토라는 강항이 학문이 깊은 선비임을 곧 알아챘다. 그래서 다카토라는 강항과 가족을 오쓰에서 오사카(大阪)을 경유해 후시미(伏見)로 데려갔다. 후시미는 당시 일본의 서울이었다. 후시미에서 강항은 학승(學僧) 순수좌(舜首座:후에 후지하라 세이카:藤原惺窩로 개명)를 만난다. 후지하라 세이카는 조선 통신사 등을 통해 조선의 성리학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강항을 통해 유학(儒學)의 깊은 경지를 접한 순수좌는 승복을 벗고 본격적으로 유학(儒學)공부에 정진하게 된다.

■수은(睡隱) 강항

강항은 1567년(명종 22)에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태초, 호는 수은(睡隱)·사숙재(私淑齋)이다.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이며, 강극검(姜克儉)의 아들이다.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정자·박사·전적을 거쳐,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근무하면서 군량확보와 보급에 힘썼다.

남원성이 함락 당하자 영광으로 돌아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다. 그렇지만 군사수가 많고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광에 왜군들이 들어와 살육전을 벌이자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피했다. 이순신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왜군과 싸울 요량이었으나 신안 바다에서 왜 수군의 포로가 됐다.

강항은 일본 오쓰 성(大津城)으로 끌려간 뒤 9개월 동안 두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강항의 학문깊이를 알아본 왜군 장수 도도 다카토라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학자 후지하라 세이카와 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조선 성리학의 진수를 전수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 일본의 내부사정을 세밀히 알아내 조선조정으로 보내 참조토록 했다.

후지하라 세이카 등의 도움으로 강항과 가족 등 38명은 1600년 4월 2일 후시미성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강항 일행은 대마도를 거쳐 5월 19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강항이 조선에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는 강항을 불렀다. 강항은 6월 9일에 입궁, 선조를 만나 일본의 사정을 알렸다. 이후 한양에 머물면서 승정원과 예조, 비변사 등에 일본의 여러 상황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알렸다.

9월 초에 강항은 고향인 영광군 유봉마을에 돌아와 부친 강극검을 만나 상봉의 기쁨을 나눴다. 선조는 그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본인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사양하고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인물화와 소나무를 그리는 재주도 뛰어났다. 저서로 <운제록 雲堤錄>·〈강감회요 綱鑑會要〉·〈좌씨정화 左氏精華>·〈간양록〉·〈문선찬주 文選纂註〉·〈수은집〉 등이 있다.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강항휘초 姜沆彙抄>가 소장돼 있다. 1882년 이조판서·양관대제학에 추증됐으며 영광 내산서원 용계사에 제향됐다. 광복 후 강항 선생 후손과 학자들에 의해 강항선생을 기리는 선양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일본 성리학이 근대일본을 디자인하다

일본에서는 후지하라 세이카를 일본 성리학의 개조(開祖)로 평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용을 들어다보면 일본 성리학의 토대는 강항이 세운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강항과의 교류를 통해 후지하라 세이카가 유교와 성리학의 진수를 배울 수 있었고 강항과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일어 음으로 읽을 수 있는 성리학 서적들을 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강항이전에 유교가 전해져 있었다. 그러나 원문(한문)으로 성리학 경전을 읽을 수 있는 학자는 극소수였다. 강항과 형제들은 후지하라 세이카의 부탁에 따라 사서오경(四書五經) 대자본(大字本을 정서(淨書)했다. 또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사서(四書)와 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 곡례전경(曲禮全經)의 오경(五經)과 소학, 근사록(近思錄), 근사속록, 통서, 정몽(正蒙) 등을 필사(筆寫)해 수진본(袖珍本: 옷소매에 넣을 수 있는 소책자)으로 만들었다.

강항을 통해 일본 땅에 뿌려진 성리학은 일본 학문이 번영하게 된 뿌리가 됐다. 일본 학문에 다양성을 더했고 일본인들이 쉽게 학문세계에 접할 수 있게끔 했다. 일본인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근대화과정에서 대단한 원동력이 됐다. 결국 강항이 전수한 성리학의 진수와 학문에의 용이한 접근성은 일본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정신적 원천이 됐다.

강항과 후지하라 세이카는 일본 성리학을 발전시켰고 일본성리학은 일본인들이 세상의 이치를 논하고 분석하는 ‘학문 원형질’이 됐다. 일본학자들은 서양학문의 여러 가지 개념을 한자로 정리했다. 서양학문에 대한 동양적 개념화는 대부분 일본 학자들이 일궈낸 성과다. 이 성과의 이면에는 사유와 분석을 통해 물질과 사상세계를 체계화시켰던 성리학이 있다.

일본학자들은 학문적 지식을 산업과 농업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했다. 일본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됐다.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단련된 일본인들의 내공은 결국 난학(蘭學:서양학문)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케 했다. 일본이 흥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강항이 억류생활을 했던 오쓰에 ‘홍유강항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세워지고 일본인들이 강항선생을 흠모하고 있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성리학에 갇힌 조선, 허약한 나라가 되다

이에 반해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을 학문으로만 여겼다. 성리학은 조선의 정신문화를 찬란하게 피우게 했다. 하지만 공리공론 적 성격이 갈수록 커졌다. 학문은 세상을 이롭게 하고 편리하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지만 조선 성리학은 그러질 못했다. 주자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주장과 행동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斯文亂賊)이 됐다. 문(文)은 귀중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무(武)와 상(商)은 천한 것이 되고 말았다.

조선은 모든 가치관을 중국에 맞췄다. 중국에서 들어온 주자의 가르침에 따라 돈을 버는 일은 천한 것으로 폄훼됐다. 조선은 상업과 공업을 억압하고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천시했다. 조선 팔도의 금·은광은 폐쇄됐으며 시장을 여는 것도 금지됐다. 윗사람과 나이든 사람들에게 예를 갖추는 충과 효의 가치가 극대화됐다. 여인들의 권리는 무시됐다.

성리학이 판을 치는 조선은 정신문화는 높아졌지만 나라의 살림살이나 국방력은 갈수록 허약해졌다. 일부 선비들은 학행일치의 모습을 보였으나 대부분은 학문과 행동이 어긋났다. 입으로는 청렴과 금욕을 외쳐댔지만 부패와 음행을 서슴지 않았다. 여인들은 ‘칠거지악’이라는 순종프레임에 가둬놓고 자신들은 축첩과 관기를 통해 마음껏 욕망을 발산했다.

일본은 강항선생이 전한 성리학을 토대로 학문의 세계를 넓혀 서양학문을 성공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개화(근대화)에도 성공했다. 반면에 조선은 여전히 공리공론 적 유교논리에 갇혀 있었다. 폐쇄적 학문은 세계의 변혁에도 눈을 감게 했다. 중국 대륙만을 바라보는 편향된 시각과 쇄국정책은 결국 조선을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도움말/강재원, 강대의, 안동교, 김덕진, 김희태, 백옥연

사진제공/수은 강항선생 기념사업회 정진중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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