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2장 변경의 북소리<345>

정충신이 말했다.

“내 개인 생각으로는 명나라에 군을 파병하고 싶지 않소, 우리가 7년전쟁 뒤끝을 수습하려면 외부에 신경쓸 여력이 없지요. 하지만 어버이 나라가 힘들게 되었는데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속국의 숙명이요. 명은 또 왜란 시 우리에게 군사를 보내준 나라요. 왜놈들이 물러간 것은 왜 군사의 힘이 소진된 측면도 있지만, 명나라라는 대국이 뒤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오. 전쟁이란 자고로 심리적인 측면도 작용하는 법, 일본은 뒤에 버티고 있는 중국에 늘 기가 눌려있었소. 거기다가 토요토미의 와병과 그들끼리 다시 내분이 일어나고, 때마침 우리의 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밀어붙여서 전쟁을 끝낸 것이오.”

“명군이 별로 도움이 안되었을 텐데? 스스로의 힘으로도 격퇴할 수 있었는데 공연히 신세졌소.”

“따지고 보면 명군이 조선반도에 들어와서 우리를 도왔다고 하지만 나쁜 짓을 많이 했소. 탐악질이 심하고, 민폐를 끼쳐서 백성들간에는 ‘왜군은 머리털을 내놓으라고 하지만, 명군은 머리를 내놓으라고 한다’는 원성이 자자했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님께서는 명군 때문에 왜군을 물리쳤다고 고마워하고 있소. 그런 은인의 나라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데, 의리를 중시하는 예법의 나라 조선이 외면하면 곧 자기부정이 되는 것이지요. 다이샨 패륵도 알다시피 신세진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다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요? 사적으로도 그럴진대 나라와 나라 사이의 동맹관계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다이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리를 지킨다는 것은 아름다운 품성이오. 하지만 국익을 팽개치는 의리는 쓸모짝이 없소이다. 백성들 다 죽이고 의리 지킨다면 남는 게 무엇인가. 자, 보시오. 우리는 지금 부차(富察) 골짜기와 아부달리 숲에 매복한 명군을 소탕하고, 계번(길림애) 상간애 고륵채 삼차아보 아골관을 포위해 치고, 무순 심양 요양을 삼키고, 내친 김에 사르흐로 진격하고 있소. 사르흐를 먹으면, 요하를 건너 산해관-영원성에 진을 친 다음 북경을 함락시킬 거요. 이 웅대한 계획을 막을 자는 없소. 조선이 잘못 끼어들어서 국가존망이 위태롭게 되면 어떻게 되겠소? 나와 정충신 군관과의 우정에도 금이 갈 수 있소. 국가간의 전쟁은 그런 의리도 쪽내는 거요.”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겠소.”

정충신은 후금군의 야망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누르하치와 그 자식들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썩은 고기 명나라를 집어삼키기 위해 개원과 요양을 치고, 정치, 군사적 거점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광녕을 위협하면서 요하(遼河) 이동의 광대한 만주 지배권을 확보했다.

“명은 육로가 막히니 조선의 가도로 들어가는 해로를 뚫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그들을 놔두고 있지. 모문룡이란 새파란 놈이 지도자로 나서서 바다를 지배한다고 하는데, 그자의 하는 꼬락서니가 꼭 뒷골목 패거리거든. 야비한 졸장부란 말이오. 그 자는 밀서를 보내 우리와 화친하자고 스스로 약조하고, 은 천 냥을 보내주면 대신 명을 치겠다고 하는 자요.”

“장수가 자기 군대를 친다고요?”

“그러니까 망나니지. 그런 자에게는 천 냥이 아니라 단 한푼의 엽전도 아깝지. 허접한 쓰레기일 뿐이오. 우리는 그자의 행동이 명의 조정에 흘러들어가도록 해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그러면 정리가 되지. 다만 조선 백성들이 걱정이오. 갈수록 민폐가 자심할 것이니까.”

정충신은 주변 동향을 살피고 귀국길에 올랐다. 기왕에 가는 길이니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거쳐 선사포로 들어갔다. 십여년 전 그가 첨사로 복무했던 곳이다. 바닷가 마을은 인적이 끊긴듯 황량하고, 집집마다 빈 마당은 먼지만 풀풀 날리고 있었다. 한 중늙은 여자가 지팡이에 의지한 채 기듯이 기울어진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새고, 헤진 옷을 입었다.

“아니, 가도 주막 아줌씨 아닌가요?”

찬찬히 뜯어보니 가도에서 술을 팔았던 여자였다. 그 잡에 거점을 확보하고 작전을 편 끝에 가도 산적들을 소탕한 일이 있었다.

“맞소.”

풍상을 겪은 탓인지 여자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그녀가 진물이 질척거리는 눈을 깜박이더니 되물었다.

“선사포 첨사 나리 아니시오?”

“맞습니다.”

그는 여자를 부축해 길가 마른 풀밭에 앉혔다.

“정 첨사 나리가 떠나간 후 나는 건달패 잔당들한테 죽을만치 맞아서 허리를 못쓴다우. 소탕하고 가버리니 보복을 당한 것이오. 이기려면 후환없이 확실하게 이겨야지, 어설프게 하고 떠나니 남은 사람들이 다치지요.”

“뿌리를 뽑았지요. 그런 다음 후임이 후속 관리해야 하는데 방치했군요.”

“백성을 사람으로 보나요? 지금은 젊은 모씨라는 자가 고을을 쑥밭으로 만들고 있소.”

“모씨라니요?”

“모문룡인지 모문둥인지 명군이란 자가 있소.”

과연 듣던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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