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89.수은 강항선생의 간양록과 韓·日 선양사업

420년 전 왜에 끌려간 강항, 일본의 역사를 바꾸다

왜적 소굴에서도 조선선비 꼿꼿함 지켜
일본 學僧에 조선성리학 깊은 경지 전수

日 학문 비약적 발전 근대화 촉진 토양
메이지유신과 부국강병 먼 뿌리는 강항

포로 억류지 오즈시 강항선양사업 활발
‘오즈 강항연구회’등 주관 6월에 위령제

강항기념사업회·내산서원보존회 선양정성
‘강항로드’ 관광콘텐츠 화 등 다양한 노력

■수은 강항(睡隱 姜沆)선생과 <간양록:看羊錄>

<간양록:看羊錄>은 1597년 전남 영광 논잠포(論岑浦:지금의 염산) 바다에서 왜군에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강항 선생(1567~1618)이 3년여 동안의 포로생활동안 적은 기록들을 모아둔 책이다. 간양록에는 <적중봉소(賊中封疏)>와<팔도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고부인격>,<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섭란사적(涉亂事迹)>, 제자 윤순거가 쓴 발문 등이 실려 있다.

<적중봉소>와<팔도육십육주도>,<고부인격>은 선생이 일본에서 조선조정으로 몰래 보낸 글들이다. <적중봉소>는 일종의 적정보고서(敵情報告書)이다.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일본 내부의 사정과 왜 장수들에 대한 인적사항 등이 담겨 있다. <팔도육십육주도>는 일본 지도이다. 일본의 지리와 풍물들이 적혀있다. <고부인격>은 당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조선인들을 위무하기 위해 쓴 글이다.

<예승정원계사> 표지

<예승정원계사>와 <섭란사적(涉亂事迹)>은 조선으로 귀국한 뒤 쓴 글이다. <예승정원계사>는 강상선생이 귀국 후 승정원에 올린 글이다. 선조를 만나 피랍 및 귀국 전후의 사정을 알린 것을 포함해 일본에서의 생활, 일본의 사정 등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섭란사적>은 적국에서의 환란생활에 대해 적은 것이다. 선생은 3년 만에 풀려나 귀국했으나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후학을 가르치다가 1618년 52세로 세상을 떴다.

■간양록의 원래 이름은 건거록

<간양록:看羊錄>의 원래 책이름은<건거록:巾車錄>이다. ‘건거’는 ‘죄인을 태우는 수레’라는 뜻이다. 적군에 사로잡혀 끌려가 생명을 부지한 강항 선생이 포로였던 자신을 스스로 죄인으로 생각하고 지은 것이다. ‘건거’를 ‘간양’으로 고쳐 쓴 이는 강항 선생의 수제자인 윤순거(尹舜擧1596-1668) 선생이다.

‘간양’(看羊)은 ‘양치는 일’을 뜻한다. 중국 한나라 사신인 소무(蘇武)는 흉노에 붙잡혀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금의 바이칼호수 근처에서 양치기 노릇을 했다. 그러던 중 기러기의 발에 편지를 매달아 날린 것이 한나라 수도에서 발견돼 기적적으로 고향에 돌아오게 됐다. 간양이라는 말은 이 고사(古事)에서 비롯된 것이다. 윤순거 선생은 스승의 처지를 서무에 빗대 <건거록>을 <간양록>이라 했다.

<간양록>은 3가지 번역본이 있다. 전남대 이을호 박사가 번역한 간양록(서해문집, 2005년 발간), 북한 학자 김찬순이 옮긴 간양록(보리, 2006년 발간), 그리고 한국고전번역원 인터넷 사이트 <한국고전종합 D/B> 해행총재에 있는 간양록 번역 글(신호열, 1974년)이다. <간양록>은 내용면에 있어서는 ‘포로생활 실기문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적국 일본의 내정실상과 지리, 적장들의 됨됨이에 대한 분석과 이를 기반으로 한 대책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완벽한 ‘적국종합정세보고서’라 할 수 있다.

일본에 대한 정확한 정보 없이 임진·정유재란을 맞았던 조선조정은 강항의 <적중봉소>를 통해 뒤늦게나마 일본 조정과 군사동향에 대한 정보를 가질 수 있게 됐다. 강항선생은 적국 일본에서 모두 3차례 적정보고서랄 수 있는 적중봉소를 조선에 은밀히 보냈다. 조선조정에 전달된 것은 명나라 사신 왕건공을 통해 보낸 것이다.

■강항선생의 일본 포로생활
 

강항선생이 탈출하다 붙잡힌 우와지마성.

강항선생이 왜군에 붙잡힌 때는 명량해전(1597년 9월 16일) 뒤끝인 1597년 9월 23일이었다. 남원 성을 함락(1597년 8월 16일)시킨 왜군 육상부대는 전라도를 장악하고 살육전을 벌였다. 왜군이 영광에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자 강항선생은 9월 15일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빠져나갔다. 강항선생 일행은 16일에 괴머리에서 쉬었고, 17일에는 비로초에서 지냈다.

16일 벌어진 명량해전에서 왜 수군은 참패를 당했다. 133척의 배가 침몰하거나 크게 부서졌다. 수백 명의 왜 수군들이 명량바다에 수장됐다. 왜 수군은 전열을 재정비해 명량으로 다시 몰려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 같은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명량해전 직후 곧바로 조선수군을 이끌고 작전상 후퇴를 했다. 왜 수군의 추격을 피해 영광 앞바다를 거쳐 군산 선유도 바다까지 조선수군을 후퇴시켰다.

강항선생 일가가 영광 앞바다에 배를 타고 어디로 피신해야 할지 우왕좌왕하고 있었던 날들은 명량해전의 참패에 치를 떨면서 왜 수군이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돼 있을 때였다. 육지에서는 왜 육상군들이 살육과 노략질로 조선 산하를 생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영광바다를 통과해 군산 쪽으로 빠지던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 영광지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영광 칠산도 바다를 건너 저녁에 영광 법성포에 이르렀더니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들어와 마을과 창고를 불 질렀다’

왜 수군이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을 찾으러 온 바다를 뒤지고 다닐 때 강항 선생 가족을 비롯한 영광주민들이 탄 100여척의 배는 영광 앞바다에서 머물고 있었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길이 없어 피란민들은 바다위에서 우왕좌왕했다. 20일에는 “왜선 천여 척이 이미 우수영을 장악했다. 이순신 수군통제사는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강항 집안의 어른들이 의논을 했다. 어떤 이는 육지로 올라가자고 했고 다른 이는 흑산도로 피하자고 했다. 강항선생은 종형 홍(洪)·협(浹)과 상의 끝에 “배 안에 있는 장정이 40여 명에 달하니 통제사에게 가서 왜군과 싸우자”고 하여 결정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뱃사공이 21일 밤중에 자기 가족들이 있는 신안 어의도로 뱃머리를 돌리는 바람에 부친이 탄 배와 떨어지고 말았다.

22일 강항선생 일행은 부친이 탄 배가 영광군 염소(鹽所:지금의 영광군 염산면)로 향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쪽으로 향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23일 아침에 강항 선생 일행은 부친을 찾기 위해 논잠포로 향했다. 그런데 안개 속에서 왜적선 한척이 나타났다. 강항 선생과 가솔들은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바닷물이 너무 얕아서 왜군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모두 배 위로 끌어올려졌다.

강항 선생과 가솔들을 붙잡은 왜 수군들은 울고 보채는 어린 아이들을 그대로 바다에 던져 죽였다. 이때 강항 선생의 어린 아들 용(龍)과 첩이 낳은 딸 애생(愛生)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강항선생은 이때의 심정을 간양록에 이렇게 적었다.

‘용과 애생의 죽음이 너무나 애달프다. 모래사장에 밀려 물결 따라 까막까막하다가 그대로 바다 깊숙이 떠내려가고 말았다. 엄마야, 엄마야 하고 부르던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나이 30세에 비로소 얻은 아이다. 이 아이를 가졌을 때다. 어린 용이 물 위에 뜬 꿈을 꾸었다. 그래서 이름을 용이라 지었는데, 이 아이가 물에 빠져 죽으리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강항선생과 가족을 붙잡아 일본으로 끌고간 왜군 장수는 노부시치로(信七郞)였다. 노부시치로는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1556~1630)의 부하로 다카토라는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 당시 일본 수군 총대장이었다. 다카토라는 강항선생과 가족들을 그의 영지(領地)인 오쓰성(大津城)으로 끌고갔다. 오쓰성은 현재의 에이메현 오즈시(大洲市)다.

오쓰의 영주인 도도 다카토라는 강항이 학문이 깊은 선비임을 곧 알아챘다. 그래서 강항을 후대했다. 강항선생은 학자로서의 대우를 받으며 10개월 간 오쓰성에서 생활했다. 오쓰성에서 생활할 당시 강항 선생의 심경은 매우 참담했다. 그리고 이때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간양록에 남겨진 글과 시에는 당시 강항선생의 처해 있던 안타까운 처지와 상황이 담겨 있다. 강항 선생의 처지를 엿보면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강항선생이 처해있던 상황임)

(오즈성에 끌려온 강항은 1597년 12월 22일 동지(冬至)를 맞았다. 울적한 마음을 다음과 같은 시로 남겼다)

今年流落丹心在 (금년에는 일편단심 눈물 흘리네)

一日愁隨一線長(오늘은 솟구치는 수심만 가슴속에 어리누나)

(1598년 무술년이 됐다. 그런데 강항 일가는 1598년 1월 5일에 조카딸 예원이 병을 앓다 죽었다. 며칠 뒤 9일에는 중형의 아들 가희도 숨졌다. 강항 형제의 여섯 자녀 중 세 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고, 두 명은 일본에서 죽었다. 작은 딸 하나만 남았다. 강항은 한유의 시를 떠 올렸다)

너에게 무슨 허물 있으랴/모두가 내 죄여라.

난간에 기대어/백년을 울어도 못 풀 한이어라.

(4월 27일은 돌아가신 어머니 기일(忌日)이었다. 강항 일가는 차마 그저 넘길 수가 없어서 가진 물건을 팔아서 제수를 장만해 제사를 지냈다.)

(4월 그믐에, 서울 대밭 거리에서 살던 사람이 임진년(1592년)에 왜군에 잡혀와 왜의 서울에 있다가 이예주(伊豫州)로 도망쳐 왔다. 그는 일본 말을 잘했다. 강항이 도망가자고 설득해 함께 탈출을 감행했다.)

우와지마(이바타시 전경).

(1598년 5월 25일 밤을 틈타 탈출했다. 강항은 조선이 있는 서쪽방향으로 사흘을 갔다. 이바타시(우와지마) 바닷가 대밭 속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60세 돼 보이는 왜승(倭僧)과 맞닥뜨렸다. 강항은 그간의 사정을 말하고 도와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더니 왜승은 배를 태워주겠다고 허락했다. 강항 선생은 왜승을 따라갔는데 열 걸음도 되지 않아 도도 다카토라의 병사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왜병들은 강항을 다시 오쓰성으로 끌고 가 삼엄하게 감시했다.)

오쓰성에 있는 출석사. 강항선생이 왜승들과 교유를 나눈 절이다.

강항 선생은 오쓰성에서 금산 출석사(金山 出石寺)의 중들과 교유(交遊)하며 비교적 자유롭게 보냈다. 필담으로 한시를 나누며 학문을 논했다. 1598년 6월이 되자 도도 다카토라는 조선에서 돌아와 강항 일가를 오사카로 데려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강항선생은 1598년 9월에 오사카(大阪)을 경유해 후시미(伏見)로 이송됐다. 후시미는 당시 일본의 서울이었다. 강항선생은 후시미에서 성주(城主) 아까마스 히로미치(赤松廣道), 해운왕(海運王) 요시다 소안(吉田素庵) 등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

이때 학승(學僧) 순수좌(舜首座:후에 후지하라 세이카:藤原惺窩로 개명)를 만난다. 후지하라 세이카는 적군의 공격으로 가족이 몰살당하자 숙부가 주지로 있는 교토 상국사(相國寺)로 피신해와 이곳에서 선승(禪僧)이 됐다. 순수좌는 사찰에서 주지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말한다. 강항선생과 후지하라 세이카의 만남은 일본이 성리학의 대가 강항을 만나 학문융성의 계기를 맞는 순간이었다.

오즈시에 있는 강항선생비.

강항 선생은 후시미성에서 일본 학자들에게 조선성리학을 전하며 지냈다. 강항 선생은 그동안 수시로 왜국의 사정을 조선조정에 전하는 한편 조선으로 돌아갈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1600년 2월 6일 도도 다카토라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름을 받고 후시미성에 왔다. 강항은 일본어를 잘 아는 대구출신 선비 김경행에 부탁해 귀국을 요청하는 글을 다카토라에게 보냈다. 왜승 경안(慶安)도 다카토라에게 강항의 귀국을 거듭 부탁했다.

다카토라는 숙고 끝에 강항 선생의 귀국을 허락했다. 강항 선생과 일가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배 한척과 식량을 준비했다. 그리고 후지하라 세이카와 아까마스 히로미치를 만나 귀국 편의를 부탁했다. 히로미치는 통행증과 뱃길에 익숙한 사공을 알선해 주었다. 1600년 4월 2일, 마침내 강항 일가 등 38명은 후시미성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이들은 대마도를 거쳐 5월 19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후지하라 세이카 문집(文集)

■일본에서의 강항선생에 대한 인식

강항선생은 일본에 억류돼 있는 동안 <강항휘초>등 주자학과 관련된 책 22권(16종)을 필사해 남겼다. 이 책들은 모두 강항선생이 외우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내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들은 지금 모두 일본 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에 수장돼 있다.

강항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 작업은 한국에서보다는 일본에서 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인들은 강항이 전수한 성리학의 진수는 일본 성리학의 깊이와 경지를 더욱 깊고 넓게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학문의 다양성과 자연현상에 대한 사유와 분석력은 후에 난학(蘭學)이라 불리는 서양학문이 쉽게 일본에 뿌리내리도록 했다.

후자하라 세이카 등 일본 성리학자와 그 제자들은 서양학문의 개념들을 동양적인 개념으로 환치(換置)한 뒤 실용적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학문적 토양은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는 사상적 배경이 됐고 결국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게 됐다. 따라서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 근대화 성공의 먼 뿌리를 강항선생에게서 찾고 있다.

다시 말해 강항선생은 일본 유교의 비조(鼻祖)가 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시대에 일본을 무(武)중심사회에서 문(文)중심의 사회로 변화하게 한 학문의 원천이었다. 강항 선생의 영향으로 일본 근대화를 꽃피우게 한 일본 학자들이 자리할 수 있었다. 강항선생이 억류생활을 했던 오쓰성에 1990년 ‘홍유강항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세워지고 일본인들이 강항선생을 기리고 있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강항선생의 고향인 영광군과 선생이 머물렀던 일본 오쓰시는 지난 2001년부터 교류를 갖고 있다. 전 오즈시청의 공무원이었던 무라카미 쓰네오씨는 우연한 기회에 수은강항선생에 대한 자료를 접하고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퇴직 후에는 강항선생 연구에 매달렸다. 무라카미 쓰네오씨는 재일교포 신기수 선생 등의 도움을 받아 강항연구를 위해 영광을 수차례 방문했다. 또 수은강항선생 국제학술세미나와 관련된 행사에도 여러 번 참석했다. 무라카미 쓰네오씨는 오즈시 강항연구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오즈시 초등학교 사회과목 부교재에는 ‘조선 선비 강항’에 관한 내용이 수록돼 있다. ‘강항선생이 31살 때 포로로 오쓰성에 압송되어 왔으며, 그때 유교를 가르쳐 일본 유교의 근본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오즈시에는 50명의 회원이 참가하고 있는 ‘강항 연구회’ 도 있다. 무라카미 쓰네오씨를 비롯한 강항연구회 회원들은 강항 선생 관련 책자를 발간하는 한편 선생의 발길이 닿은 곳을 답사하며 선생의 뜻을 기리고 있다.

이들 회원들의 활동 덕분에 강항이 일본에 처음 도착한 나가하마(長浜) 해안에서 오쓰성까지에는 강항선생과 관련된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고 그 나무 안내판에는 강항선생이 쓴 한시(漢詩)도 새겨져 있다. 주민들은 강항선생과의 인연 때문에 오즈시가 일본유교를 융성케 한 도시가 됐다는 사실을 매우 의미 깊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강항선생의 높은 학문과 의로움을 기리는 한일민간인들의 마음이 합해져 2019년 오즈시에서 강항선생위령제가 열리게 된 것이다.

강항선생의 존재는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1980년 9월 1일자 신문에 문화면에 ‘한·일을 이은 유자(儒者) 강항(姜沆)의 유적을 찾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고 이후 NHK 텔레비전이 1989년 2월 23일 45분짜리 ‘유자(儒者) 강항과 일본’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면서 일본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렇지만 일본 학계 일부는 조선 성리학이 포로 강항이 아닌 조선 성리학의 거두인 퇴계 이황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후지하라 세이카의 제자이자 일본 성리학의 대가인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은 극우보수학자였다. 그는 성리학을 포로 신분인 강항에게 배웠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일본이 퇴계의 학풍을 받아들여 일본성리학을 발전시켰다는 논리를 펼쳤다.

하야시 라잔은 교토에 있는 ‘코 무덤’의 이름인 비총(鼻塚)이 “너무도 야만스럽다”며 귀무덤(耳塚:이총)이라 부르자고 앞장선 사람이기도 하다. 조선 사람들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왜군 장수들의 만행이 훗날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을 우려해 귀 무덤으로 윤색한 것이다.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비튼 그들의 역사왜곡은 400여 년 전 하야시 라잔이라는 학자에 의해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한국에서의 강항선생에 대한 인식

한국에서는 1980년에 MBC TV 드라마 ‘간양록’이 방영되면서 강항선생이 조명을 받는 계기가 됐다. 간양록의 노래 가사와 극본은 역사드라마작가 신봉승(1933∼2016)이 지었다. 노래는 조용필이 불렀다. 가사는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의 한을 절절히 담았고, 그 한과 설움, 비통함을 조용필이 애절한 목소리로 너무도 잘 토해냈다.

‘간양록’의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어야 어야~ 어야 어야 어야~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님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간양록 노랫말은 왜군과 싸우다 포로로 일본에 끌려온 전라좌병영 우후(虞侯) 이엽(李曄)이 남긴 시를 뼈대로 하고 있다. 강항 선생은 이엽이 탈출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엽이 죽기 전에 쓴 시를 간양록에 적었다. 신봉승 작가는 이런 내용을 참고해 노랫말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쉬운 것은 우리 국민들이 노래 ‘간양록’은 잘 알고 있지만 정작 강항선생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강항선생을 국내외에 알리는데 정성을 쏟고 있는 사람들은 지난 2014년 설립된 강항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 회원들이다. 강항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강대욱씨, 사무국장 강대의씨 등이 선양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영광내산서원보존회는 서원 활성화를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 2017년부터 문화재청 향교서원문화재활용사업으로 자유학기제와 연계한 선비문화와 선비사상 체험학습을 실시하고 있다. 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강좌 및 유교경서교실 운영, 찾아가는 퓨전국악공연을 펼쳤다. 앞서 밝힌 대로 수은강항기념사업회와 함께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s는등 강항 선생의 현창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강재원 회장과 강대의 사무국장은 “강항 선생은 조선성리학의 깊이를 후세와 내외국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인 동시에 한국에서 일본까지의 강항로드는 임진·정유재란의 아픔과 해외문화교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관광콘텐츠인 만큼 이를 적극 개발해 많은 이들이 탐방에 나설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보이고 있다.

기념사업회가 출범하기 전 내산서원보존회는 영광군과 영광군청년회의소, 영광문화원, 전남도, 한국유교대학총연합회등의 지원·후원을 받아 지난 ‘수은강항 문화유산 한일심포지엄’과 ‘강항문화제’‘수은 강항 선생학술발표회’등을 치러왔다. 지난 2018년에는 영광내산서원보존회(회장 강재원)와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 공동으로 ‘문화재지킴이기본교육 및 국제학술세미나’를 가졌다.

강대의씨 등 강항로드 1차 탐사대가 일본현지에서 강항선생 유적지를 살펴보고 있다.

특히 2018년에는 ‘강항민간외교관클럽’을 결성에 나서는 한편 2019년 일본탐방을 위한 각종 준비를 치밀하게 추진했다. ‘강항민간외교관클럽’은 회원들이 ‘강항로드’를 돌며 강항선생의 자취를 더듬기 위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강항로드는 강항선생이 포로로 끌려간 루트대로 영광 서포(논잠포)~이키섬~사가현~시모노세키~오쓰시, 에이메현~시코구~오오사카를 들리는 대장정이다. 강항로드는 광주 조이투어 최금환 사장이 현지방문을 통해 정리한 답사코스다.

‘강항민간외교관클럽’ 발족 이전에 강항선생 유적 탐방대는 2019년 6월 18일부터 21일까지 4일 동안 일본 현지에서 강항선생의 자취를 살펴볼 계획에 있다. 유적지 탐방에는 영광내산서원보존회와 기념사업회 회원들은 물론이고 김희태 전 전남도문화재전문위원, 언론계 인사 등 20여명이 대거 참가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강대의 사무국장은 지난 5월 22일 5일간의 일정으로 사전답사 성격의 일본 1차 탐방을 다녀오기도 했다.

수은 강항선생 1차탐사단과 일본 피스인에히메현 관계자들과의 만남.

6월에 일본 현지를 방문하는 강항선생 유적탐방대원들은 오사카와 교토, 오즈시 등을 돌아본다. 2019년 6월 19일에 교토 류코쿠대학교에서 개최되는 강항선생 국제학술 세미나에 참석한 뒤 21일 귀국할 예정이다. 6월 8일 오즈시에서 열리는 강항선생 위령제는 수은강항선생일본연구회가 주최·주관하고 ‘(사)Peace Love in 에이메’가 협찬하다. 후원은 (사)한국유교대학총연합회·(사)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영광내산서원보존회 등이 맡는다.

■강항선생 유적

○내산서원(內山書院)

내산서원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28호로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 있다. 수은 강항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으로 조선 인조 13년(1635) 순룡리에 용계사(龍溪祠)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숙종 28년(1702)에 중수됐다. 1682년(숙종 8)에는 강항 선생의 수제자였던 윤순거(尹舜擧)(1596-1668)선생을 추가로 배향했다. 대원군 때 훼철됐다. 용계사 액판(額板)의 휘호(揮毫)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6·25전쟁 중에 소실됐다. 1974년 불갑면 쌍운리 내산으로 옮겨 복원하면서 내산서원(內山書院)이라 고쳐 불렀다.

내산서 장서각에는<강감회요>(綱鑑會要)목판과<수은집>, <운제록>, <문선>, <간양>(看羊錄)의 필사본 및<수은 선생 유묵>이 보관돼 있다. <강감회요> 목판본은 1702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항 선생이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과 <통감강목>등을 읽고 내용을 보완해 정리한 역사서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됐다. 한때 도난당했으나 지난 2006년 경찰에 의해 회수돼 장서각에 다시 보관됐다.

안타까운 점은 강항선생과 관련된 수많은 자료가 일제강점기에 일본경찰에 의해 불태워져버렸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영광의 일본인 경찰서장은 일본을 증오하는 <간양록>의 내용에 섬뜩함을 느끼고 강항선생이 남긴 책과 자료 등을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일제의 포로가 돼 치욕의 세월을 보냈던 강항선생이 또 한 번 일제강점기에 수모를 당한 것이다. 모두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우리의 잘못 때문이다.

현재 서원내의 건물로는 경내(境內) 전면에 사우(용계사)와 강당(내산서원), 내·외삼문(內·外三門)이 있다. 서원 좌측으로 경장각(敬藏閣)이 자리하고 있다. 서원 주변 산기슭에는 강씨 문중의 묘역이 있다. 이곳에는 강항선생과 그의 두 아내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첫 아내가 죽은 후 맞아들인 두 번째 아내 함평 이씨는 강항이 세상을 떠나자 음식을 먹지 않고 자진하여 뒤를 따랐다. 내산서원 입구의 정려문(咸平李氏烈女閣)은 함평 이씨 부인에게 내려진 것이다.

○장절각

구례 장절각

전남 구례군 구례읍 봉서리 1369(봉서길 37)에 있는 강항선생의 정려각이다. 1882년(고종19)에 조정으로부터 명정을 받아 1886년 봉서교 옆에 장절비를 세웠다. 이후 국도확장 공사로 인해 현재의 위치로 이설됐다. 장절각 상단에는 평소 수은 강항 선생이 즐겨 보았던 송학(松鶴)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구례군지정 문화재 5호로 지정된 뒤 단장과 채색이 더해지면서 송학그림이 지워져 버렸다.

구례 장절각비

○맹자비(孟子碑)

강항 선생이 신동(神童)임을 알려주는 비다. 강항선생이 일곱 살 되던 해, 서당에 가는 길에 느티나무 아래서 책장수를 만났다. 어린 강항이 책장수에게 책을 보여 달라고 졸랐다. 이에 책장수는 7권으로 된 ‘맹자’ 한 질을 내주었다. 책을 다 읽은 강항은 책장수에게 책을 건네주었다. 책을 사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더니 강항이 다 외워버려서 살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책장수는 반신반의하며 질문을 던졌으나 강항은 거침이 없이 척척 대답을 했다. 예전에는 수재를 만나면 돈을 받지 않고 책을 주는 관례가 있었다. 책장수는 강항에게 책을 주려 했으나 강항은 다른 사람에게 팔라고 하면서 그냥 가버렸다. 책장사는 길가 느티나무에 책을 매달아 놓고 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느티나무를 맹자수(孟子樹)라 불렀고 그 옆 정자를 맹자정(孟子亭)이라고 했다. 맹자수와 맹자정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맹자비가 세워져 있다.

도움말/강재원, 강대의

사진제공/수은 강항선생 기념사업회 강대의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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