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90. 왜군 학살로 진원현(장성)에 사람 씨가 마르다

임진·정유왜란 당시 전라도에는 진원현(珍原縣)이 있었다. 지금의 장성군 지역에 있었던 현이다. 진원현은 장성현과 맞닿아있었다. 그런데 정유재란이 끝난 뒤 진원현에서는 사람보기가 힘들었다. 왜군이 모두 죽였기 때문이다. 당시 진원현의 백성 수는 5천명에서 7천명 사이로 추정된다. 그런데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진원과 영광에서 잘라간 사람의 코는 1만40개 이상이었다. 진원과 영광 사람 대부분을 죽인 것이다. 왜란이 끝난 후 조선조정은 사람이 없는 진원현을 없애 장성현에 합칠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는 유일하게 벌어졌던 ‘고을폐지’였다.

왜란 끝난 후 사람 씨가 말라버린 진원(현재의 장성)
전라도침공 왜군 진원·장성·영광 등지에서 대학살
왜군 진원·영광에서만 1만40여개 코 잘라 가져가
장성현과 맞닿아있던 진원현은 사람자취 사라져
조선 조정, 사람 없는 진원 폐지 후 장성현에 합쳐
진원 학살 지휘관은 사쓰마 기반 시마즈 요시히로
사쓰마는 현재 가고시마, 일제 征韓論者들 중심지
 

<1872년 지방지도>중 장성 지도(서울대 규장각). 장성은 1895년 관제개혁에 의해 전주부 장성군이 됐다가 1896년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고쳐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영광군 삼북면·내동면·현내면을 합해 삼계면으로, 삼남면·외서면을 합해 삼서면으로, 외동면과 함평군 대화면을 합해 동화면으로 해 장성군에 편입시켰다. 이때 갑향면은 담양군으로 이관됐다. 통일신라 때 진원현이 설치됐으나 정유재란 후 장성현에 합쳐졌다. 지금은 진원면이라는 이름에 진원현의 흔적이 남아있다.
시마즈 요시히로(쇼코슈세이칸 소장위키피디아)
진원면사무소 앞에 있는 천년고읍진원비석(위현동씨블로그캡쳐)
진원면 일대 1990년대 모습. 과거에 진원현이 있던 곳이나 정유재란 당시 현 사람들이 대부분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장성현과 합쳐졌다.
삿초동맹 장면. 앙숙이었던 사쓰마(가고시마)와 조슈(야마구치)세력은 에도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손을 잡고 마침내 메이지유신 시대를 연다. 메이지유신세력과 태평양 전범 세력 상당수는 삿초동맹 세력이다. 가고시마와 야마구치는 조선침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정유년, 진원현의 비극
전남 장성에는 진원면(珍原面)이 있다. 이 진원면은 임진·정유재란 당시만 하더라도 어엿한 현(珍原縣)이었다. 정유재란 당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 도저히 자체적으로 존립이 불가능하기에 인근 장성현과 합해져 버렸다. 조선조정은 진원현에서 사람보기가 힘들어지자 장성현과 진원현을 합쳐 장성현이라하고 치소를 영천리로 옮겼다. 선조33년(1600)의 일이다. 조선에서는 유일한 일이었다. 진원현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대목이다.

임진왜란 발발 한 해(1591년)전, 조선의 인구는 대략 700만 명 내외였다. 이수건(李樹健)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건국 초에는 약 550만, 세종 말에서 성종 초까지 기간의 인구는 600만~700만 내외로 추정된다. 이수건은 태종 4년과 6년의 전국적 규모의 호구조사와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전국 호구조사 자료를 기반으로 해 이 같은 인구를 추계했다.

임진년(1592년), 왜군의 조선침략으로 수많은 조선관군과 의병·백성들이 죽었기에 정유년 재침 때는 조선인구가 더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00~600만 사이로 볼 수 있다.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가장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한 곳은 정유재란 최대의 전투가 벌어졌던 남원이었다. 전략요충지인 장성과 명량대첩이 벌어졌던 진도·해남 일대에서도 희생자 수가 많았다. 정유재란 직후 해남인구의 삼분의 일이 줄어들 정도였다.

남원에서는 관군과 의병, 백성 1만여 명이 왜군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목숨을 잃었다. 노령산맥을 넘어 장성과 영광, 나주 쪽으로 진격하려는 왜군을 입암·진원산성에서 막아내려 했기에 장성의 피해도 컸다. 입암산성 중수책임을 맡았던 윤진(尹軫)은 불과 몇 백의 군사를 이끌고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1만 대군을 맞아 분전했지만 순절했다. 윤진의 아내 권씨도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은장도를 꺼내 자결했다.

칠천량(漆川梁) 해전 대승 이후 왜 수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임진년 조선침략 때는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에 연패를 당하면서 감히 전라도 바다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수군을 궤멸한 뒤로는 바다고 육지고 왜군들 천지가 돼버렸다. 이 와중에 발생한 것이 명량대첩이다. 명량해전에서 패한 왜군이 분풀이를 진도·해남·강진에서 하는 바람에 그곳 사람들의 피해도 막심했다. 왜군은 명량해전 직후 이순신 장군이 군산 바다로 작전상 후퇴함에 따라 그를 잡을 수 없자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살육했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조선·명나라 군사와 백성들의 코를 베어 일본으로 보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과물(戰果物) 확인을 위해 살상한 조선과 명나라(朝明)군사들의 코를 보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교토 코 무덤에 매장돼 있는 코는 최소 5만개 이상(최대 12만개로 추정)이다. 이중 왜군들이 진원을 비롯 장성·영광·금구·김제 등 전라도에서 수집해 보낸 코는 2만개가 넘는다.

왜군 장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낸 코 발송장(發送狀)을 보면 진원현 사람들에게서 잘라낸 코 870개가 1597년 9월 21일 일본에 도착했다. 또 그 뒤에 왜군들이 진원(현 장성읍을 비롯 진원·남·황룡·동화·삼계·삼서지역)과 영광에서 취한 코 1만40개가 일본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영광 일부는 당시 진원현에 속했던 만큼 진원과 장성·영광 일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를 헤아릴 수 있다.

당시 진원현의 백성 수가 몇 명 정도였는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하면 진원현의 백성 수는 5천명에서 7천명 사이로 추정된다. 이 경우 진원현 백성 거의 대부분이 왜군의 칼에 죽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진원과 영광에서 취해진 1만40개라는 코의 수는 진원과 영광사람들이 대부분 몰살당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정유재란 이후 진원현에서 사람 자취가 사라지자 어쩔 수 없이 진원과 장성이 합쳐진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을 감안할 때 일본 교토 코 무덤에 묻혀있는 코의 주인들은 대부분 진원(장성)과 영광, 해남·진도·강진, 구례·남원 사람들로 추정된다. 코 무덤은 교토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쿠오카현 카시이, 오카야마현의 비제시(備前市)와 쯔야마시(津山市), 가고시마성 부근에도 코 무덤이 있다. 왜군이 조선에서 코를 베어간 것은 정유재란 때이고, 정유재란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곳은 전라도니, 일본 코무덤의 주인공은 대부분 전라도사람이라 여겨도 무방하다. 참혹한 역사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진원·영광 일대에서 조선관군과 백성들을 무차별 학살한 왜군은 4번대에 소속된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사들이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관군과 의병을 무참하게 섬멸한 악명 높은 왜장이었다. 시마즈(島津) 가(家)는 일본 미나미 큐슈(南九州)의 3개국을 메이지 시대까지 지배했던 무사의 집안이다.

임진왜란 초기, 시마즈는 사쓰마(薩摩) 왜군을 이끌고 강원도로 진군했다. 그렇지만 평양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 크게 패하면서 왜군은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왜군은 전라도 순천에서 경상도 울산에 이르는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고 방어진을 구축한 뒤 장기전에 들어갔다. 이때 시마즈 요시히로는 거제도 지역에 들어와 성을 쌓았다.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가 쌓은 성이 바로 현재의 경남 거제시 구영마을 뒷산에 있는 영등포왜성(永登浦倭城:당도성 혹은 영도왜성)이다. 시마즈 요시히로 군사들은 부산 가덕왜성(加德倭城)과 영등포 왜성 등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때 시마즈 요시히로가 지휘하던 사쓰마 왜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해 도주하던 조선수군 400명을 모두 죽였다.

조선수군은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됐다. 바다를 장악한 왜군은 섬진강으로 전선을 몰고 와 시마즈 요시히로가 지휘하는 사쓰마 군 등 육상군을 투입시켰다. 사쓰마 왜군은 섬진강을 따라 올라가서 구례와 남원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석주관 의병을 몰살시킨 왜군 주력부대 역시 사쓰마 군이었다.

전주를 점령한 왜군은 의병들의 반격이 거세지자 일단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전북 부안에 진을 쳤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장성과 영광을 거쳐 남하했다. 진원과 장성에서 대 학살극을 벌인 것은 이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해남과 강진까지 진출했다.

왜군의 조선사람 코 베기는 정유재란 때인 1597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일본에 남아있는 ‘코 영수증’을 보면 왜군들의 코 베기는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을 함락한 뒤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또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뒤 그 분풀이를 진도, 해남 지역 조선백성들에게 하는 과정에서 많은 코를 베어갔다.

전라도 지역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부대의 코 베기 루트는 남원성-전주성-부안-영광·장성(진원)-나주-강진-해남·진도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왜군들은 조선에서 자른 코를 소금에 절여 자루나 통발에 넣어 일본으로 보냈다. 히데요시 휘하의 검수관들은 그 수를 헤아려 영수증을 발급했고 논공행상의 근거로 삼았다.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을 계기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육지에서는 조명연합군이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바다를 통한 병참지원이 불가능해지자 왜군은 더 이상 북쪽으로 진격할 수가 없었다. 충청도 직산과 보은까지 진출했던 왜군은 남해안으로 총퇴각했다.

시마즈 요시히로 역시 조명연합군과 의병들의 공격을 받으며 경상도 사천으로 후퇴했다. 사천왜성(泗川倭城)과 경남 진주 망진산(望晋山)에 망진왜성을 쌓고 기약 없는 방어전에 들어갔다. 1598년 봄에 벌어진 사천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7천 명의 병력으로 조명 연합군 4만 군사를 격파하기도 했다.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왜군은 전면 철병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퇴로를 막고 있었다. 순천왜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명나라 수군 도독인 진린(陳璘)에게 뇌물을 써가며 퇴로를 열어달라고 애걸했지만 이순신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사천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의 수군과 고성의 타찌바나 토우도라 등 여러 왜장들이 지휘하는 500여척의 왜 적선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기 위해 광양바다와 남해바다(노량바다)에 몰려들었다. 함대는 순천에서 퇴로가 차단돼 고전하던 고니시 군단을 구출하기 위해 남해도 왜성에 집결한 후, 광양만과 노량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노량에서 조명연합수군과 왜 수군 사이에 대해전이 벌어졌다. 조명연합군은 대승을 거두지만 노량해전에서 조선은 영웅을 잃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이 왜병이 쏜 총탄에 맞아 순절한 것이다. 어쩌면 이순신 장군을 쓰러뜨린 이 총탄은 왜군의 주력부대였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지휘하던 사쓰마 병사가 쏜 것인지도 모른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남원성 함락 당시 심당길 등 도공(陶工) 80명을 일본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이외에도 많은 장인(匠人)들을 데려갔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전라도에서 데려간 장인들의 기술은 사쓰마의 산업발전에 대단한 기여를 했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지휘하던 사쓰마 왜군의 후예들은 서구의 문명과 기술을 재빨리 받아들였다.

그리고 가고시마에는 대포제작소, 용광로를 갖춘 제철소, 방직공장 등 근대산업시설이 들어섰다. 산업화와 함께 인재들을 키워낸 가고시마는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의 본부가 됐다. 이들은 목소리를 높여 조선침략을 주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래저래 가고시마는 한반도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백제인이 바다를 건너와 선진문화를 전달했다. 임진·정유재란 때는 조선에서 끌고 온 도공들이 이곳에서 찬란한 일본 도자기 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조선의 징병자들이 가고시마 항공학교에서 가미카제(神風)자살특공대 훈련을 받기도 했다. 일본 근대화와 제국주의의 산실인 가고시마는 임진·정유년의 조선침략에서 비롯된 여러 악연들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켜켜이 쌓여있는 곳이다.

그런 악연 중의 하나가 진원백성들을 몰살시킨 시마즈 요시히로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을 괴멸시킨 왜장이기도 하다. 원균이 그의 부하들에게 목숨을 잃었고 이순신 장군 또한 시미즈 요시히로가 이끌던 왜 원군과 전투 중에 전사했다. 사쓰마의 후예들은 조선침략의 선봉장이었다.

극우 행보를 일삼고 있는 아베신조 일본 총리의 등장이 가능했던 것은 야마구치(長州:조슈)와 가고시마(薩摩:사쓰마)의 삿초 동맹(薩長同盟)에 먼 뿌리가 있다. 삿초동맹은 앙숙이었던 사쓰마와 조슈세력이 새로운 시대(메이지유신)를 열고자 에도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손을 잡은 극적인 사건이다.

메이지유신세력과 태평양 전범 세력 상당수는 삿초동맹 세력이다. 아베신조 총리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조슈 번 세력의 후손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사쓰마 번 세력의 후손이다. 가고시마와 야마구치는 조선침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들이다.

도움말/이수건, 김세권, 정만진, 강대익
사진제공/장성군청, 위현동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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