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2장 변경의 북소리<353>

“전하, 전하께옵서 세자 저하 시절 백사 대감께서 전하의 왕좌를 지켜야 한다고 온갖 모함을 무릅쓰고 앞장 서신 일을 아시나이까.”

정충신이 광해의 앞에 엎드려 간절하게 진언했다.

“알고 있다.”

“백사 대감께서는 일찍이 전하의 총명과 놀라운 지혜를 보시고, 성군이 되실 것을 확신하시었나이다. 전하의 등극을 위해 발분하신 것은, 전하를 위해서라기보다 나라의 태평성대를 위한 일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지금 마마께옵서는 예전의 총명과 지혜가 무너지는 듯하다는 아쉬운 통탄이 나오고 있나이다. 소신 역시 마음이 무겁사옵니다.”

상당히 당돌한 발언이었다. 왕의 심기를 건드린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정충신은 스승이 매서운 북풍 몰아치는 북청 유배형을 받았다면 가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역시 욕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니 운신도 가벼워진 느낌이다.

“전하, 선왕께옵서 왜란 시 선왕의 과가 많다고 하더라도 용인술 하나만은 훌륭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나이다. 정철 이원익 유성룡 이이 이항복 이덕형 이순신 권율 김시민 등 제 문무백관들을 골고루 등용하셔서 난국을 돌파하셨나이다. 이것이 나라를 지탱한 힘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옵니다.”

“그게 좋았다고?”

“그렇사옵니다. 탕평책은 누구나에게 불만이 없도록 하는 정책이옵니다.”

“그것은 틀렸다.”

광해가 단번에 부정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인재들이 서로 견제하도록 이리저리 자리를 돌려막기 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국력을 약화시켰나. 나도 그 도구가 되어서 피눈물을 쏟았지 않은가.”

광해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그는 선왕의 이이제이(以夷攻夷) 수법이 옹졸하다고 믿고 있었다. 조정을 분탕질하는 요인이 되었을 뿐, 생산적인 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주장만 난무하고 피아의 진영만 나뉘었다. 그래서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파쟁의 전선만 형성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그런 불신 가운데서 국사를 논했으니 나라의 진전이 있을 리 없었다.

광해는 그런 쟁투에 이골이 나있었다. 그래서 국가 조직은 일사불란해야 하는 것이다. 탕평을 주장하면서 양쪽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잔머리 굴리는 것은 더많은 투기와 갈등을 유발한다. 토론문화가 형성되지 못한 곳에서는 탕평책이 싸움을 부추기는 무대가 될 뿐이다.

광해는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이 뛰어났지만 덕성과 품성은 아비를 그대로 닮아 그 스스로도 고단했다. 불신과 의심병이 고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고 민심을 수습하며 왜군과 대적해 공을 세우면, 그것까지도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면 왕은 그 꼴도 보지 못했다. 어느날 명나라에서 광해군이 선조보다 낫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왕은 광해를 불러내 조졌다.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당하니 광해는 구토하기 일쑤였다. 젊은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그것이 더욱 노골화되어서 세자 직분이 언제 날라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저의 무상(無狀:함부로 행동하여 버릇이 없음)함과 국사의 망극함을 계사(啓辭:임금에게 아뢰는 말씀)에서 이미 다 말씀드렸사오니 다시 성상을 번거롭게 하지는 않겠나이다. 생각하건대 선위의 명(세자 지정)을 받은 이후로 밤낮없이 걱정이 되어서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은 지가 이미 반순(半旬:연속된 5일)이 되어...”(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 9월3일)

“물러가라. 듣기 싫다.”

이로인해 광해 역시 불안병과 의심병이 심했다.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맨먼저 착수한 것이 왕권의 강화였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넘보는 낌새라도 보이면 그 세력을 도륙해버렸다. 그 정도는 아비에 비해 더했다.

“상감마마, 백사 대감의 북청 유배는 재고해주십시오. 백사 대감은 벌써 60 노환이옵고, 근자에는 해소병이 깊습니다. 거친 삭풍에 견디기 어려운 노령이옵니다.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번복하여 주시면 성은이 망극하겠사옵니다.”

“나를 따르는 것은 한결같아야 하거늘, 나를 배신하는 데야 방법이 없다. 유배형은 번복할 수 없다.”

왕과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나쁘다는 식으로 세상의 법도는 그렇게 돌아갔다. 우주의 중심은 왕 자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마, 제 청을 하나 꼭 들어주십시오.”

“무엇이냐.”

“제가 백사 대감을 모시고 북청으로 가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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