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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역사이야기-91. 그 많던 전남의 읍성은 왜 없어져버렸을까?

전라도역사이야기-91. 그 많던 전남의 읍성은 왜 없어져버렸을까?

100여개 읍성은 사라지고 돌무더기만…

광주·전남지역 확인된 읍성은 모두 15개
왜구 등 방어위해 해안마을에 읍성 쌓아


일제, 조선침탈 후 읍성 모두 강제 철거
광주읍성은 1908년부터 10년 동안 헐려

역사복원 및 자원화 위해 읍성복원 필요
‘사이버광주읍성’처럼 대체복원 시도돼야

옛적에 큰 고을에는 성이 있었다. 외부의 침입이나 공격에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위해 성을 쌓고 그 안에 살았다. 읍성(邑城)이다. 조선시대 이전만 하더라도 곳곳에 읍성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남지역에서 읍성을 보기가 힘들다. 순천 낙안읍성 정도가 온전히 남아있는 읍성이다. 몇 군데에서는 성문 복원이 이뤄졌지만 성벽이나 읍성 내 관아 건물들은 대부분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린 상태다. 도대체 그 많은 읍성의 성벽과 가옥, 관아건물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간 걸까?
 

1.광주전남읍성현황(광주전남연구원제공)
광주전남읍성 현황(광주전남연구원 제공)

■광주·전남지역의 읍성

2018년 광주전남연구원 김만호 연구위원은 <광주전남 읍성의 현황과 활용방안>주제의 연구논문을 통해 광주와 전남 지역 읍성(邑城) 현황과 관광자원으로의 활용방안을 제시했다. 김 연구위원은 읍성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만큼 역사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장소 및 새로운 관광 활성화 콘텐츠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이 지니고 있는 읍성의 역사·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와 활용방안에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이다.

김만호 연구위원은 <광주전남 읍성의 현황과 활용방안> 연구논문을 ‘광전 리더스 Info(인포:통권 104호 2018.8.2)’에 실었다. 이번 전남역사이야기는 김만호연구위원의 읍성연구결과를 토대로 해 각 지역의 읍성이 품고 있는 역사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또 문화재 지정과 보존 상태, 활용방안에 대해 알아본다.

전통시대 광주전남 지역에 소재한 읍성은 15개로 파악되고 있다. 김 연구위원은 광주·전남 읍성 15곳을 현장조사하고 문화재 지정과 보존 상태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시·도지정문화재(전남도 기념물), 시·도지사지정 문화재 자료, 성벽을 일부 보존·복원한 읍성, 흔적이 거의 없는 읍성 등 5가지로 분류했다.

이 분류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는 낙안·나주읍성, 시·도지정문화재는 고흥·강진읍성, 문화재 자료는 광주·진도읍성, 성벽을 일부 보존·복원한 읍성은 보성·순천·영광·영암·장흥·해남읍성, 흔적이 거의 없는 읍성은 광양·구례·무안읍성이다. 각 읍성의 보전상태는 지역마다 다르다. 각 지자체가 얼마나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읍성(邑城)과 산성(山城)

읍성은 지방 군현(郡縣)의 중심에 쌓은 성이다. 군사·행정·생활을 목적으로 설계된 공간이다. 생활공간을 외부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쌓은 성을 읍성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산성은 외부세력의 대대적인 공격이 이뤄질 경우 목숨을 지키기 위해 피신했던 군사적 방어성격의 성이다. 읍성은 평지에 위치해 있는 반면 산성은 험준한 산 능선과 계곡을 따라 축조됐다.

우리나라에 산성이 많은 것은 읍성 가까운 곳곳에 산들이 있기 때문이다. 산성은 경사면이나 절벽을 이용해 쌓았기 때문에 공력(工力)이 크게 들지 않는다. 중부 이남의 지역에만 1천200여개 이상의 산성 터가 남아있다. 전남에도 100 여개가 넘는 산성 터가 있다. 강진 병영성은 평지에 쌓아진 경우지만 담양 금성산성을 비롯 장성 입암산성, 순천 검단산성, 진도 용장산성, 광양 마로산성 등 백제시대 이후 만들어진 산성(산성터)들이 곳곳에 있다. 수군이 있던 지역에도 진성(鎭城)터가 남아있다.

현존하는 읍성의 대부분은 석성(石城)이다. 평지에 쌓은 평지성 혹은 평지와 일부 낮은 산을 뒤로하고 쌓은 평산성(平山城) 형태가 많다. 읍성은 고을의 크기와 위치에 따라 성벽의 높이와 성의 둘레, 형태가 각자 다르다. 대부분의 읍성은 500~6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읍성의 성문과 성벽, 관아건물 에는 조상의 숨결과 역사적 사건이 담겨 있다. 역사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읍성의 규모는 부, 목, 군, 현 등 행정 구역의 등급에 따라 좌우됐다. 얼마나 큰 고을이고 얼마나 사람이 많이 사느냐에 따라 성의 크기가 달랐다. 조선 시대 내륙 지방의 큰 고을에는 읍성이 있었다. 해안 근처의 고을에는 으레 읍성이 있었다.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읍성은 대개 하삼도(하삼도:충청·전라·경상)에 위치한다. 큰 읍성의 성 길이는 900m 이상, 중간 규모는 450~900m, 작은 것은 300m 정도였다. 남부지역의 성의 수에 대해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는 104개소로 기록돼 있다.

이들 읍성은 조선 말기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일제는 1910년 ‘읍성 철거령’을 내리고 조선의 읍성을 대부분 부숴버렸다. 일제는 을사조약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 지우기’에 나섰다. 서울을 비롯 각 도시에 있는 읍성을 파괴했다. 광주에서는 시가지 정비와 도로개설을 명분으로 삼아 4개의 성문과 성벽을 헐어냈다. 나주를 비롯한 영광·장흥·보성·고흥·진도 읍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제가 마구 헐어버린 성벽의 돌들은 민가의 담을 쌓거나 집의 주춧돌로 삼는데 사용됐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읍성 중 대표적인 것은 정조 때 세운 수원읍성이다. 또 비교적 형태가 잘 남아있는 읍성은 순천 낙안읍성을 비롯 비인읍성, 해미읍성, 남포읍성, 동래읍성, 보령읍성, 진도읍성, 경주읍성, 거제읍성, 홍주읍성, 언양읍성 등이다. 이중 낙안읍성이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는 읍성으로 꼽힌다. 읍성은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이 파괴됐다. 광복을 맞을 때 일부 읍성이 남아있었으나 도시재정비 과정에서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관아건물과 함께 성벽이 모두 없어진 광주읍성이 대표적인 경우다.

■광주읍성

2.1872년 지방지에 그려진 광주읍성
1872년 지방지에 그려진 광주읍성

광주에는 읍성(邑城)이 있었다. 10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옛 전남도청과 충장로, 황금동 일대에는 2.5㎞의 직사각형 읍성이 있었다. 그리고 읍성을 오갈 수 있었던 통로였던 4대문이 있었다. 그러나 광주에 성이 있었고 어느 곳에 성문이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광주읍성의 존재를 모르기에 어떤 이유 때문에 광주읍성이 없어져 버렸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없다. 광주관아는 지금의 전남도청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일대에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광주는 오래된 고을(古都)이지만 고색이 창연한 옛 건물들을 보기가 힘들다. 현재의 광주는 성형을 당한 고을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뜯어고침을 당한 고을이다. 뜯어 고친 사람들은 일본인들이다. 일본인들이 광주를 어떻게 뜯어고쳤는지를 헤아리는 것이 극일(克日)의 일부라 생각한다. 저들이 광주에 저지른 ‘역사·문화범죄’를 기억해야 단죄를 할 수 있다.

3.여지도의 광주읍
여지도의 광주읍

광주읍성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단종 2년(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다. ‘읍성은 돌로 쌓았고, 둘레가 972보(步)이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있다. 이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호남읍지> <광주읍지>에도 ‘읍성은 돌로 쌓았고 주위는 8천253척 높이는 9척, 우물은 100곳이다’는 내용이 나온다. 영조척(營造尺)은 1척이 31.24㎝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광주읍성의 둘레는 2.5㎞ 높이는 2.8m다. 고창읍성의 둘레가 1.7㎞이고 낙안읍성 둘레가 1.4㎞였음에 비춰보면 매우 큰 읍성이었다. 실제로 광주읍성은 전주, 남원, 나주읍성과 함께 호남의 4대 읍성으로 꼽혔다. 이런 큰 성이 어떻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을까? 그리고 왜 광주사람들은 광주읍성을 기억하지 않을까?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4개의 성문이 있는, 직사각형의 광주읍성이 또렷하게 그려져 있다. 1872년 간행된 <지방도>(서울대 규장각 보관)에는 광주읍성 내의 관아건물과 남쪽 진남문(鎭南門), 북쪽 공북문(拱北門), 동쪽 서원문(瑞元門), 서쪽 광리문(光利門) 등 4개 성문이 나타나있다. 성 밖에는 물길을 만든 도랑이 자리하고 있었다.

1979년에 간행된 <광주시사>에 따르면 남쪽의 진남문은 광산동 옛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일대 4거리, 북쪽의 공북문은 충장로 4가 충장파출소 4거리, 동쪽의 서원문은 대의동 옛 광주문화방송 4거리, 서쪽의 광리문은 황금동 옛 미국공보관 4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방도>에 그려져 있는 광주읍성에는 많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객사, 동헌 등 많은 관청 건물들과 누각들이 있다. 광주관아가 밀집해 있었던 곳은 지금의 금남로 1가다. 광주는 500여 년 동안 광산현·무진군·광주목·광주군 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그렇지만 관아 터는 바뀌지 않았다.

<지방도>에는 남북과 동서를 관통하는 교통로가 붉은 선으로 표시돼 있는데 두 길이 만나는 지점이 광주시민들 사이에서 ‘우다방’이라 불리던 광주우체국(영업실)자리다. 예나 지금이나 충장로 1가와 2가의 경계인 광주우체국 앞은 사람들의 통행이 가장 빈번했던 교통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4.현재의 시가지에서 헤아려본 광주읍성 위치
현재의 시가지에서 헤아려본 광주읍성 위치

우체국 앞 4거리 일대에는 희경루(喜慶樓)라는 누각이 있었다. 희경루는 문종 원년(1451), 무진군에서 광주목으로의 환원을 경축하기 위해서 세워진 누각이다. 무등 시네마 일대에는 광산관이 있었다. 지금의 나주 금성관처럼 매우 큰 규모의 객사였다.

광산관은 임금의 위패를 보존하는 한편 귀빈들을 접대하는 용도의 건물이었다. 광산관의 정문은 황화루(皇華樓)였는데 정면 3칸에 옆면이 2칸인 2층 구조의 누각이었다. 일제는 1910년대 지금의 동명동에 광주형무소를 만들 때 황화루를 뜯어다가 정문 쪽에 세우고 간수들을 양성하는 용도의 건물로 사용했다. 황화루는 광주형무소가 1970년대에 문화동으로 이전될 때 완전히 헐렸다.

1897년 당시만 하더라도 광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반일기운에 눌려 조심스럽게 살았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강점이 확실해지자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일본인들은 주인행세를 시작했다. 1906년 광주에 일본군 1개 중대병력이 들어온 뒤 광주는 완전히 일본인 세상이 돼버렸다.

광주를 장악한 일본군과 일본헌병은 광주를 허물기 시작했다. 먼저 광주읍성을 없애고 그 자리에 도로를 만들었다. 일제의 광주읍성 허물기는 일본군이 호남의병 토벌에 나선 1908년부터 시작돼 1918년에 끝났다. 광주읍성이 있던 자리에는 큰 길이 생기고 목 좋은 곳에는 일본인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광주읍성을 허무는 동시에, 혹은 순차적으로 조선관아 건물들도 없애기 시작했다. 일제는 1906년부터 1920년대 후반사이에, 광주읍성과 조선관아 건물 모두를 허물어버렸다. 1896년 광주가 전남관찰부의 소재지로 결정될 때 관찰부는 광주관아 건물에 들어섰다. 191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금남로 1가 일대에는 10여 채의 크고 작은 관아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1910년 금남로 1가 일대에 있었던 전남관찰부가 광산동 13번지 일대로 이전했다. 이름도 전남도청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일본 헌병대 본부와 전남도 경무부(전남도경 전신)는 금남로1가 일대에 그대로 머물렀다. 일제는 1920년 대 후반 하모당과 같은 조선관아 건물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5.1897년 광주읍성 동문(서원문)
1897년 광주읍성 동문(서원문)

광주읍성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1992년이다. 당시 전남도는 방문객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부지 정리를 했다. 이 때 뒷담 부근에서 성돌과 성벽 하부 토축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견됐다. 1996~97년 광주시립민속박물관이 황금동과 광산동에 읍성 터 일부를 발굴한 결과 광주읍성 성벽의 폭은 3.4~4m였다.

2007년 아시아 문화 전당을 건립하면서 지표면 아래에서 85m에 달하는 성벽의 유허가 또 발굴된다. 두 번의 발굴과 조사로 광주읍성은 1378년(고려 우왕 4년)왜구 침략을 막기 위해 축조됐고 1916년에 완전 철거됐음이 밝혀졌다. 광주읍성 유허(光州邑城 遺墟)는 1994년에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됐다.

■순천낙안읍성(順天樂安邑城) <전남역사이야기 124회 참조>

6.낙안읍성
낙안읍성

낙안읍성은 순천 조계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읍성이다. 낙안읍성이 있는 자리에는 마한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위해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이곳에 성을 쌓고 살았다. 이곳의 성은 백제 시대 파지성(波知城)이라 불렀다. 분차, 분사, 부사라고도 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분령군으로, 고려 시대에는 양악, 낙안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낙안읍성은 조선 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襄惠公)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후 인조 4년(1626)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忠愍公)임경업(林慶業) 군수가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주읍성<전남역사이야기 125회 참조>

8.나주 남고문
나주 남고문

나주읍성이 언제 축조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나주는 이미 마한과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 나라의 주요 기반이 되는 곳이었기에 지역의 세력들이 오래전부터 읍성을 쌓고 외부의 침략에 대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읍성은 고려 초기에 축조됐다. 정도전(鄭道傳)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기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전남 해안 지역은 황폐해졌으나 나주읍성은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나주읍성은 판축토성 축조기술을 이용해 쌓은 성이다. 판축토성은 토성 중심 축 양쪽에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아올린 성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석성으로 바뀌었다. 1404년(태종 4) 10월에 돌로 읍성을 고쳐 쌓았다. 1456년(세조 5)에 크게 늘려 지금의 규모가 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3천126척, 높이 9척이며 성 안에 우물 20곳과 샘 12곳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인구가 늘고 군사적 요충지가 되면서 성곽의 규모는 더욱 커져갔다. 세조 때 7천 척으로 늘어났으며 조선후기에는 둘레가 9천966척으로 확장됐다. 파수와 측면공격의 기능을 갖춘 치성(雉城)이 7곳 있었고,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여장(女墻:성가퀴, 성 위에 활 또는 조총을 쏘는 구멍이나 사이를 띄어 놓은 작은 성벽) 2천412개가 설치됐다. 옹성과 함께 문루(門樓)를 갖춘 4대문이 있었다.

나주읍성 역시 일제 강점기에 모두 훼손됐다. 성벽은 헐려 돌은 건축자재로 쓰이고 성문은 모두 허물어졌다. 나주읍성 남쪽문인 남고문(南顧門)은 1993년에 복원됐다. 성문 위에는 정면 3칸·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올린 문루가 자리하고 있다.

2005년에는 동쪽문인 동점문(東漸門)이 복원됐다. ‘동점’(東漸)이란 서경에 나오는 ‘동점우해(東漸于海)’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주천이 동쪽으로 흘러 영산강을 만나 바다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남평을 거쳐 나주에 온 광주사람들이 주로 동점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2011년에는 영금문(映錦門)이 다시 세워졌다. 영금문은 읍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성문이라고도 불린다. 1894년 음력 7월 동학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지금 나주시 교동 42번지 일대다.

1894년 음력 7월 5일 나주의 대접주 오권선과 최경선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3천여 명은 나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나주를 공격했다. 전투는 주로 영금문(서성문)에서 치러졌다.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과 유생들은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해 성을 보수하고 장정들을 모아 수비를 담당토록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종렬목사의 치밀한 전투준비와 뛰어난 지휘로 나주백성들은 동학군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이후 전봉준 장군과 그의 부하 10여명이 나주에 들어와 민종렬 목사와 협상을 벌였다. 이때 전봉준이 들어온 문이 영금문이다. 협상이 결렬된 후 농민군들은 나주읍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나주읍성을 공격했다. 1894년 11월 금성산 월정봉에서 내려온 동학농민군들은 영금문의 관군과 나주읍성 백성들을 상대로 맹공을 쏟아 부었으나 도통장 정진석등의 활약에 밀려 결국 성을 함락하는데 실패했다.

나주읍성은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금성산성(錦城山城)과 짝을 이루는 성이다. 국내 읍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읍성이다. 나주읍성에 있던 관아건물이 상당 수 남아있어 나주목의 규모를 헤아리는데 도움이 되나 읍성 성벽과 많은 건물들이 사라져버려 아쉬움이 크다. 현재 나주시내에는 나주목의 객사였던 금성관(錦城館)과, 나주 관아 정문인 정수루(正綏樓), 관아 내아인 금학헌, 향교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고흥읍성·강진읍성·진도읍성

○고흥읍성(흥양현읍성:興陽縣邑城)

9.흥양현읍성(한국학중앙연구원)
흥양현읍성(한국학중앙연구원). 전남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에 있는 옛 흥양현의 읍성. 전라남도 기념물 제 35호. 세종 때 흥양현의 치소를 둘러쌓은 읍성으로, 현재의 읍성은 조선 후기인 1871년에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전남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에 있는 읍성이다. 뒤쪽에 주월산을 끼고 쌓은 성이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 35호이다. 이 성은 1395년(태조 4년) 광양현에 진(鎭)을 설치할 때 만들어진 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고흥읍이 있는 자리는 예전에 흥양현(興陽縣)이 있던 곳이다. 흥양현은 세종 23년(1441년)에 생긴 현으로 1914년 행정명이 고흥군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존재했다.

흥양현 읍성은 치소(治所)를 둘러쌓은 읍성이다. 둘레는 3,500척, 성벽의 높이는 평지에서 12척이다. 흥양읍성은 여장(女墻) 574첩(堞)을 갖춘 높이 4.2m의 성이다. 적대(敵臺: 치성을 응용한 방어시설)가 11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성안에는 우물이 5개가 있었다. 현재의 읍성은 1871(고종 8년)에 대대적으로 크게 고쳐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문터와 북문터, 서문터 등 세 곳의 문터가 확인되고 있다.

10.현재고흥읍의 고흥읍성 추정지
현재고흥읍의 고흥읍성 추정지

높이 약 6m, 폭 약 4m의 견고한 성벽과 길이 7m 정도의 옹성이 남아 있다. 옥하리 여산마을 중심을 흐르는 폭 8m정도의 고흥천에는 150m의 간격을 두고 두개의 홍교(虹橋:무지개 다리)가 있다. 이 두 개의 다리는 읍성 안으로 물이 흘러들고 나가는 수구로 만들어졌다. 이 중 위쪽에 있는 옥하리 홍교의 규모는 높이 4.2m, 길이 8.7m로 비교적 큰 다리이다.

옥하리 홍교는 흥양읍성 서문으로 들어가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흥양읍성의 서벽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개천물이 남벽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설치된 것이다. 홍교는 맨 밑바닥에 몇 개의 다듬은 돌을 놓고 그 위에 두 개 내지 세 개의 장방형 돌과 27개의 돌로 무지개 모양의 다리를 짜 올리는 식으로 만들었다. 서쪽에는 용머리를, 그 반대쪽인 동쪽에는 용꼬리를 새겨놓았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돼 있다.

11.고흥존심당
고흥존심당.

성 안의 옛 관아 터에는 1895년 고흥군청이 들어섰다. 고흥군 청사는 지난 2018년 남계택지개발지구로 옮겨졌다. 옛 고흥군청 청사터는 흥양현이 생긴 후 관아가 들어섰던(1441년)곳이다. 2018년 군청사가 옮겨지기 전까지 577년 동안 치소(지방청사)가 들어서 있었던 셈이다. 예전의 고흥군청사가 있었던 곳에는 동헌 건물이었던 존심당이 자리하고 있다. 존심당 뒤편 산등성이에서 성벽의 자취를 볼 수 있다.

○강진읍성

12. 강진읍성. 폐성이 돼 돌무더기만 남아있다.
강진읍성. 폐성이 돼 돌무더기만 남아있다.

강진읍성은 백제시대 동음현(冬音縣)의 치소로 처음 축조된 후 고려까지 탐진현의 치소로 사용됐다. 조선시대 1429년(세종 11) 도강현 송계리(지금의 성전 수양리 수암마을)로 치소가 옮겨졌으나 1475년(성종 6) 현재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10월에 읍성이 축조됐다. 현재 남아있는 강진읍성의 모습은 1651년(효종 2)에 다시 쌓아진 것이다.

전남문화관광재단 전남문화재연구소가 북벽(95m) 북문지 발굴조사(125㎡)와 산정상부 및 북·동벽 변환점 평탄지 시굴조사(1천375㎡)를 한 결과 북벽, 북문지와 옹성, 초축 이전 선대 유구 등이 확인됐다. 강진읍성은 보은산 남쪽자락에 있던 옛 고현산성과 평지인 시가지 일부를 연결한 조선시대 전형적인 평산성이다.

축조방식은 협축식으로 기저부를 조성한 후 지대석을 놓고 10~15㎝ 들여 대형 석재들을 이용, 기단석을 설치했다. 그 위에 면석은 ‘허튼층쌓기’수법으로 축조했다. 시굴조사 결과 북·동벽 변환점 평탄부에서는 성벽 모서리 부분이 확인됐고 상면에서는 박석을 깐 성벽의 부속유구로 추정되는 직경 2.8m의 원형유구가 확인됐다.

강진읍성은 총 둘레 3천400m, 너비 2.5m, 높이 3∼4m였다. 성에는 1천332개의 여장(성가퀴)가 있었다.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이 있었는데 정문격인 남문은 중층 누각 건물이고 동문·서문·북문은 단층문이었다. 1531년(중종 25)에 수리됐고 1651년에 개축됐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공격을 받아 강진현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읍성이 허물어지고 불에 타버렸다. 이후 폐성이 돼 방치된 상태다.

강진읍성은 매우 큰 규모의 성이었다. 현재의 보은산 정상의 헬기장을 정점으로 해 동벽은 동문터~강진의원 부근까지, 서벽은 산 능선~서문터에~동창주유소부근까지, 남벽은 버스터미널 뒤쪽도로를 연결하는 도로까지 연결돼 있었다. 강진읍성은 그동안 행정기관의 무관심 속에서 지속적으로 훼손돼 왔다. 남벽의 경우 주택신축과 도로개설 등으로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진도읍성

14.진도읍성(아마도블로그)
진도읍성(아마도블로그)

고려말기는 왜구들의 약탈이 극심한 시기였다. 고려조정은 섬과 해안지방에 쳐들어와 백성들의 생명을 해치고 물자를 훔쳐가는 왜구를 막아낼 힘이 없었다. 그래서 섬사람들을 뭍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쇄환정책(공도정책)을 실시했다. 진도 사람들도 충정왕 2년(1350년)에 영암(月岳)지역으로 집단이주 당했다. 80여년 뒤 조선이 들어섰다.

조선조정은 변방의 치안이 어느 정도 확립되자 영암에서 살던 진도 주민들을 해남 삼촌면(현재의 해남군 삼산면 원진리·창리 금산 일대)으로 옮겼다. 진도가 고향인 백성들을 다시 돌려보내기 위한 사전조치였다. 세종은 1431년 금갑진과 남도진에 수군을 배치했다. 그리고 함평 대굴포에 있던 전라도수군사령부를 해남우수영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 1437년 진도로 다시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조선조정은 진도고읍성을 치소로 삼았다가 3년 뒤에 현재의 진도읍으로 치소를 옮겼다. 그리고 진도읍성을 쌓았다. 1440년의 일이다. 진도읍성은 1446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도읍성은 성내리 해발 15~18m의 평탄한 대지와 군강공원((軍岡公園:57.5m)의 야산을 연결해 쌓아졌다. 진도읍성은 동서가 긴, 사다리꼴의 형태다. 지적도에 의한 성벽길이는 외벽을 기준으로 해 3,400척(1,589m), 높이 11척(2∼3.5m)의 규모로 동·서·남쪽에 세 개의 문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헐려졌다. 일부 성벽이 군강공원 쪽 동북 모퉁이와 진도중·고등학교 뒤쪽에 남아있다. 군강공원 쪽에 높이 2∼3.5m, 길이 50m 정도의 성벽이 있다. 북쪽의 성벽은 진도중·고등학교와 군청, 진도초등학교 북쪽 부지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군청 뒤쪽에도 높이 1.8∼2m의 성벽이 50m 정도 남아있다. 성문은 동·서·남문 3개가 있었으나 위치를 찾을 수 없다

■읍성복원을 통한 역사성회복과 관광활성화 방안

13. 김만호광주전남연구원 연구원
김만호 광주전남연구원 연구원

김만호 연구위원은 읍성과 관련된 각 지자체의 적극적인 행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읍성에 대한 지표조사나 발굴조사를 통해 지역의 역사를 회복하고 관광자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 위원은 구체적인 첫 번째 방안으로 광주전남 읍성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동시에 과거 읍성의 윤곽을 현재의 지도 위에 표시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읍성과 관련된 인물?사건?사진 등 다양하게 자료를 수집해 두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두 번째로 읍성의 성문(城門)이나 주요 관아건물 터에 표지석을 세우고 설명문을 첨부해 읍성의 역사를 ‘표시하고 기억하는’ 치밀한 작업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성벽이 있었던 자리나 도로의 벽면에 그 흔적을 표시하고 이를 활용해 읍성 둘레길을 조성하는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 소규모 유물전시관이나 역사자료관을 건립해 읍성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전시해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 알리면 지역문화유산이 더욱 풍부해지고 관광객들에게도 유익한 볼거리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15. 보성읍성.
보성읍성. 일부가 복원돼 이순신 상유십이 공원이 들어서 있다.

세 번째로는 읍성을 정비하고 복원하는 구체적인 사업이 필요하다고 제시한다. 나주·순천·광양읍성처럼 도시재생 사업과 연계해 읍성을 복원하거나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진도읍성, 고흥읍성, 보성읍성처럼 성벽의 일부를 정비·복원해 공원화한 경우도 바람직한 방안으로 여기고 있다. 현실적으로 복원이 힘든 지역의 경우는 광주의 사례처럼 광주폴리Ⅰ이나 ‘사이버광주읍성’처럼 다양한 방식의 활용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도움말/김만호, 정종민

사진제공/광주전남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아마도블로그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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