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3장 북청 유배<357>

백사 대감은 정충신의 말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한동안 먼 산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하고, 수염이 풍성해서 영상(領相) 관록의 권위가 묻어났으나 눈 주변엔 웬지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한 사람들이 힘을 가져야 하느니라.”

그러나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악하고 탐욕적인 자들이 착한 사람들을 밀어내고 힘을 갖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 아닌가. 반대파를 압살하기 위해 모함하며 악다구닐 쓰는 자들이 권력을 잡는 현실이다. 선한 사람들이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당위론으로서는 맞지만, 권력을 만드는 데는 불필요한 덕목이다. 지금 이이첨 세력은 별 내용도 아닌 것을 가지고 큰 난리나 난 것처럼 뻥튀김해서 목을 치는 논리를 개발하고 있다.

“스승님 말씀은 옳지만 현실세계에서 그것이 가능할까요?”

“당장 가능하지 않다고 해서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패배를 자초한다.”

그러면서 백사가 하는 애기는 의외였다.

“상감마마의 생각이 며칠 새 바뀌고 있다. 선한 것이 이길 수 있다는 징조다. 대북 세력에 너무 휘둘리고 있다는 우려를 하고 계신 모양이다.”

“그러면 대감 어르신의 귀양도 백지화될 수 있습니까.”

“내 안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전하의 생각이 온전히 돌아오시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면 나는 얼음장 밑에 갇혀도 상관없다.”

이항복의 예견이 맞는 듯이 아닌게 아니라 며칠 후 상감의 비답이 내려졌다.

“나라에 공이 많은 중신(重臣)에게 위리안치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러니 더는 거론하지 말라.”

그러나 밀리면 끝장이라고 본 이이첨 세력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들이 꿈쩍않고 다시 상소문을 올렸다.

-기자헌이 먼저 일어나고, 이항복은 그 뒤를 동조했으니 숫놈이 울면 암놈이 따라 우는 격이옵니다. 마치 훈호(訓狐:옆으로 부는 피리와 같은 악기)와 같습니다. 저들이 한쪽 편만 두둔하고 있으니 역적들과 손뼉을 마주치는 날이면 성상께옵서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오며, 장차 헤아리기 어려운 재앙이 불어닥칠 것입니다. 기자헌, 이항복은 역모로써 상감을 업신여기고, 역도를 도와 종묘사직을 어지럽게 한 죄가 하나둘이 아닙니다. 어찌 벼슬을 깎고 중도부처(中途付處:옛 벼슬아치에게 주어지는 풍광좋은 곳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는 가벼운 형벌)로서 두 흉한의 죄를 가벼이 여기시려 하시옵니까. 급히 원악지(遠惡地)로 위리안치 명을 내리시옵소서.(정충신의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중에서).

그러나 광해도 그들의 압박에 권위에 상처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적당히 해도 되는 것을 아득바득 험지로 보내라는 것이 이상한 의구심까지 생기고 있었다.

달리 보면, 대북의 권세를 묵인하면 이이첨의 세상이 되고, 자신은 허수아비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미 보고한 바를 가지고 번거롭게 재론하지 말라”고 재차 일침을 놓았다. 1617년 섣달 초순 광해는 이항복을 벌하지 말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그러자 이이첨 무리들이 무더기로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 중에는 변조된 것도 있었다. 상소문 대 상소문의 대결이 어지럽게 대궐을 짓눌러 그것 하나로 국사가 마비될 정도였다. 도리없이 광해는 이항복을 평안도 서남단의 용강에. 기자헌은 함경도 정평에 유배를 보내도록 교지를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북의 중진 백대형·한찬남이 상소문을 올렸다.

-역적을 두둔하고 전하를 불효로 모는 이항복을 용강으로 귀양 보낸다는 것은 지나치게 이항복을 아끼시는 처사이옵니다. 그곳은 물산이 풍부하며 기녀들 또한 넉넉한 물좋은 곳으로 결코 원악지(遠惡地)가 아니옵니다. 다시 배소를 정해주시옵소서.

이런 상소에는 지의금(知義禁:의금부에 설치한 정2품 관직) 부사 이경함도 가세했다. 귀양지를 극변(極邊)으로 보내지 않으면 자신이 물러나겠다는 협박이었다. 왕은 다시 용강보다 북변인 창성으로, 기자헌은 삭주로 배소를 교체했다. 이것도 이이첨 무리가 찬동할 리 없었다.

-마마, 창성과 삭주는 중국과 가까운 곳입니다. 임진왜란 이래 정충신을 다리 삼아 중국과 매우 친숙한 이항복을 그곳으로 보낸다면 비밀리에 그들을 시켜 조정을 압박할 것이니 큰 화근이 될 수 있사옵니다. 후금과도 연이 닿아있사오니 변란을 꾸밀지도 모르옵니다. 바라옵건대 북쪽 아주 먼 함경도 산골로 유배지를 옮기는 것이 지당하다고 사료되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는 허균 세력도 가담하고 있었다. 상소문을 보고 광해는 자신이 덫에 걸려든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이용하자. 광해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명과 후금이 전쟁을 벌이고, 조선 응원군이 명에 파병되면 두 나라를 잘 아는 정충신을 활용할 수 있다. 그는 정충신을 찾았다. 정충신은 청파의 역참(驛站)에 있는 이항복의 종의 집(奴家)에 이항복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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