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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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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3장 북청 유배<358>

정충신이 청파에 있는이항복의 노가(奴家)를 찾았다.

“영상 어른, 조정이 시끄럽습니다.”

정충신은 백사 이항복을 호칭할 때는 영의정을 지낸 관록으로 영상 어른으로 불렀다.

“절대로 무리에 끼지 말 일이다. 백로는 뱁새가 재재거리는 곳에 가는 일이 아니느니.”

“네. 함께 있을 곳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상 어른의 유배지로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유배지가 어디라도 받아들이십시오.”

“나는 어디로 가겠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그들끼리 다툴 뿐이다. 모든 것은 주상 전하의 의중에 달린 것이느니.”

“헌데 이이첨 세력은 영상 어른이 왕실을 움직이면서 원악지 유배를 피하려 한다고 합니다.”

“천한 것들. 어둠의 무리는 그렇게 기회만 있으면 음해하며 조정을 흙탕물로 흩뜨려 놓는다. 진실은 어듬의 무리에게 치명적이므로 그렇게 흙탕물로 헤집어놓거든. 단순히 이익 때문에 삿된 명분을 만들어 상대방을 압살하니 천한 것들 아닌가? 주상 전하가 이 사실을 아셔야 하는데 모르시는 것이 한이로다.”

실제로 왕은 정보의 통로가 막혀있었다. 이이첨이 상궁 김개시와 중신 이귀를 내세워 어느 시점부터 들고 나는 상소문과 불리한 소문들을 차단했다. 왕좌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왕의 심리를 이용해 차단의 벽을 친 것이었다.

“의심만으로 나라를 통치할 수 없는데, 역적을 허위로 신고해도 상을 내리고 있으니, 이것 모두가 간신배들의 농간이구나.”

백사는 거듭 한숨을 쉬었다. 어느날 이런 일도 있었다. 경복궁 수문장 김위(金渭)가 “임해군의 궁노(宮奴)가 철퇴와 대검을 싸가지고 궁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밀고했다. 이를 보고 대북의 중신들이 그를 공신으로 책봉하더니 임해의 사병(私兵)들을 일망타진했다. 사람들은 “김위가 문을 지키면서 그를 보고도 붙잡지 않고 멋대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면 그 자체가 직무유기요, 간악한 점이 있는 것이다” 라고 의심했는데 묵살되었다.(조선왕조실록 광해 5년(1613) 3월12일). 임해를 치는 명분이 되었으니 허위 사실도 공훈이 되는 것이다.

전 수사(水使) 안위(安衛)가 진사 조덕홍(趙德弘)·조응치(趙應) 등이 역모를 했다고 상소했다. 왕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했으나 사람을 파견하여 쫓아가 붙잡아 처치해버렸다(조선왕조실록 광해 5년(1613) 3월1일). 이는 사감으로 인한 조작이었다. 이처럼 ‘역모를 허위로 고발하더라도 고발 당사자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근거없는 모략이 저자거리에 넘쳐났다. 이를 직접 목격하고 이항복은 넌덜머리를 냈다. 왕이 의심병을 기화로 이용하는 무리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상감께서 토지대장과 호적대장을 정비하고, 왜국에 통신사를 파견하고, 그러는 한편으로 성곽과 무기를 수리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백성의 무병장수를 위해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일을 하면서도 성군 말을 못들은 것이 실로 애석하도다.”

백사는 마음 속으로 울었다. 마침내 무오년(1618)의 새해가 밝았다. 정월 초하루 설날인데 백사의 친구들과 제자와 선비들이 세찬(歲饌)을 가져와서 백사를 위로하며 눈물을 훔쳤다. 이들은 대부분 사대부에서부터 지체 낮은 노비들에 이르기까지 골목길이 막히고 좁은 청파 집을 메울 정도였다. 세도를 잡은 이이첨이나 유희분의 집보다 사람이 훨씬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이첨 세력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사노(私奴)의 집에 출입하는 인물들을 일일이 기록했다. 거기에는 정랑인 제자 최명길, 이시백도 끼어있었다. 최명길은 모친상을 당한 상제(喪制)의 몸이었다. 정충신이 두 사람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소문에는 또 백사 어른을 남관(南關:함경도 마천령 남쪽지방)으로 보내자고 하고, 다른 자는 경원으로 보내자 하고, 지의금 윤선이 함경도 삼수로 하자고 했다는군. 삼수 땅은 경원보다도 더 험한 곳으로 옛날부터 그곳으로 귀양간 사람은 귀신에게 먹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어서 귀문관(鬼門關)이라는 곳이야. 가만 있어야 되나?”

이때 이이첨이 밀대로부터 정보를 받고 입궐해 왕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상감마마, 설날을 맞아 수백의 패당들이 청파 사노 집에 머물고 있는 백사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고 하옵니다. 그 사람들로 골목길이 미어터진다고 하옵니다. 필시 귀양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꾸미는 조짐임에 분명합니다.”

“정충신 궐위장을 불렀는데, 그 자도 거기에 있더란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이시백 최명길 따위 제자들이 모여있다 하옵니다. 그자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사옵니다.”

“내밀히 살피고, 정충신을 불러들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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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이 청파에 있는이항복의 노가(奴家)를 찾았다.

“영상 어른, 조정이 시끄럽습니다.”

정충신은 백사 이항복을 호칭할 때는 영의정을 지낸 관록으로 영상 어른으로 불렀다.

“절대로 무리에 끼지 말 일이다. 백로는 뱁새가 재재거리는 곳에 가는 일이 아니느니.”

“네. 함께 있을 곳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상 어른의 유배지로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유배지가 어디라도 받아들이십시오.”

“나는 어디로 가겠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그들끼리 다툴 뿐이다. 모든 것은 주상 전하의 의중에 달린 것이느니.”

“헌데 이이첨 세력은 영상 어른이 왕실을 움직이면서 원악지 유배를 피하려 한다고 합니다.”

“천한 것들. 어둠의 무리는 그렇게 기회만 있으면 음해하며 조정을 흙탕물로 흩뜨려 놓는다. 진실은 어듬의 무리에게 치명적이므로 그렇게 흙탕물로 헤집어놓거든. 단순히 이익 때문에 삿된 명분을 만들어 상대방을 압살하니 천한 것들 아닌가? 주상 전하가 이 사실을 아셔야 하는데 모르시는 것이 한이로다.”

실제로 왕은 정보의 통로가 막혀있었다. 이이첨이 상궁 김개시와 중신 이귀를 내세워 어느 시점부터 들고 나는 상소문과 불리한 소문들을 차단했다. 왕좌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왕의 심리를 이용해 차단의 벽을 친 것이었다.

“의심만으로 나라를 통치할 수 없는데, 역적을 허위로 신고해도 상을 내리고 있으니, 이것 모두가 간신배들의 농간이구나.”

백사는 거듭 한숨을 쉬었다. 어느날 이런 일도 있었다. 경복궁 수문장 김위(金渭)가 “임해군의 궁노(宮奴)가 철퇴와 대검을 싸가지고 궁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밀고했다. 이를 보고 대북의 중신들이 그를 공신으로 책봉하더니 임해의 사병(私兵)들을 일망타진했다. 사람들은 “김위가 문을 지키면서 그를 보고도 붙잡지 않고 멋대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면 그 자체가 직무유기요, 간악한 점이 있는 것이다” 라고 의심했는데 묵살되었다.(조선왕조실록 광해 5년(1613) 3월12일). 임해를 치는 명분이 되었으니 허위 사실도 공훈이 되는 것이다.

전 수사(水使) 안위(安衛)가 진사 조덕홍(趙德弘)·조응치(趙應) 등이 역모를 했다고 상소했다. 왕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했으나 사람을 파견하여 쫓아가 붙잡아 처치해버렸다(조선왕조실록 광해 5년(1613) 3월1일). 이는 사감으로 인한 조작이었다. 이처럼 ‘역모를 허위로 고발하더라도 고발 당사자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근거없는 모략이 저자거리에 넘쳐났다. 이를 직접 목격하고 이항복은 넌덜머리를 냈다. 왕이 의심병을 기화로 이용하는 무리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상감께서 토지대장과 호적대장을 정비하고, 왜국에 통신사를 파견하고, 그러는 한편으로 성곽과 무기를 수리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백성의 무병장수를 위해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일을 하면서도 성군 말을 못들은 것이 실로 애석하도다.”

백사는 마음 속으로 울었다. 마침내 무오년(1618)의 새해가 밝았다. 정월 초하루 설날인데 백사의 친구들과 제자와 선비들이 세찬(歲饌)을 가져와서 백사를 위로하며 눈물을 훔쳤다. 이들은 대부분 사대부에서부터 지체 낮은 노비들에 이르기까지 골목길이 막히고 좁은 청파 집을 메울 정도였다. 세도를 잡은 이이첨이나 유희분의 집보다 사람이 훨씬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이첨 세력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사노(私奴)의 집에 출입하는 인물들을 일일이 기록했다. 거기에는 정랑인 제자 최명길, 이시백도 끼어있었다. 최명길은 모친상을 당한 상제(喪制)의 몸이었다. 정충신이 두 사람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소문에는 또 백사 어른을 남관(南關:함경도 마천령 남쪽지방)으로 보내자고 하고, 다른 자는 경원으로 보내자 하고, 지의금 윤선이 함경도 삼수로 하자고 했다는군. 삼수 땅은 경원보다도 더 험한 곳으로 옛날부터 그곳으로 귀양간 사람은 귀신에게 먹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어서 귀문관(鬼門關)이라는 곳이야. 가만 있어야 되나?”

이때 이이첨이 밀대로부터 정보를 받고 입궐해 왕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상감마마, 설날을 맞아 수백의 패당들이 청파 사노 집에 머물고 있는 백사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고 하옵니다. 그 사람들로 골목길이 미어터진다고 하옵니다. 필시 귀양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꾸미는 조짐임에 분명합니다.”

“정충신 궐위장을 불렀는데, 그 자도 거기에 있더란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이시백 최명길 따위 제자들이 모여있다 하옵니다. 그자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사옵니다.”

“내밀히 살피고, 정충신을 불러들이렸다!”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3장 북청 유배<358>

정충신이 청파에 있는이항복의 노가(奴家)를 찾았다.

“영상 어른, 조정이 시끄럽습니다.”


정충신은 백사 이항복을 호칭할 때는 영의정을 지낸 관록으로 영상 어른으로 불렀다.

“절대로 무리에 끼지 말 일이다. 백로는 뱁새가 재재거리는 곳에 가는 일이 아니느니.”

“네. 함께 있을 곳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상 어른의 유배지로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유배지가 어디라도 받아들이십시오.”

“나는 어디로 가겠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그들끼리 다툴 뿐이다. 모든 것은 주상 전하의 의중에 달린 것이느니.”

“헌데 이이첨 세력은 영상 어른이 왕실을 움직이면서 원악지 유배를 피하려 한다고 합니다.”

“천한 것들. 어둠의 무리는 그렇게 기회만 있으면 음해하며 조정을 흙탕물로 흩뜨려 놓는다. 진실은 어듬의 무리에게 치명적이므로 그렇게 흙탕물로 헤집어놓거든. 단순히 이익 때문에 삿된 명분을 만들어 상대방을 압살하니 천한 것들 아닌가? 주상 전하가 이 사실을 아셔야 하는데 모르시는 것이 한이로다.”

실제로 왕은 정보의 통로가 막혀있었다. 이이첨이 상궁 김개시와 중신 이귀를 내세워 어느 시점부터 들고 나는 상소문과 불리한 소문들을 차단했다. 왕좌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왕의 심리를 이용해 차단의 벽을 친 것이었다.

“의심만으로 나라를 통치할 수 없는데, 역적을 허위로 신고해도 상을 내리고 있으니, 이것 모두가 간신배들의 농간이구나.”

백사는 거듭 한숨을 쉬었다. 어느날 이런 일도 있었다. 경복궁 수문장 김위(金渭)가 “임해군의 궁노(宮奴)가 철퇴와 대검을 싸가지고 궁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밀고했다. 이를 보고 대북의 중신들이 그를 공신으로 책봉하더니 임해의 사병(私兵)들을 일망타진했다. 사람들은 “김위가 문을 지키면서 그를 보고도 붙잡지 않고 멋대로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면 그 자체가 직무유기요, 간악한 점이 있는 것이다” 라고 의심했는데 묵살되었다.(조선왕조실록 광해 5년(1613) 3월12일). 임해를 치는 명분이 되었으니 허위 사실도 공훈이 되는 것이다.

전 수사(水使) 안위(安衛)가 진사 조덕홍(趙德弘)·조응치(趙應) 등이 역모를 했다고 상소했다. 왕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했으나 사람을 파견하여 쫓아가 붙잡아 처치해버렸다(조선왕조실록 광해 5년(1613) 3월1일). 이는 사감으로 인한 조작이었다. 이처럼 ‘역모를 허위로 고발하더라도 고발 당사자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근거없는 모략이 저자거리에 넘쳐났다. 이를 직접 목격하고 이항복은 넌덜머리를 냈다. 왕이 의심병을 기화로 이용하는 무리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상감께서 토지대장과 호적대장을 정비하고, 왜국에 통신사를 파견하고, 그러는 한편으로 성곽과 무기를 수리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백성의 무병장수를 위해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일을 하면서도 성군 말을 못들은 것이 실로 애석하도다.”

백사는 마음 속으로 울었다. 마침내 무오년(1618)의 새해가 밝았다. 정월 초하루 설날인데 백사의 친구들과 제자와 선비들이 세찬(歲饌)을 가져와서 백사를 위로하며 눈물을 훔쳤다. 이들은 대부분 사대부에서부터 지체 낮은 노비들에 이르기까지 골목길이 막히고 좁은 청파 집을 메울 정도였다. 세도를 잡은 이이첨이나 유희분의 집보다 사람이 훨씬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이첨 세력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사노(私奴)의 집에 출입하는 인물들을 일일이 기록했다. 거기에는 정랑인 제자 최명길, 이시백도 끼어있었다. 최명길은 모친상을 당한 상제(喪制)의 몸이었다. 정충신이 두 사람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소문에는 또 백사 어른을 남관(南關:함경도 마천령 남쪽지방)으로 보내자고 하고, 다른 자는 경원으로 보내자 하고, 지의금 윤선이 함경도 삼수로 하자고 했다는군. 삼수 땅은 경원보다도 더 험한 곳으로 옛날부터 그곳으로 귀양간 사람은 귀신에게 먹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어서 귀문관(鬼門關)이라는 곳이야. 가만 있어야 되나?”

이때 이이첨이 밀대로부터 정보를 받고 입궐해 왕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상감마마, 설날을 맞아 수백의 패당들이 청파 사노 집에 머물고 있는 백사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고 하옵니다. 그 사람들로 골목길이 미어터진다고 하옵니다. 필시 귀양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꾸미는 조짐임에 분명합니다.”

“정충신 궐위장을 불렀는데, 그 자도 거기에 있더란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이시백 최명길 따위 제자들이 모여있다 하옵니다. 그자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사옵니다.”

“내밀히 살피고, 정충신을 불러들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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