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에 재외한인들 독립의지 고무…노인동맹단 탄생

<3부>러시아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과 신북방정책

★(1)백암 박은식과 연해주 노인동맹단

(2)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독립운동

(3)연해주 우수리스크 고려인 아리랑

(4)연해주와 평화 번영의 신북방정책

만세운동에 재외한인들 독립의지 고무…노인동맹단 탄생

백암 박은식, 김치보 등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서 결성

46세 이상 남녀 구성…일본정부에 독립요구서 보내

국제적 조직 확장과 함께 의열독립운동도 동시 추구

65세 강우규, 日총독 척살 시도…“죽을 날까지 꼿꼿”

3·1독립만세운동 당시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장이 한국과 일본은 형제와 같으므로 친목해야 한다고 훈시를 하자 한 학생이 ‘역사가 오랜 우리가 형이므로 일본이 먼저 형 대우를 해주어야 친목이 이루어질 것’이라며 교장을 꾸짖었다. 한편 평양에서는 보통학교 학생들마저 학교를 뛰쳐나가 일제히 만세를 외치자 일본인 교사가 “일본국민으로 기르려던 10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탄식했다.

3·1독립만세운동은 특히 여학생들과 부녀자들의 참가자가 많았는데 일부가 수감되면 시위군중들은 경찰서를 포위하고 경찰관을 꾸짖으며 수감자들을 석방하지 않으려거든 우리 전체를 잡아 가두라고 큰소리로 요구했다. 당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삼천리강산을 뒤흔들자 총독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는 무력진압을 명령했다. 그러나 군사령관 우도궁태랑(宇都宮太郞)은 “한민족은 반만 년 역사정신이 있어 결코 위압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며 출병을 거부하여 본국에서 온 병력이 야만적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블라디보스톡 고려인 표지석과 필자.

일부 사례들을 보면 “나는 71세이고 처는 70세로 세 아들과 세 손자를 두었소. 4월 중순경 왜병이 집에 쳐들어와 6명을 끌고 가기에 땅에 꿇어 엎드려 천만번을 애걸하였소. 저들은 우리 아이들을 창으로 다 죽이고 모두 불태워 버렸소.” 심지어 경성에서는 7세 아이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칼로 입을 찔러 죽이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인들이 부녀자, 소년, 소녀까지 죽이고 고문한 내용들은 차마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철산에서는 과부의 14세 된 외아들이 세발의 총상과 수 십군데 자상을 입고 죽어가면서 엄마에게 “저는 하나님께 고하여 제 가슴속의 뜨거운 피가 뜨거운 불덩이로 변하여 그들 섬나라를 불태우겠습니다” 라고 유언하였는데 과연 원폭이 투하되었다. 박은식은 1919년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 당시 한국 내 211개 부군(府君)에서 1천542회의 독립만세운동집회를 가졌으며 집회참가자 수는 2백 2만3천98명, 사망자는 7천509명, 부상자는 1만5천961명, 투옥자수는 4만6천948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1독립만세운동과 파리강화회의를 통한 독립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박은식을 비롯한 연해주 지역 독립지사들은 1919년 2월 25일 대외에 한민족을 대표하고 결집시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설립했다. 사진은 블라도디보스톡의 대한국민의회 건물.

◇노인동맹단 결성

이와 같이 3·1독립만세운동의 진압이 극도로 잔인하자 국내외 독립운동지사들과 한인들은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걸고 독립을 호소하는 성명서와 대표단을 보냈다. 승려연합회에서는 승려연합대회 선언서를 통해 궐기를 독려하였다. 곽종석을 비롯한 유림대표와 일부 여학생 등은 파리강화회의에, 원로대신 김윤식과 조형균 등은 장곡천호도에게 성명서를 보냈다. 또한 한국에 있던 선교사는 윌슨대통령에게 일본인들의 잔학성을 고발하며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것을 청원하였다.

일본의 짐승 같은 탄압이 전 세계에 알려지자 미국의 종교계, 교육계가 동정을 표했다. 하와이 농장주들은 일본인 노동자를 배척하고 한국인으로 교체하였으며 임금을 일본인보다 3~4배를 더 주었다. 게다가 인쇄기와 자금을 주어 독립운동을 격려하였다. 이외에도 러시아 국민당, 프랑스, 체코의 지식인들이 한국의 3·1독립만세운동을 지지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은 특히 재외한인들과 해외 독립지사들의 독립의지를 고무시켰다. 백암 박은식은 1915년 상해에서 신한혁명단, 대동보국단을 주도적으로 창설한 후 연해주 학생들과 한인들의 민족사 교육을 위해 니코리스크-우스리스크(발해 南城)로 갔다. 그는 연해주 한인들에게 한민족사를 강의하며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고취시켰다.

박은식 선생이 연해주에 머물렀던 1919년 2월 25일 독립지사들은 대외에 한민족을 대표하고 결집시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설립하였다. 파리강화회의를 통한 독립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재외한인들과 독립지사들은 전 민족적으로 독립투쟁단체들을 결성하여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부녀자와 청소년 심지어 소년들까지 단체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그 중 하나가 연해주에서 결성된 노인동맹단이었다. 당시 나이가 61세이던 박은식은 1919년 3월 26일 김치보 등과 함께 발기했다. 노인동맹단은 46세 이상의 남녀로 구성되었으며 입회비는 7루블로 정하였다.
 

메인 사진-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기념탑. 새로운 한국이란 이름의 ‘신한촌’은 1911년 5월 구개척리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와 건설했다.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이었던 권업회와 한민회, 한민학교 등이 생겨나며 항일독립운동의 전진기지가 됐다.
노인동맹단 명부.
노인동맹단 명부 표지.

◇일본정부에 독립요구서 보내

노인동맹단은 창단식 이후 각지의 한인들을 단원으로 포섭하는 한편 6월 25일에는 박은식, 김치보 등 20여명이 연명하여 일본정부에 독립요구서를 보냈다. 그 서두를 살펴보면 “우리들은 나라를 잃고도 목숨이 붙어있어 남의 나라에서 떠돌다 이제 늙고 병들어 기꺼이 무덤에 묻히려 하였는데 우리나라 백성들이 독립을 위해 피로서 항쟁하였다. 큰 참극이 일어난 날 외국의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 놀랐는데 하물며 우리들이야. 부로(父老)이며 친속(親屬)인 우리들로서 어찌 차마 청년들만 사지에 나가게 하고 두려워하며 방관만 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맹세하고 우리의 능력에 맞는 행동을 결행하기로 기약한다”고 돼 있다.

이 요구서에서 박은식은 “맨손으로 분기한 3·1독립만세운동은 정의에서 나왔으며 우리나라는 천년 이상 동안 일본에게 문명을 전해준 선생국가로서 한민족의 국혼(國魂)은 강건하므로 결코 일본이 영구 지배할 수 없다. 일본이 대한민국을 독립시켜 양국이 우호, 협력한다면 일본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므로 조속히 귀 정부의 결단을 기대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고려인문화센터.

 

 

노인동맹단이 서재필 박사에게 보낸 편지.

◇강우규 열사의 사이토 척살 시도

1919년 10월에 노인동맹단은 미국 서재필 박사에게 총재직을 수락해 달라는 요청서를 보내 국제적인 조직으로 확장을 시도하였다. 노인동맹단은 의열독립운동도 동시에 추구하였는데 대표적인 의열투쟁은 강우규 열사(1855-1920)의 제등실(齊藤 實) 척살시도였다.

강 열사는 평남 덕천군에서 태어났으며 민족정신이 투철한 선각자였다. 그는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이동휘의 뜻에 따라 한의업을 통해 번 재산으로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여 민족계몽에 앞장섰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온 가족이 두만강을 건넜다. 연해주에서 요하현 신흥동으로 이주한 열사는 광동학교를 설립하여 한인자제들을 가르치는 한편 밤낮으로 국가를 되찾을 방략에 몰두하였다.

열사는 3·1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잔혹한 진압으로 장곡천호도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쇄도하자 일본이 신임총독 제등실을 파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열사는 뛸 듯이 기뻐하며 기꺼이 자신을 민족독립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65세였던 강우규는 동양평화를 해치는 신임총독을 척살하여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자 1920년 9월 2일 오후 5시경 폭탄을 투척하였다. 그러나 제등실은 경미한 부상에 그쳤고 강우규는 고문왕 김태석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에도 열사는 일본 경찰부장에게 일장훈시를 하여 일본의 무도함을 꾸짖었다. 또한 법정에서는 일본은 한국을 통치할 능력이 없으며 결코 일본에 동화되지도 않는다고 재판장에게 호통을 쳤다. 일제는 서둘러 강우규 열사를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하였다. 산화하기 전 열사는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단두대에 올라서니 봄바람이 부는구나( 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회한이 없으리요(有身無國 豈無感想).” /글·사진=박주성 글로벌평화연구소장

■박주성 소장은

 

 

박주성

박주성 소장은 현재 전남대에서 강의중이며 국제분쟁과 평화학, 남북통일문제, 호남정신을 연구하고 있다. 글로벌평화연구소 소장, 통일부 광주통일교육센터 운영위원, 재외한인연구 편집이사, 호남의병연구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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