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 작가의 광주를 빛낸 의인들
(3)아름다운 사람 윤한봉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없이 살다간 ‘촌놈’
5월 영령에 부끄럽지 않고자 무소유 삶…통장도 없어
미국 망명 후 ‘민족학교’ 설립…광주 수난자들 후원
청년들, ‘삔들바우’ 대신 ‘곰바우’로 살아가길 요청

윤한봉.
합수 윤한봉

그는 촌놈이었다. 평생 양복을 입지 않았고 구두를 신지 않았다. 그냥 잠바 걸치고 운동화로 살았다. 강진에서 자랐으니 영락없는 전라도 촌놈이었다. 뒷산 진달래꽃을 좋아했고, 칠량 앞바다와 이야기하며 자랐다. 슬픔이 있어 그가 물으면 바다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에게 말해주었다고 한다. 분명 그에게는 시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최권행의 통찰 그대로 “시적 열정과 달변, 역사에 대한 통찰로 보아 그의 전생이 아마도 호메로스 비슷한 음유시인”이지 않았을까?
그는 윤한봉이었고 호는 합수였다. 정약용의 생가, 양수리(兩水里)에 가시라. 북한강과 남한강 두 물줄기가 만나는 이곳, 보슬비 내리는 봄 날 해질녘에라도 가면 강위로 흰 물새가 날고 있을 것이다. 합수는 이런 고아한 풍경의 합수가 아니다. 똥물과 오줌물이 뒤엉킨 노란빛깔의 액체, 삭혀 시골 뒷산 비탈 밭에 뿌려지는 거름이었다. 고약하였다. 코를 찌르는 이 물질을 합수라 한다. 윤한봉은 왜 자신을 합수라 하였을까?
최권행이 윤한봉을 호메로스에 견주었으니, 나도 청년 한봉을 오디세우스에 견주고자 한다. 오디세우스는 지중해를 떠돌아 다녔다. 청년 한봉은 오월 광주 항쟁의 괴수로 지목되어 서울의 달동네를 떠돌아 다녔다. 오디세우스는 여신 칼립소의 품에서 벗어나 마침내 귀향의 배에 몸을 실었다. 배는 뗏목이었다. 청년 한봉이 마산항에서 탄 배는 표범호였다. 표범호는 적도의 태평양을 넘어 호주로 갔고, 다시 호주에서 적도의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청년 한봉은 환풍기도 없는 화장실 안에 숨었다. 이글이글 타오른 적도의 열기 속을 두 번이나 통과했다.
그런데 광주는 윤한봉을 모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촌놈을 소크라테스에 비견한다면 식자들은 배꼽을 쥐고 웃을 것이다. 웃든 울든 나는 윤한봉을 소크라테스에 비견하겠다.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강조했다. 몸의 욕망에 끌려 다니지 말고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라며 가르쳤다. 청년 한봉은 침대 위에서 자는 것을 거부했다. 혁대를 풀고 자는 것도 거부했다. 목욕하는 것도 거부했다.
소크라테스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화려한 옷, 비싼 음식을 비웃었다. 청년 한봉이 소유한 것은 양말 한 켤레와 샤쓰 두 장이었다. 차이가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무소유는 제 영혼의 자유를 누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한봉의 무소유는 먼저 간 영령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한 다짐이었다.
미국에 망명 간 정치인이 있다. 서재필, 그는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분이다. 서재필은 과거에 합격한 뛰어난 실력의 소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미국의 고등학교에 들어가 영어와 라틴어를 배운다. 조선족 최초의 세계인이었다.
윤한봉은 광주의 운동가였다. ‘윤상원 없는 오월’을 생각할 수 없듯이, ‘윤한봉 없는 오월의 전사(前史)’를 생각할 수 없다. 청년 한봉이 미국에 가서 제일 먼저 추켜든 일은 ‘민족학교의 설립’이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윤한봉을 만나 ‘새로운 삶’을 결단하였다. 윤한봉과 재미 한국 청년들은 밥을 아끼고 담배를 줄이면서 광주의 수난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을 모았다. 수 십 만 불의 성금을 광주에 보냈다. 깡통을 주웠고, 헌 옷을 모았으며, 혹한의 추위에 크리스마스트리를 팔았다.
미국에 망명 간 정치인이 또 있다. 이승만이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윌슨 대통령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였다. 윤한봉은 미국인에게 구걸하지 않았다. 워싱턴의 정치인들을 가르쳤다. “한미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동등한 관계로 바꾸라.”
이승만도 윤한봉도 로비를 하였다. 다른 것이 있었다. 윤한봉은 Korea Report라는 정책 이론지를 발간하였다. 이 자료를 가지고 미 의원들과 토론을 하였다. 전라도 촌놈이 미 의회 의원들을 상대로 영문 정책이론지를 발간하였다는 것,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외교부가 해야 할 일을, 한 푼의 상근비도 받지 않는 청년들이, 도리어 상근자가 고액의 회비를 납부하면서, 대신 하였다. 희한한 일이었다. 윤한봉과 재미 한국 청년들은 무섭게 헌신하였다.
윤한봉은 청년들에게 제 이름을 앞세우는 ‘삔들바우’가 되지 말고, 묵묵히 헌신하는 ‘곰바우’가 되길 요청했다. 그는 자신의 사재를 모으는 통장 하나 갖지 않았다.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윤한봉이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다. 소설가 홍희담은 합수의 영전에 만사를 올렸다. “이런 사람이 걸은 적이 있었기에 이 행성은 아름답다.” /황광우(합수 윤한봉 기념 사업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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