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정 동화작가의 남도일보 월요아침
이 땅의 모든 기생충을 위하여!
최유정(동화작가)

원고 마감 때문이기도 했고 머릿속이 복잡해서 영화를 보지 않았다. 말끔한 기분으로 영화에 집중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SNS에 난무하는 영화 후기 또한 한 몫을 했다. 봉준호 감독과 영화 ‘기생충’에 대한 찬사야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지 이미 오래, ‘불쾌하고 불편한 조우’ ‘가난한 자들에 대한 폄훼’ 등 찬물을 끼얹는 부정적 평가 또한 찬사 못지않게 연일 쏟아지고 있었다. 극과 극으로 치닫는 평가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고 싶다는 욕심 이면에는 예술 작품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철저히 개인의 몫이라는 내 나름의 이유가 숨겨져 있었다. 어쨌든 나는 여타의 평가와 분석에 일부러 귀를 닫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며칠 전 영화 ‘기생충’을 드디어, 봤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강렬했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자리를 뜨지 못했다. 자리를 뜨지 못 한 이유는 ‘혼란스러움’ 때문이었다. 나의 ‘혼란스러움’이 세간에 떠도는 영화에 대한 부정적 평가, 즉 불편함이나 불쾌함으로 대처될 수 있다면 ‘공감’과 ‘혼란’이 묘하게 공존해 있는데서 오는 불편, 불쾌함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영화가 주는 복합적 감정을 해석하는데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소비했다. 내게는 좀체 없는 일이었는데 영화 기생충에 동원된 여러 ‘상징’들과 실재의 ‘나’ 그리고 ‘우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보다 더 내밀하게 연결하고 들여다봐야 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드러내 보이는 평가나 분석은 자로 재듯 정확하고 냉정할 수 있지만 자신에게로 향하는 자기 고백, 독백은 좀체 쉽지 않고 은근, 내밀한 법이다. 어쨌든 ‘기생충’은 ‘나와 우리’를 들여다보게 만든 꽤 아픈 영화였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영화를 통해 많은 것을 짚어 낼 수 있겠지만 한정된 지면인 까닭에 몇 가지만 곱씹어 보겠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은유는 ‘냄새’이다. ‘냄새’를 통해 위기와 절정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냄새’ 는 기택 네와 박사장네가 층위가 완전히 다른 계급임을 엄연히 확인시켜 주는 기제이다. 기택네를 독립적 객체가 아닌 가진 자에 덧붙어서 살아가는, 가진 자의 몸에 붙어서 양분을 빨아 먹고 사는 존재로 추락시키는 기제로 작동하는 ‘냄새’는 기우의 아버지 기택의 분노를 끄집어내는 역할을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과연 우리 사회에는 봉준호 감독이 메타포로 사용한 ‘냄새’, 지하철에 비릿하게 스며있는 그 ‘냄새’가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나는 과연 그 냄새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일종의 ‘거울보기’가 영화를 보는 내내 일어났으며 나는 공감과 낭패감으로 말미암아 아주 많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어느 장면에서는 기택네와 한 가족이었고 어느 장면에서는 박사장네 가족에 속해 있었다. 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내내 불쾌함과 불편함을 느낀 모든 사람들 또한 나와 같은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그 ‘경계’에 서 있게 만든 ‘사회’를 작동시키는 시스템, 눈에 보이지 않는, 보이는 모든 세력에 화가 치밀었다.

기택과 박사장의 대사와 행동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것처럼 ‘경계’에 서고자 한 의도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경계를 지어 이쪽과 저쪽으로 ‘우리’를 감쪽같이 나누어 버렸으니 말이다. 나는 눈물이 나왔다. 기택이 박사장을 죽이고서 ‘미안하다’ 라고 뇌까린 것처럼 나 역시 아무런 잘못 없이 죽은 그가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기택의 분노가 만들어지고 폭발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기택 또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도를 낸 가장이지만 기택은 행복한 가족의 아버지였다. 남편의 무능함을 탓하고 구박하긴 해도 기택의 아내는 그 누구보다 기택을 사랑했으며 성장한 자식들 또한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기택을 든든한 둥지 삼아, 모두 행복했다. ‘가난함’이 죄가 아니었던 상황에서 ‘가난함’이 죄가 되어버리는 지점. 그 지점에 ‘냄새’가 있었다.

영화 중 가장 슬펐던 장면은 테이블 밑에 숨어 있던 기택이 박사장의 말을 엿듣고 낡아빠진 자신의 옷 냄새를 자꾸, 자꾸 확인하는 장면이다. 숨어 있어야 하는 상황도 비참한데 킁킁거리며 자신의 냄새를 확인해야 하는 기택. 나는 테이블 밑에 숨어 있는 기택이 평생을 살면서 느끼지 못 했을 모멸감, 수치심, 아들과 딸에 대한 미안함을 한꺼번에 와락, 느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감히 그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모멸감, 수치심, 미안함! 기택이 자신의 옷 냄새를 맡는 장면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그 자존심이 무참하게 짓밟힌 장면이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안락한 소파에 박사장과 함께 앉아 있었으며 기택과 함께 식탁 밑에 숨어 있었다. 나는 공감과 동시에 분노하고 있었다.

깊이 공감하고 분노함에도 불구하고 해석 안 되는 장면도 있었다. 부자 친구가 준 돌덩어리를 강에 놓아두고 오는 기우. 돌덩어리를 간직하지 않고 던져버리는 기우의 행위에 안도하면서도 나는 박사장네 대문 앞에 선 기우의 마지막 독백이 불안했다. 기우가 욕망하는 것이, 욕망하게 된 것이 무엇일까? 궁금하고 불길했다. 기택네를 파괴시킨 시작점이 돌덩어리였던 만큼 그 돌덩어리를 내다 버린 기우의 행동이 무척 믿음직스러웠는데 어찌하여 기우는 박사장네 대문 앞에 다시 선 것일까? 자신의 손으로 박사장의 집을 사겠다는 기우의 포부가 나는 불안하고 불길했다. 기우의 힘으로 박사장의 집을 산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싶은 의구심도 불안함을 키웠다.

어쨌든 영화는 끝났다. 하지만 여운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길고 긴 여운을 내게 남겨 준 영화 ‘기생충’ 그리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시나리오를 고치고 또 고쳤을 거장 ‘봉준호!’ 영화와 감독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아, 배우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기택을 만날 수도 없었을 테고 박 사장을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한 생에 여러 삶을 거치고 살아내야 하는 배우들. 그네들의 수고로움과 버거움에도 고개 숙여 감사함을 전한다. 나를 비롯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기생충’들에게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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