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93.나주읍성과 나주의 전통

전라도 격변의 역사를 모두 품고 있는 나주읍성

오랜 옛날부터 사람·물자 중심지 읍성 생겨나
공식기록은 고려 때 축조 조선 때 석성 개축

왕권·행정의 중심지…忠·義 중시 보수성 강해
고려건국 토대·삼별초 군과도 맞서 왕조 지지

조선 사림 요람, 동학농민군 진압·처형장 역할
첫 호남의병 일어선 곳이나 忠 우선에 자진해산

외국인 선교사들도 나주 보수성 극복 못해 철수
4개 읍 성문 모두 복원, 교훈 깨닫는 현장 돼야
 

나주읍성 북망문. 나주읍성이 품고 있는 역사의 깊이는 넓고도 깊다. 나주읍성은 파란만장했던 전라도 역사의 편린들을 더듬어볼 수 있는 곳이다. 최근 나주읍성 4개 읍성문은 모두 복원됐다. 단순한 볼거리로만 여기지 않고 역사의 교훈을 깨닫는 장소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나주읍성의 역사적 의미

나주읍성이 품고 있는 역사의 깊이는 넓고도 깊다. 진훤과 왕건이 각축을 벌였던 곳이고, 삼별초의 공격과 몽골군의 진군, 임진·정유재란의 환란, 동학농민군의 공세와 항일의병들의 기병 등이 담겨 있다. 역사의 현장이자 유적인 나주읍성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지금의 나주읍성은 복원된 것이기에 지금의 나주읍성 석축에는 세월의 풍파가 없다.

비록 지금의 나주읍성이 과거의 모든 역사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나주읍성을 통해 나주가 겪어온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와 편린을 헤아려볼 수 있다. 기록에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잃어버린 나주 역사의 퍼즐 맞추기’를 시도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나주읍성 성문과 성루에 올라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밝고 건강한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주의 보수성(保守性)

○왕건과 나주

나주는 전통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고을이다. 먼 옛날부터 나라(부족연맹체)의 중심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이 있는 곳에는 항상 체제를 유지하려는 핵심세력들이 있다. 보수적인 기운을 지닐 수밖에 없다. 후삼국 시대의 나주 일대 백성들은 진훤을 지지했다. 왕건과 진훤이 영산강 유역의 패권을 놓고 다툴 때 나주의 토호 오다련이 왕건의 편에 섰지만 영산강 유역 세력 대부분은 진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왕건은 진훤을 물리치고 우여곡절 끝에 고려를 세웠다. 왕건을 도운 오다련은 개국공신이 됐다. 910년 오다련의 딸은 왕건의 부인(장화왕후)이 됐다. 장화왕후는 2년 뒤인 912년 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무’라 했는데 무는 고려 2대 왕인 혜종이 됐다. 나주는 고려 개국의 일등공신이 사는 고을이자 왕을 배출한 고을이 됐다.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은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의 제2차 침입(1010년)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공주를 거쳐 나주까지 피신해왔다. 현종이 나주를 최종 피신처로 삼은 것은 나주가 고려왕실의 보루였기 때문이다. 나주시 대호동 금성산에 있는 심향사(尋香寺)는 현종이 나주에 머물 때 나라의 평안을 빌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872년 제작된 나주목고지도.

○삼별초와 나주

나주는 또한 삼별초와 맞서 싸운 고을이기도 하다.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1270년 6월 1일 난을 일으킨 뒤 강화도를 빠져나와 진도로 이동했다. 진도에 터를 잡은 삼별초는 그해 8월 19일 전라도 해안가의 여러 주·군(州郡)을 점령했다. 그리고 9월 2일에는 나주로 진출해 성을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까지 공격했다.

삼별초 군대가 나주를 공격해온다는 소식에 나주를 지키고 있던 전라도 토적사 신사전과 전주부사 이빈은 나주성과 전주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나주부사 박부는 항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주사록을 맡고 있던 상호장 김응덕이 백성들을 설득, 금성산으로 들어가 삼별초의 공격에 대비해 가시울타리를 치고 수성을 준비하기도 했다.

나주 군사들이 금성산(성)으로 들어갔다는 말은 나주읍성을 포기했다는 의미다. 수가 많고 용맹한 삼별초를 성벽이 낮고 약한 나주읍성에서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판단했기에 산성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나주를 공격한 삼별초 병사의 수가 얼마나 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할 때 삼별초 무리가 탄 배가 모두 1천척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삼별초 병사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지역이 모두 삼별초의 세력권에 들어갔을 때 나주가 삼별초에 맞선 것에서 나주의 보수성과 자존심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나주사람들은) 고려왕실의 본향 사람들인데 어찌 반란군인 삼별초에 굴복할 수 있겠냐’는 충의와 자존심이 삼별초와 맞서 싸우게끔 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과 나주

왕권과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성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나주는 고려 이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최대 고을이었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음력 7월부터 11월까지 동학농민군 핍박의 중심지인 나주를 함락시키기 위해 여섯 차례나 대규모 공격을 실시했다. 그렇지만 나주목사 민종렬과 도통장 정진석 등의 활약으로 나주읍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나주의 보수성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읍성에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입증된다. 당시 나주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농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고을이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인 1894년 전라도에는 53주읍(州邑)이 있었는데 나주와 남원, 운봉에만 동학군이 지역 행정을 관할하는 집강소가 설치되지 못했다.

나주는 동학농민군 진압과 토벌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전라우영 건물 중에는 세검당(洗劍堂)있었다. 세검은 ‘칼을 씻는 곳’이라는 뜻으로 군 시설이 있는 곳을 뜻한다. 나주읍성의 남쪽성문(남고문)을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던 건물로 군마를 검열하던 곳이다. 또 군사훈련을 실시하던 곳이기도 했다. 세검당은 무학당(武學堂)으로도 불렀다.

나주읍성 남고문.

무학당은 천주교 박해 당시 천주교신자들을 처형했던 곳이다. 향교를 중심으로 효와 예·충이라는 성리학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신봉해왔던 유생들의 입장에서는 신분평등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학’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교(邪敎)에 불과했다. 조선조정과 나주유생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서 각지에서 끌려온 천주쟁이들은 무학당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무학당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조선관군과 일본군의 숙영지로 사용되면서 ‘동학군 토벌의 지휘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 무학당 일대의 야산은 체포해온 동학농민군을 가둬둔 토굴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나주 옥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전라도 곳곳에서 붙잡혀온 600명이 넘는 동학농민군들이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주 남산일대에 토굴을 파고 동학농민군들을 가둬두고 처형했다.

동학농민혁명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외세를 배격하자는 민중봉기였다. 그러나 엄격한 신분제 유지를 희망하면서 왕권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유생들에게는 ‘나라를 뒤엎는 반란’에 불과했다. 동학농민군을 역도로 간주했다. 나주의 지도층인 유생들은 동학과 동학농민군에 적대적이었다. 나주가 동학농민군 진압에 있어 중추핵심지역 기능을 했던 사실은 이후 근현대사 전개과정에서 나주가 동학농민혁명 평가와 추모 사업에 비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호남의병(단발령)과 나주

나주의 보수적인 분위기는 단발령과 관련해 나주 관찰부(觀察府)의 참서관(參書官:부관찰사로 지금의 부지사 격)이었던 안종수(安宗洙)가 살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안종수는 개화파 인물로 1895년 11월 나주에서 무리하게 단발을 실시했다. 자신이 단발을 한 뒤에 관찰사 채규상을 위협해 강제로 상투를 자르게 했다.

그리고 부하 최경판(崔敬判)으로 하여금 군졸들을 데리고 나가 나주읍성 백성들의 상투를 잘라내도록 했다. 100여명의 아전과 백성들이 강제로 머리카락을 깎였다. 안종수와 그 부하들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다. 나주의 유생들과 백성들은 안종수의 단발조치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안종수는 수성군을 출동시켜 부민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런데 1896년 음력 2월 9일 나주의병이 거병하면서 안종수와 그 부하들을 살해해 버렸다. 2월 11일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이 나주로 이동해 나주향교에 집결했다. 명성황후 시해와 일제의 내정간섭, 단발령 등에 반발해 기병했던 나주·장성의병들이 참으로 허망하게 해산한 것도 고종의 의병해산종용이었다.

충성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는 유생들의 입장에서는 왕이 선유사(宣諭使)를 보내 해산하라고 명하니 이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조정의 잘못이 제 아무리 크고 일제의 강압이 지나쳐도 왕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왕권에 절대복종하는 나주 유생들이 지도자로 있었던 나주의병의 행동반경에는 한계가 있었다.

○근대기 외국인 선교사와 나주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 전라남도 선교의 중심지로 당초에는 나주를 선정했으나 결국에는 광주로 옮겨가고 만 것도 나주유생들의 반발과 거부감 때문이었다.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이눌서) 목사는 전라도 선교를 위해 1894년 3월에서 5월까지 전라도 답사여행을 했다.

이후 레이놀즈 목사와 벨(Eugene Bell: 배유지) 목사는 1896년 2월 선교 부지를 구입하기 위해 목포를 방문했다. 이후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나주를 전라남도의 선교후보지로 지정하기 위해 나주를 찾았다. 그렇지만 나주를 방문한 선교사들은 홍역을 치렀다. 그 어느 곳보다 유생들의 세력이 컸던 나주는 낯선 외국인들의 신앙과 활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나주가 아닌 광주에서 우선 선교활동을 벌일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미국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윤치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윤치호의 아버지는 윤웅렬(尹雄烈)로 전라남도 초대관찰사로 광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윤웅렬 역시 나주의병들의 해코지가 두려워 관찰부가 있는 나주에서 일하지 못하고 광주 진위대 병영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모두 충과 의, 조상에 대한 예를 중시하는 나주의 전통에서 비롯된 일이다.

■나주읍성 복원

나주읍성 영금문(서성문).

나주읍성은 통일신라시대 토성 축조기술을 이용해 고려 때 쌓인 판축토성이었다. 조선 1404년(태종 4) 10월에 읍성을 고쳐 쌓으면서 돌로 축조했다. 토성에서 석성으로 바뀐 것이다. 조선 후기에 나주읍성의 둘레는 3.7㎞로 확장됐다. 나주읍성은 옹성과 함께 문루를 갖춘 4대문이 있었다. 나주읍성 안에는 십자형의 도로가 있어 관아건물을 이어주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성벽은 대부분 헐렸고 극히 일부만 남아있다. 교동에는 서벽(西壁)의 일부가 남아있는데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돌 크기는 길이 19m, 높이 90~240㎝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을 1×1m 크기의 자연석을 겉면에 놓고 ‘잔돌 끼움 방식’방식에 의해 쌓아 올렸다. 북벽(北壁)의 성돌은 산정동과 나주 중앙초등학교 뒤편에 일부 남아있다. 동벽은 중앙동 천변부근에 석축의 일부가 확인됐으나 남벽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872년 제작된 나주목 지도를 보면 나주읍성 4개 성문 안에는 여러 관아 건물이 꽉 차있다. 나주목사가 근무했던 동헌(제금헌), 내아, 객사인 금성관을 중심으로 해 서쪽에는 장청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쪽성문(서성문) 밖에는 향교가 있다. 또 동쪽으로는 훈련청과 군기고, 옥(獄)이 위치해 있었다. 북쪽에는 읍창과 향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쪽성문(남고문)을 조금 벗어난 곳에는 진영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토포청과 이청, 전라우영에 속한 여러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주읍성 동점문.

나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철거됐다. 나주시는 4대문 복원계획을 수립해 1993년에 남고문(南顧門)을, 2005년에 동점문(東漸門), 2011년에 영금문(映錦門:서성문), 2018년에 북망문(北望門)을 각각 복원했다. 나주시는 나주읍성을 주요 역사문화유산으로 삼아 도시재생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야기가 있는 고샅길 정원 만들기’를 위해 나주읍성 곳곳에 스며있는 사연들을 발굴하고 있다. 나주읍성에는 삼국시대 이후 1천500여년의 역사가 알알이 배어있다. 역사의 향기와 교훈이 즐비하다. 나주읍성에 오르면 우리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보인다.

도움말/김정호, 강봉룡, 박선홍, 노성태, 조광철

사진제공/위직량, 임문철, 정성길, 나주시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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