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특별기획>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3부>러시아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과 신북방정책
(1)백암 박은식과 연해주 노인동맹단
★(2)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독립운동
(3)연해주 우수리스크 고려인 아리랑
(4)연해주와 평화 번영의 신북방정책

한일합방 후 최초 임시정부 ‘대한국민회의’ 탄생
이동휘 등 연해주 각계 인사 참여…문창범 의장 선출

손병희 대통령 추대…국내진입전 위해 독립군 훈련도
상해·한성임시정부 성립 촉발제…상해임정과 통합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1900년대 초 모습./구글
1860년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인들./세계한민족문화대전

러시아 연해주는 1850년대부터 조선인들의 왕래가 있었으며, 기록상으로는 1860년 농민 13세대가 빈곤과 기아의 탈출구로서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 유역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한국과 러시아가 두만강 하류에서 접경하게 된 것은 1860년 9월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러시아가 우수리강 동안(東岸)을 영유하게 된데서 비롯됐다.

연해주 지역은 일찍이 대한제국시절 간도관리사를 지낸 이범윤과 네델란드 헤이그에 파견 되었던 이상설, 이위종 등의 밀사들이 연해주에 정착하면서 한인들의 단결과 자치를 위해 ‘권업회’와 같은 한인회 기구들이 조직되었다. 이에 따라 연해주는 점차 항일의병의 전초 기지로 자리잡았고, 한일병탄을 계기로 일제의 핍박을 피해 한인들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1910년대 초에는 연해주일대 한인들의 인구가 10만을 넘었다.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러시아는 한인들의 자치를 수용하고 장려하여 최재형 등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을 사실상의 책임자로 인정하였다.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결사한 신민회의 구성원들인 이시영, 이동녕, 이동휘 등도 연해주로 모여들어 한인촌을 거점으로 ‘동의회’ 등을 설립해 연해주 전역의 동포들을 규합하여 재외 독립운동의 전진기지로 점차 발전하였다.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인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던 임시정부 형태의 단체를 말한다.

1919년, 최초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결성 사진./일요뉴스

◇연해주지역 정치·사회적 배경(1900년대 초)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하자 동부 시베리아에 출정하였던 러시아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시베리아 일대가 혼란에 빠짐에 따라 1905년 한인사회가 자위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족회(韓族會)를 구성 했다. 이어 1907년 소성(蘇城)에서 대한교육청년회와 공진회(共進會)가 1909년 공공회(公共會)가 조직되었다. 1910년 6월 연해주에 망명한 의병을 중심으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이 조직되었다. 이때 유인석이 도총재(都總載)로 추대 되었는데, 13도의군 도총재 명의로 고종이 연해주로 망명해 망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의 한국강점 소식이 전해지자 이상설은 즉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를 조직하고 한국국민위원회 명의로 8천624명의 연명을 붙여 각국 정부에 일제의 국제적 배신행위를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것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송하였다.

이범윤은 의병에 의한 국내진공작전과 나아가 독립전쟁을 계획하였다. 이에 놀란 일제는 러시아에 항의 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해 9월 러시아 당국에 의해 13도의군과 성명회 간부가 붙잡히고 이상설, 이범윤 등은 이르쿠츠크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석방 되었다. 그 뒤 이상설은 1911년 5월 이동휘의 협력을 얻어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본부를 두고 표면상으로는 한인들의 산업 권장과 교육 보급을 내세우며 실력을 길렀다.

비슷한 시기에 재미교포단체인 국민회(1909)가 조직되고, 미국에서 돌아온 정재관(鄭在寬)등의 노력으로 시베리아에 16개, 만주에 8개의 지방회(1911)가 조직되었다. 1914년 당시 시베리아에는 2만 9천365명의 의병이 1만3천자루의 총을 가지고 각지에서 훈련 중이었으며,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때 러·일개전설이 나도는 가운데 이상설을 정통령(政統領)으로 하는 대한광복군정부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같은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러·일이 연합하면서 러·일개전의 가능성이 무산되고 러시아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일체의 단체활동을 금지함에 따라 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은 침체되었다.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 장소./tourtips.com

◇대한국민의회 성립과정

1917년 러시아에서 2월혁명이 일어났고 11월혁명이 일어나 볼세비키 혁명정부가 들어서자, 러시아는 전국이 적백의 싸움으로 혼란하게 되었다. 이에 자극된 오영준, 유스테판, 김립 등 한인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사회주의운동 활동가들이 총망라된 전로한족대표자회를 조직하고 1918년 1월 대표자회의를 소집해 한족중앙총회 조직을 결의하였다. 전로한족대표자회는 1918년 6월 니콜리스크에서 열린 제2차 회의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발기하였다. 간부진은 회의 마지막 날인 13일 선임하였다.

이때 회원은 2천여명 이었고, 회장으로 한군명(韓君明), 군사부장 오영선, 재무부장 김영학, 이동휘 등도 선임 되었다고 전해진다. 문창범(文昌範), 김립(金立), 윤해(尹海), 등도 중요한 일을 맡았다고 한다.

대회의 결의사항은, 첫째 한인에 대한 러시아정부의 동화정책 반대, 둘째 앞으로 소집될 러시아 입법회의에 한인 의석하나를 요구, 셋째, 현존 한인학교의 개선 등이었다. 러시아 임시정부에 지지 전보를 보냈으며, 기관지로 한인신보(韓人新報)를 발행하였다.

1918년 1월 이동휘가 하바로프스크에서 박진순(朴鎭淳)을 통해 공산주의 선전요원 그레고리노프와 접촉하고 5월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다. 이동휘는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어떠한 외세도 독립운동에 이용하려하던 차에 온갖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는 선전에 혹했던 것이다. 한인사회당은 전로한족회중앙총회와 협력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시베리아에 출동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러시아령 지역 독립운동은 타격을 받아 다시 침체기에 빠졌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는 등 새로운 국제정세가 전개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1919년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로 개편되었다.

연해주 한인들의 구심점인 신한촌 기념탑./newssunday.co.kr

◇대한국민의회의 출범

대한국민의회는 의장에 문창범, 부의장에 김철훈, 서기에 오창환을 선출하였으며, 독립을 선포하고 일제가 불응하면 혈전을 포고하겠다는 내용의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① 대한국민의회는 조국독립의 달성을 기약하며 세계민족자결주의에 기인하여 한국민족의 정당한 자주독립을 주장함.

② 한일합방조약은 일본의 강압적 수단으로 성립한 것이고 우리 민족의 의사가 아니므로 그 존속을 부인하며 일본의 통치 철폐를 주장함.

③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의에 대표를 보내어 우리의 독립운동과 정부 건설의 승인을 요구하며 국제연맹의 참가를 주장함.

④ 한국 독립운동의 실정을 세계에 선전하며 정부 건설의 사실을 각 국 정부에 통지하여 우리의 주권을 주장함.

⑤ 이상의 목적이 인도와 정의의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면 일본에 대하여 혈전 포고를 주장함 등이다.

그리고 별도의 행정부를 조직하여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 탁지총장에 윤현진, 군무총장에 이동휘, 내무총장에 안창호, 산업총장에 남형우, 참모총장에 유동열, 강화대사에 김규식을 각각 추대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정부 구성. /edunet.net

대한국민의회는 70~8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계 각층의 인물을 망라하였다. 집행부서로는 독립군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한 선전부, 독립군자금 모금을 담당한 재무부, 무기 조달을 담당한 외교부를 두었다.

각국 영사관에 이와 같은 대한국민의회의 성립을 통보하자 미국, 프랑스 영사는 동의를 표하였다. 각지의 한인들은 독립을 선포하고 경축식을 올렸다. 대한국민의회는 독립군과 군자금을 모집, 모금하고 총기도 구입하여 독립군을 훈련시켰으며, 국내진입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대한국민의회는 먼저 발표한 각료들의 행정부가 발족되지는 않았지만 정부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해 4월 11일 발족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사이에 통합문제로 왕래가 있게 되었다. 4월 15일 대한국민의회 대표 원세훈이 상해 임시정부에 임시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를 병합하고 정부의 위치를 러시아령으로 옮기자고 제안 하였다. 이에 임시의정원은 5월 13일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의회를 통일할 것을 결의하고, 7월 11일, 임시정부의 위치는 상해에 두되 변경할 수있다. 그리고 임시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를 합병하여 의회를 조직하되 러시아령 측에서 강력히 주장할 때는 러시아령에 둘 수 있다고 유연한 결의를 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상해 측에서 특사로 파견한 내무차장 현순(玄楯), 그리고 김성겸(金腥謙)과 교섭하였다. 이동휘가 그 결과를 대한국민의회 의원들에게 의원의 5분의 4가 상해의 임시의정원에 들어가기로 되었다고 설명함에 따라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는 해산을 결의하였다.

대한국민의회와 상해임시정부의 완전통합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상해 임시정부측에서 보면 대한국민의회의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그 권위와 대표성은 크게 강화되었다.

그 뒤 대한국민의회는 활동을 재개하였고, 1920년 2월 15일 정식으로 복설(復設)을 선언 하였다.

2017년 9월 7일 연해주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동포 간담회에서 화동으로 꽃다발을 받고 있는 모습./구글
연해주 독립운동 대한국민의회 기념식./Jamir.or.kr

◇ 대한국민의회의 의의와 평가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은 임시정부 수립을 향한 도화선이 되었고, 이어서 기미독립선언과 3·1운동은 그 기폭제가 되었다.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문창범 등이 미주지역의 안창호와 연락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대한국민의회를 구성 했다.

대한국민의회는 한일합방 이후 최초로 조직된 임시정부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정에 연해주지역의 다수 인사들이 참여하거나 내각에 이름이 들어 있음을 볼 때 상해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의 성립을 불러오는 촉발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국민의회는 한말 이후 러시아령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고 그 역량을 총집결하여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한 러시아령 지역의 한인 임시정부로서 독립운동사상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단체이다./박찬용 광주통일교육센터 사무국장·정치학 박사

박찬용 박사

박찬용 박사는 통일부 광주통일교육센터 사무국장이자 광주지역 대표 통일강사로 광주경찰청 의경교육센터, 일반관공서, 중,고등학교 등에서 열정적으로 통일교육에 임하고 있다. 평화통일포럼 사무처장과 지역신문 칼럼 필진등으로도 활동중이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