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94. 전라도 장승 이야기

험상궂으나 웃는 듯…조상의 슬기와 바람이 담겨있네

장승, 경계표시와 거리안내 위한 나무·돌기둥
벅수, 역병·잡귀 막고 소원 비는 마을 수호신

긴 세월 뒤 장승·벅수 혼용 같은 의미로 사용
“일제 민족혼 말살로 ‘벅수’ 단어 사장” 주장도

나주·영암·신안 등 전남지역 51개소 장승 존재
조상의 삶과 해학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자산

 

■ 판문점의 콘크리트 경계(境界)

2019년 6월 30일, 남북한 판문점에서는 세기의 사건이 벌어졌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군사 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에 들어간 것이다. 판문점 내 남북한의 경계는 5센티미터 높이에 불과한 콘크리트.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권유에 따라 남북경계선을 넘어 북측지역 판문각 앞까지 걸어갔다.

남북경계선을 트럼프 대통령이 넘은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교전당사국인 미국과 북한은 지난 1953년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교전당사국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 북쪽으로 건너간 뒤 다시 남쪽으로 넘어온 것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됐음을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이벤트의 핵심은 ‘경계를 건너가고 넘어온 행동’이었다.

2018년 4월 남북 정상회담 때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판문점의 콘크리트 경계를 넘어 북쪽으로 넘어갔다. 당시 남북한은 극도의 긴장상태에 있었다. 그렇지만 5센티미터에 불과한, 그 경계를 넘어감으로써 문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하지 않고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북한 땅을 방문한 세 번째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인류사회는 예전부터 많은 경계가 있어왔다. 사람들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城)을 쌓고 그 안에 살았다. 성벽은 경계였다. 사찰(寺刹)의 일주문(一柱門)은 청정한 도량과 번잡한 속세를 구분하는 문이기도 했다. 이 문을 들어설 때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一心)이 돼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에는 삼한시대 제사를 지내는 ‘소도’(蘇塗)에 대한 언급이 있다. 소도는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공간이었다. 입구에는 큰 나무가 있었고 거기에는 방울과 북이 매달려 있었다고 적혀있다. 큰 나무와 방울, 북이 경계의 역할을 한 것이다. 범죄자가 그 안으로 도망가면 쫓아가지를 못했다고 한다. 방울과 북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임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참혹하고 잔인했던 ‘가시울타리 경계’도 있었다. 조선시대 왕들은 목숨을 빼앗는 것은 심하고, 그렇다고 유유자적한 귀양살이하는 것은 허용하기 싫은 대신들을 가시울타리 안에 가두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위리안치(圍籬安置)다. 가시울타리를 넘는다는 것은 곧 왕명을 어기는 것이었다. 죽음을 당하는 사선(死線)이었다.

■ 경계(境界)로서의 장승과 장승의 기원

병영성 홍교의 석장승(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예부터 우리 사회에는 많은 경계가 있었다. 장승은 그 중의 하나다. 장승은 ‘기둥 모양의 통나무나 돌 따위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새겨 세운 것’을 말한다. 장생, 후, 장생우, 장선주(長先柱), 장선(長先·長仙) 이라고도 불린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장승에 대한 정의가 다음처럼 나온다.

‘마을의 수문신·수호신, 사찰이나 지역간의 경계표, 이정표(里程標) 등의 구실을 하며,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나무기둥이나 돌기둥의 상부에 사람 또는 신장(神將)의 얼굴 형태를 소박하게 그리거나 조각하고, 하부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 등의 글씨를 새겨 거리를 표시한 신앙대상물이며, 보통 남녀로 쌍이 되어 마주 서 있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장생(長生)·장생표주(長生標柱)·목방장생표(木傍長生標)·석적장생표(石蹟長生標)·석비장생표(石碑長生標)·국장생(國長生)·황장생(皇長生)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에는 승·장승(長丞·長承)·장생우·후·장성(長性·長城)·장선주(長先柱)·장선(長先·長仙)·댱승·쟝성·장신 등 다양한 명칭이 기록돼 있다.

현지 조사자료에 의하면, 전라남북도·경상남도 해안에서는 장승·장성·벅수·벅시·법수·법시·당산할아버지, 충청남북도에서는 장승·장신·수살막이·수살이·수살목, 경기도에서는 장승,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댱승·돌미륵,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우석목(偶石木)·옹중석(翁仲石)·거오기·거액 등의 명칭으로,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고 있다. 또한 전국의 장승유적 가운데 명칭을 장승·장성·장신으로 부르는 곳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벅수·벅시 등이다.

장승의 기원은 고대의 남근숭배(男根崇拜)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사찰의 토지 경계 표시에서 나온 것이라는 장생고표지설(長生庫標識說), 솟대·선돌·서낭당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고유민속 기원설이 있으며, 또한 퉁구스 기원설·남방 벼농사 기원설·환태평양 기원설 등과 같은 비교민속 기원설 등이 있다.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고유민속 기원설과 비교민속 기원설이 함께 받아들여지고 있다.

장승에 대한 기록으로는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의 비명에 신라 경덕왕 18년인 759년의 장생표주에 대한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그 뒤의 기록으로는 943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북도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의 장생(長生), 1085년(고려 의종 2년)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국장생석표(通度寺國長生石標),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道岬寺)의 국장생과 황장생, 1689년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의 석장승, 1725년의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 남원실상사석장승 등이 있다.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노표(路標)와 관련하여 후에 이수(里數)와 지명을 기록하여 10리·30리마다 후를 세우도록 법제화되었고, 이후는 노표 외에도 장생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海東歌謠)등에는 후와 장생을 혼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6세기 이후 장승이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後略)’

■ 장승과 벅수에 대한 정의

여수남정중벅수

박주하는 석사학위 논문인 <호남지방 돌장승의 형상에 관한 연구>에서 ‘장승’을 한국 민간신앙의 상징물일 뿐만 아니라 기층문화와 공동체적 조형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 엄수길 또한 석사학위 논문인 <여수·여천지역에 분포된 석장승 연구>에서 이상일의 견해를 인용해 장승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장승은 옛 조상들에게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소박한 민간 신앙의 대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장승의 문화는 우리의 전통적인 민속 문화재 가운데 우리 민중의 심성(心性)과 신성(神性)을 담은 민중문화의 한 상징이었고 바로 민간신앙으로 이어지는 민중적 존재론을 해명하는 열쇠로서 중요한 영역이다.’

위와 같은 정의에 기초해 보면 민속학계의 대부분 학자들은 장승을 ‘지역 간의 경계표, 이정표(里程標) 등으로 삼기위해 세운 나무 혹은 돌기둥이나 나중에 민간신앙의 대상물이 된 유적’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중국에서 길을 따라 들어오는 역병(疫病)과 귀신(雜鬼)들을 막아내기 위해 용(龍)이나 치우(蚩尤:매우 용맹했던 고대 중국의 왕)의 얼굴을 그리거나 새겨 큰 길의 가장자리에 세워둔 ‘돈대’(墩臺:푯말)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장승과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벅수’다. 김두하는 1986년 민속학회에서 발간한 한국민속학 19집에 실은 그의 소논문 <장승類의 名稱考察>에서 장승이란 명칭의 가장 오래된 기록을 <훈몽자회>(訓蒙字會)로 제시하고 있다. 세종대왕은 1443년에 훈민정음을 제정했다. 1527년에 최세진이 한글을 해설한 <훈몽자회>에서 ‘댱승’이라 표기했다는 것이다.

이사현은 1970년 펴낸 그의 책 <장생>에서 ‘댱승’이라는 이름이 지역별로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이름이 달라졌다는 견해를 보였다. 그는 ‘경기도 충청도의 경우 주로 木장승이 많은데 장승 또는 장신, 수살목, 수살막이 등으로 부르고 호남지방에서는 벅수, 장승, 장생, 미륵 등으로 영남지방에서는 장승, 벅수 등으로 부르며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 偶石木 또는 翁中, 翁中石이라 부른다. 또한 함경도나 평안도에서는 댱승이라 부른다’고 적었다.

박주하 역시 그의 논문 <호남지방 돌장승의 형상에 관한 연구>에서 장승과 벅수를 동일시하고 있다. 논문을 심사한 교수들 역시 이 같은 견해에 동의했기에 논문을 통과시켜줬을 것이다. ‘장승’과 관련된 다른 논문들도 대개 같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호남지방 장승신앙과 조형미에 관한 연구> 논문을 쓴 최정화와 논문심사교수들도 ‘벅수’를 지방에 따라 파생된 장승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견해는 민속학계의 통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에 반해 황준구와 같은 이는 장승과 벅수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장승은 ‘큰길’을 안내하는 기능을 지닌 나무나 돌기둥이고 ‘벅수’(法首)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의 나무·돌기둥이라는 것이다. 그는 벅수의 어원을 불경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법수보살’(法首菩薩)로 제시하고 있다. ‘법슈’는 ‘벅수’의 옛 말이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뜻한다는 것이다.

황준구는 1884년 우편제도가 도입된 후 1895년 역참(驛站)제도가 폐지되면서 장승이 사라져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제가 ‘조선민족 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민속신앙의 뿌리’인 벅수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을 ‘망령된 신앙’(迷信)으로 분류하고 장승에 포함시켜버린 것이 ‘장승=벅수’가 돼버린 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조선총독부가 고려시대 때 절집(寺刹)에서 백성들에게 ‘이자돈놀이’(私債業)를 위해 운영했던 장생고(長生庫:長生錢·長生布)와 절집의 경계(境界)를 표시하는 장생표주(長生標柱·國長生·皇長生)가 장승의 밑바탕이라는 억지를 부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국의 학자들이 일본인들이 왜곡한 한국역사와 한국민속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전혀 다른 개념의 장승과 벅수가 동의어로 사용되는 혼란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 장승(벅수)의 기능

작가는 민속학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장승·벅수에 대해서 깊은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다. 학자들이 쓴 책과 논문을 읽으면서 장승·벅수에 대해 개괄적인 지식을 얻은 사람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 글을 쓰면서 학계와 민속학자들 상당수가 사용하고 있는 ‘장승’의 개념을 좇으려 한다. 그래야 독자들이 글을 읽으면서 혼란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장승과 벅수는 서로 다른 개념이라는 황준구의 주장에 전폭 동의하는 바이다.

장승은 세운 목적이나 위치에 따라 여러 가지 기능을 지녔다. 경계를 나타내거나 행인이 어디만큼에 와있고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가르쳐주고자할 때는 이정표 구실을 했다. 또 외부로부터 병(疫神)이나 나쁜 기운(雜鬼)가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수호신 역할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개인의 무탈함과 복 받기를 소원하는 (무속)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 만큼 사람과 마을과 길이 있는 곳이면 으레 장승이 있었다.

장승은 누가 무슨 이유로 어디에 세웠느냐에 따라 마을장승, 사찰장승, 공공장승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마을장승은 마을에서 신으로 섬기는 대상으로 벽사·축귀(逐鬼)·방재(防災)·진경(進慶)의 기능을 지녔다.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일만 벌어지도록 기원하는 대상이었다. 사찰장승 역시 사찰수호의 기능을 지녔다. 부처님의 정토를 지키고 외부로부터 사악한 기운이 오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했다.

공공장승은 이정표 겸 거리를 알려주는 기능을 했다. 사람들은 장승이 성문·병영, 육로와 해로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이외에도 비보장승은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거론되는 지형의 넘쳐나고 부족함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다. 지세나 산세가 허하면 보충해주고(補虛) 화기(火氣)등이 넘쳐나면 이를 눌러주는(鎭壓) 기능이 보태졌다.

또 어떤 경우에 장승은 남성 성기 모습이 강조된 모습으로 만들어져 다산과 출산을 기원하는 대상으로 삼아졌다. 한편으로는 장승의 코나 눈을 갉은 뒤 감초와 섞어 삶아 아이를 떼는(낙태)의 비방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심지어 성욕을 풀지 못한 남자나 여자들이 여장승과 남장승의 특정부위를 이용해서 욕망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전남지역의 장승(벅수)

1999년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조사해 학계에 알려진 장승 유적지는 대략 540여 기다. 그러나 이후 소멸된 장승도 꽤 된다. 국립박물관에서 발행한 <전남지방의 장승·솟대신앙>과 김두하의 <벅수와 장승>을 참고해보면 전남지역에는 모두 51개소에 장승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조성된 함평군의 장승공원에 있는 장승을 포함시킬 경우 그 수는 크게 늘어날 것이나 민속학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 전남지역에 있는 장승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나주운흥사(羅州雲興寺)석장승

운흥사 남장승으로 남장승에는 ‘上元周將軍’(상원주장군)이 음각돼 있다. 왕방울 눈에 뭉툭한 코, 두툼한 볼살과 콧수염이 인상적이다. 언뜻 보면 무섭게 보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옆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모습이다.

전남 나주시 다도면 암정리에 있는 석장승이다. 1719년에 세워진 것으로 중요민속문화재 제12호로 지정돼 있다. 암정리 운흥마을에서 운흥사로 들어가는 입구 좌우측에 2기(基)가 세워져 있다. 사찰장승으로 남장승에는 ‘上元周將軍’(상원주장군)이, 여장승에는 ‘下元唐將軍’(하원당장군)이라는 명문이 각각 전면에 음각돼 있다.

남장승은 높이가 2.7m에 달한다. 얼굴부위만 조각돼 있는데 매우 해학적인 모습이다. 왕방울 눈에 뭉툭한 코, 두툼한 볼살과 콧수염이 인상적이다. 잡귀를 물리치려면 무서운 모습이어야 하는데, 영 무섭지가 않다. 어찌 보면 귀여운 인상이기도 하다. 성깔이 대단하신 분인데도 틀니를 빼고 있을 때, 언뜻 대할 수 있는 ‘의외의 풀어진 모습’ 같기도 하다.

운흥사 여장승에는 ‘下元唐將軍’(하원당장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몹시 해학적인 표정이다. 장승은 당초 거리나 이정표를 알려주기 위해 세워졌으나 나중에는 불순한 기운을 막아주는 민간신앙의 대상이 됐다.

여장승은 높이가 2.1m이다. 남장승보다 더 섬세하게 조각했다. 둥근 눈망울 주위에는 2개의 띠를 둘러 여성미가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여장승 역시 무섭기보다는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모습이다. 앞에서는 소리를 지르며 꾸지람을 쳐도 뒤쪽으로 손을 끌고 가 찐 고구마를 손에 쥐어주는 시골할머니의 정감을 느끼게 한다.

여장승인 하원당장군의 뒷면에는 ‘化主僧卞學康熙五十八年二月日木行別座金老□伊’(화주승변학강희58년2월일목행별좌김노□이)라는 내용이 음각돼 있다. 화주승 변학과 신도들이 1719년(숙종 45)에 세웠다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장승이 세워진 때가 불분명하지만 이 장승은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어 장승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나주 불회사(羅州 佛會寺) 석장승

불회사 석장승

불회사 석장승은 나주시 다도면 불회사 입구에 서 있는 2기의 돌장승을 일컫는다. 1968년 12월 12일 국가민속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됐다. 남장승은 전체적으로 우락부락한 모습이다. 눈과 코가 깊게 패어있어서 매우 완고하다는 느낌을 준다. 머리에 상투를 튼 모습이다. 몸체 하단에는 ‘下元唐將軍’(하원당장군)이 새겨있다.

이에 반해 여장승은 온화한 모습이다. 남장승에 비해 조각의 선이 얕은 편이어서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 등 전체적인 얼굴 윤곽이 나주 운흥사 석장승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명문과 모습이 운흥사와는 다르다. 운흥사 남장승에 새겨져 있는 ‘上元周將軍’이 불회사의 경우 여장승에 새겨져 있다. 반대로 운흥사 여장승에 있는 ‘下元唐將軍’이 불회사 남장승에 음각돼 있다.

불회사 장승 앞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자리하고 있다.

‘장생은 마을수호신이나 이정표(거리표시) 또는 사찰의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불회사 석장승은 오른쪽이 남장승, 왼쪽이 여장승인데 하반신이 땅에 묻혀있다. 남장승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은 얼굴 조각선이 깊고 인상적이며 입 좌우에 치아가 각 1개씩 노출돼 있다. 머리 가운데가 솟았고 커다란 돌기형 코 선이 특징적이다.

원래 하(下)자가 새겨졌는데 누군가가 추가로 새겨 정(正)자로 보인다. 여장군(周將軍)은 남장승에 비해 얼굴이 온화하다. 웃는 인상이 부드럽고 평면적이다. 이 석장승은 이웃한 운흥사 석장승의 조각형태와 수법이 비슷하다. 이로 보아 운흥사 석장승이 만들어진 강희 58년(1719)을 전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와 토착신앙이 어우러진 흥미로운 문화재이다. 당(唐)은 사당가는 길을 뜻하며, 자는 꼬불꼬불한 길을 뜻한다.’

○운흥·불회사 장승의 사대주의 유산 논쟁

그렇지만 안내문과는 달리 운흥사와 불회사 장승을 ‘중국사대주의를 상징하는 장승’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사)민족사되찾기운동본부(회장·윤두병)는 지난 2007년 8월 불회사에서 ‘돌장승 이대로 둘 것인가’ 현장 세미나를 갖고 “ 운흥사·불회사 장승은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우리나라는 위급할 때나 평화스러울 때나 항상 중국이 지켜주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대주의적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세미나에서 김정권 민족정통사상사 연구소장은 “上元周將軍(상원주장군)이라 새겨진 돌장승은 중국이 기자(箕子)라는 자를 기자조선(箕子朝鮮 · 상고사를 왜곡시킨 허상의 나라)왕으로 봉하여 준 주나라 무왕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下一唐將軍(하일당장군)은 신라와 연합군을 형성,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이적장군을 상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이런 장승을 만들어 사찰로 오가는 길에 세워둔 것은 임진왜란 직후 명나라가 조선을 구해줬다는 사고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사대사상에 물든 조선조정 대신들이 다시 나라를 세워준 명의 은혜(再造之恩)를 잊지말자며 주장군과 당장군 장승을 전국에 보급시켰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장승전문가 강현구 선생은 조금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 강 선생은 한 라디오와의 대담프로에서 “우리가 어딘가 아프면 그 병의 근원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옛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질병은 그 근원지를 찾다보면 중국의 강남 쪽이다. 해서 그 근원지에서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을 상징화 시켜 놓는단 다. 주장군이니 당장군이니 하는 용어를 붙인 이유다. 중국의 질병을 가진 귀신들이 거기서 여기까지 출장 왔는데 그 앞에 자기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장군이 딱 있으면 어쩌겠어. 그냥 돌아가야지” 라고 말했다.

이런 해석은 우리 지역의 장승을 ‘사대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유물’로 바라봐야하는 불편함을 상당히 해소시켜주는 것이다. 불순한 기운의 침범과 질병의 번짐을 막기 위해 우리 조상들이 세운 것으로 알고 있는 장승들이 ‘사대주의의 산물’로 귀결되면 그것처럼 무참한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학문적 차원에서는 ‘장승과 명에 대한 보은의 마음’과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는 이뤄져야 할 필요성이 크다.

○여수 연등동 벅수

남정중벅수

전남 여수시 연등동에는 두 개의 벅수(여수에서는 장승을 벅수로 부르기에 표기는 벅수로 함)가 있다. 길 동쪽에 있는 ‘남정중’(南正重)은 전체 길이 174㎝, 머리 길이 85㎝, 둘레 145㎝의 벅수다. 관모를 쓴 다소 험상한 인상의 벅수다. 눈썹은 치켜져 있고 치켜진 눈매는 날카롭다. 입이 조금 벌어져 있는데 드문드문 이빨이 보인다. 작고 뾰족한 턱수염을 지녔다. 전체적으로 긴장감을 갖게 하는 모습이다.

길 서쪽에는 있는 ‘火正黎’(화정려)는 전체 길이 166㎝, 머리 길이 86㎝, 둘레 130㎝의 벅수다. 왕방울 눈과 매부리 코, 길고 두툼한 귀 등이 여성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화정려 뒷면에는‘戊申四月二十八日 午時立化主 · 主事 金 · 昇’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정조 12년(1788)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수화정려벅수

남정과 화정은 고대 중국의 관직명이다. 중국 한나라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역서조(歷書條)에 따르면 ‘남정’과 ‘화정’은 아주 옛날 중국의 관직명으로 ‘중’과 ‘려’는 사람이 남정과 화정이라는 관직을 맡고 있었다. 화정은 ‘불과 바다를 지키는 신’으로도 표현되는데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여수의 지리적 특성을 감안한 마을수호의 성격이 짙은 벅수라 여겨진다.

○영암쌍계사지(雙溪寺址)장승

보성 해평리 석장승

쌍계사지 장생은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 산18-2에 있다. 폐사된 쌍계사 절터와는 40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주장군(周將軍)의 높이는 2.47m 둘레는 17.5m이다. 당장군(唐將軍) 높이는 3.45m, 둘레는 2.1m다. 쌍계사지 장승은 장방형 자연석 화강암에 괴기스러운 얼굴을 새긴 것으로 매우 수준이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18세기 초로 파악되는 우수한 신앙 조각상으로서, 잡귀 침입을 방지하고 성역 공간을 표시한 금표적 기능을 갖는 유물이며 불교가 민간 신앙을 수용한 예증 자료’라고 실려 있다. 투박하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기법으로 제작돼 운흥사·불회사의 석장승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18세기 초로 파악된다. 1986년 2월 7일 전라남도 민속 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됐다.

신안 고란 석장승

이외에도 무안 총지사지 석장승과 무안 성남리 석장승(務安城南里石長牲),신안 도초면 고란마을의 석장승, 장흥 방촌 석장승, 보성 해평리 석장승 등이 있다. 우리는 옛 장승에서 건강과 평안함을 간구했던 조상들의 간절했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어려운 삶인데도 웃음과 해학을 잃지 않았던 여유를 느낀다.

그렇지만 물질을 쫓아 어떤 경우에는 가족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외면하고 사는 현대인들을 나무라고 있는 듯싶다. 장승은 조상들의 삶과 가치를 헤아릴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장승의 해학적 표정에서 삶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 곳곳에 있는 장승을 찾아 한나절 나들이를 해보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성찰의 기회’ 가 될 것이다.

무안 지사지 석장승

도움말/김두하, 윤두병, 김정권, 강현구

사진제공/정경성, 전남도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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