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4장 광야에서<374>

1619년 2월 23일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유정이 이끄는 명 제국의 남로군과 함께 후금의 수도 허투아라로 진격했다. 허투아라는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에 소재한 청나라 왕조의 발상지로서 누르하치가 후금 도읍지로 정한 곳이다. 허투아라는 후금이 1622년 요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6년 동안 후금의 수도였다. 1636 후금에서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허투아라는 청 왕조가 발흥한 곳이라는 뜻에서 싱징(興京)이라고 불렸다. 강홍립은 외교전략과 중국어에 능통해 적임자로 추천되어 5도도원수로 임명되어, 60세의 고령인데도 사르후 전투에 참가했다.

강홍립은 압록강 중류 창성 땅을 지나 만주 관전에 이르렀고, 부차와 아부달리에서 유정 부대와 합류했다. 이때 이여백은 청하와 요양에서 발기했으며, 양호는 심양, 두송은 푸순 인근 자이피안, 기린하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명 제국군은 사로(四路) 병진 작전을 펴면서 후금군을 압박해 들어갔는데 지휘부가 손발이 맞지 않아 갈팡질팡하는데, 누르하치는 푸순 북방 사르후 산과 강 맞은편의 자이피안 산에서 기병전으로 명의 동로군을 초토화시킨다. 두송의 서로군과 합류하기로 한 북로군이 폭설로 진군이 늦어지자 이 군대 역시 작전을 펴지도 못하고 궤멸된다. 허투일라에 있던 누르하치는 명군이 뒤늦게 사르후 산에 집결한 것을 보고 모래바람 휘날리는 폭풍을 이용해 팔기군의 병력 중 6기갑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다.

“돌격하라! 풍신(風神)작전이다!”

누르하치 군이 돌개바람 작전으로 말을 달리니 기왕의 모래바람과 겹쳐 보병 중심의 명 군대는 눈 한번 제대로 뜨지 못하고, 후금군의 칼에 모조리 목이 달아났다. 이때 조선군의 좌영과 우영 8천명이 전멸했다. 나머지 중영 5천명을 이끌고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했다. 광해군이 비밀리에 전세를 판단해 유리한 쪽에 협력하라고 지시하여 항복한 것이지만, 강홍립은 조선군 총사령관으로서 당연히 부하를 살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 부원수로 함께 참전했던 김경서는 그의 투항을 비판했다. 김경서 <신도비명(神道碑銘)〉에는 강홍립을 오랑캐에 항복한 지조없는 인간으로 묘사했다. 김경서는 임진왜란 시 이여송의 명 원군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운 뒤,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토적을 소탕하는 무훈을 세웠으나, 권율로부터 의령의 남산성을 수비하라는 명을 불복해 계급이 강등되고, 충청도병마절도사 시절에는 군졸을 학대하고 녹훈에 부정이 있다는 혐의로 파직된 적이 있는 굴곡있는 무장이었다. 그가 강홍립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당쟁이 극심했던 당시 사감과 함께 친명배청(親明背淸) 등 정치적 견해에 따른 것이겠지만, 김경서의 유고인 <미산집(眉山集)>은 당시의 사르후 전투상황과 뒷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의 <신도비명> 일부를 인용한다.



-기미년(1619년) 3월에 명군과 약속하여 군대를 이끌고 (조선군이)압록강을 건넜다. 명나라에서 공(公=김경서)에게 깃발·칼·차패(箚牌=표창장)를 하사하고, 방패에 김원수(金元帥)라고 칭하였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 때 공이 조선의 훌륭한 장수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강홍립이 군중(軍中)에 말하기를 “한 진영에 두 명의 원수가 있을 수 없으니, 부원수를 좌영으로 옮긴다”라고 하자, 공이 거절하며 말하기를 “부원수를 도리어 선봉으로 삼습니까?”라고 반발하였다. 강홍립이 다시 명령기를 “우영으로 옮긴다”고 하며 (상감으로부터)밀지를 받았다고 하고, 군중의 일을 모두 혼자 처리하고 부원수에게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행군하여 심하(사르후)에 도착하기 전에 강홍립이 통역관을 적진에 보내서 비밀리에 두 나라 간에 우호 관계를 맺었는데 공은 실로 알지 못했다. 부차령에 도착하여 명군이 앞에, 조선군은 뒤에 있었는데, 오랑캐가 고함치며 갑자기 산의 계곡 사이에서 나타나 철기로 유린하자, 도독 유정은 결사적으로 싸우다 전사했고 유격 교일기는 우리 군대로 도망쳐왔다. 오랑캐가 승세를 타고 좌영을 기습하여, 결사적으로 싸우는 좌영 장수 김응하 목을 쳤다. 그런데도 강홍립이 구하지 않아 공이 격분하여 말하기를 “살아서 뭐하시렵니까?”라고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대들자 강홍립이 부하 군관으로 하여금 공을 잡아당겨서 말에서 내리게 하고, 공이 타는 전마를 빼앗았다. 공이 크게 외치며 “적이 100보 안에 있어서 헛되이 죽을 수 없는데, 도원수께서는 나를 왜 잡아당기십니까?”라고 하자, 공과 상의하지 않고서 공의 이름을 쓰고 말하기를 “저들(후금군)이 우리의 높은 장수를 만나서 상의하려 하는데, 장군이 아니면 갈 사람이 없소”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도원수께서 오랑캐에게 항복하려고 나를 속이려 하십니까?”라고 하자, 강홍립이 발끈해서 말하기를 “명령을 어기면 군령으로 처벌하겠다”고 하고 강제로 글을 전달하게 해서 공이 적진에 들어갔고, 다음날에 전군을 데리고 항복했다. <‘강홍립:사르후 전투에서 포로가 된 후 김경서를 청에 밀고하여 죽게 했다는데, 그는 충신인가 역적인가‘-정묘·병자호란 인용>

강홍립은 김경서를 활용하기도 했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후금과의 화약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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