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95. 내시가 살았던 순천 별량면 척동마을

떵떵거리던 내시가문 위세는 사라지고 집터에는 잡풀만

구한말 쯤, 낙안군 척동마을에 두 내시 내려와 정착
순천시 별량면 원창리 척동마을…‘고자마을’로 불려

식읍으로 받은 땅 많아 낙안 일대 토지 대부분 소유
낙안군수도 부임길에 말에서 내려 내시어른에 인사

사고·거세로 남성 잃은 아이 양자로 들여와 가문이어
70년대 내시가문 완전몰락…고래등 기와집은 뜯겨가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가 그린 내시 인물화. 키스는 1919년 3월 말에 처음 한국을 방문한 후 한국인과 한국의 문화·자연에 깊은 애정을 느끼고 많은 인물과 한국의 풍경, 생활상을 작품에 담았다.

‘그들’의 삶은 참으로 참혹했다. 남성이었지만 ‘남자’로 살수가 없었다. 가혹한 운명이었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 어떤 부모는 아들을 ‘그렇게라도’ 만들면 세상에서 살아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거세(去勢)를 시켰다. 그리고 아들을 궁궐로 보냈다. 바로 환관((宦官:내시)이다. 어떤 남자는 사고로 불구가 되기도 했다. 옛적에는 일을 본 뒤 개로 하여금 사타구니를 핥게 했다. 그런데 개가 아이의 불알을 물어뜯어버리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사고를 당한 그 아이는 고자(鼓子:생식기가 불완전한 남자)가 됐다. 그 아이가 제대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궁궐로 들어가 내시가 되거나 내시의 양아들이 되는 것이었다. 운 좋게 궁궐에서 들어가게 된 아이는 지독한 훈련을 받았다. 왕을 곁에서 모시려면 왕실의 법도를 알아야 했고 학문의 깊이도 상당해야 했다. 그래야 왕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왕의 눈높이에 맞는 처세와 조언을 할 수 있었다.

왕의 최측근으로서의 내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의 한 축이기도 했다. 내시는 남자로서의 구실을 못할 뿐이었다. 남자로서의 야망까지도 거세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내시들은 권력을 잡아, ‘정상적인 남자들’을 부리면서 지배욕을 만끽하기도 했다. 비록 호랑이의 위세를 앞세운 여우(狐假虎威)였지만 그들은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왕의 입과 귀가 돼 왕을 보호했다. 어떤 경우에는 반정세력의 첩자가 돼 권력을 뒤엎은 일에 나서기도 했다.

순천시 별량면원창리 척동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마을 표지석.

내시들의 관서인 내시부(內侍府)는 한양 북부의 준수 방에 있었다. 준수 방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효자동 일대에 위치해 있던 건물이다. 궁 안에는 내시들이 머무른 내반원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내반원은 내시부의 파견 소 같은 곳으로 왕을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내시부의 핵심인물들이 있었다 .

내시는 궁에서 먹고 자는 장번(長番) 내시와 출퇴근하는 출입번(出入番) 내시가 있었다. 장번 내시도 일정 기간 종사하고 나면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궁 밖으로 나온 내시들은 가정을 꾸리고 생활했는데 지금의 종로구 봉익·운니동, 은평구 신사·응암동, 서대문구 연희·가좌동 일대가 그들이 주로 살던 곳이다.

또 현직에서 물러난 내시들은 양주·고양·남양주·과천·용인·안양·파주 등 서울과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또 어떤 내시들은 자신들의 고향이나 왕이 하사한 땅(食邑)에 내려와 자리 잡았다. 전라도 땅 순천에도 낙향한 내시가 자리를 잡고 살았던 터가 있다. 그 터는 순천시 별량면 원창리 척동마을에 있다.

■ 척동마을

○‘고자마을’이라 불리는 척동마을

옥녀봉 중턱에서 내려다본 척동마을(별량면사무소 김민규씨 제공)

벌교를 지나 순천으로 가는 국도 2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척동마을로 좌회전해 들어가는 길이 있다. 척동마을은 마을 뒤에 있는 옥녀봉을 배산(背山)으로 해 앞쪽으로는 순천만을 임수(臨水)로, 원창들을 앞뜰로 삼고 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싱싱한 해산물과 너른 들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많아 천혜의 자연조건을 지닌 마을이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생산되는 것이 많아 이곳 백성들이 그만큼 수탈에 시달렸음이 분명하다. 또 해안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이라 왜구의 노략질에 자주 화를 입었으리라 여겨진다. 척동마을은 5개 반(班)으로 나눠질 만큼 큰 동네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150여 가구가 살던, 별량면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척동마을은 다른 마을과는 달리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낭청(종6품)벼슬에 오른 두 명의 내시가 낙향해 살면서 마을 전체가 내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두 명의 내시가 떵떵거리며 권세를 부리고, 또 마을 사람들은 그 내시들의 땅에 기대 농사를 지었던 탓에 주변 사람들은 척동마을을 ‘고자마을’이라 불렀다. 지금 환갑을 넘긴 척동마을 사람들은 예전에 다른 마을에 가면 “고자마을 사람이구먼~”하는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척동마을로 들어온 두 내시와 내시가문

변낭청 가옥 앞에서 척동마을 내시가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송완섭이장(우측)과 최혁 주필. 펜스 너머의 땅 3천여 평에 변낭청의 기와집 4~5채가 들어서 있었다. 우측 끝 능선이 잿등이고 가운데 보이는 능선이 옥녀봉이다.

척동마을에 터를 잡은 두 명의 내시는 이름은 분명치 않다. 척동마을 송완섭이장(1957년 생)은 두 내시가문을 시작한 사람을 단지 ‘문낭청’과 ‘변낭청’으로 불렀다. 그렇지만 이들이 낙향한 뒤 최초로 척동마을에 들어온 내시인지, 아니면 중간에 내시가문에 들어간 후손들을 일컫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한편 지난 2005년 발간된 <순천별량향토지>에는 척동마을 내시 가문의 내림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실려 있다.

‘조선말 내시 제도가 폐지되면서 내시가 입향했다고 전하는데 변차관, 문교관, 김낭청으로 이어져 왔고 김낭청 아래로 최복철-박종준, 최복선-박봉화로 이어져 왔다. 또 다른 계파는 남준호, 문경호, 박인수, 김종열로 이어져왔다.’

이 기록으로만 보면 척동마을에 들어온 내시가문의 시조는 변차관과 남준호이다. 송이장이 말한 ‘문낭청, 변낭청’과는 다르다. 척동마을에 입향한 내시가문의 시조가 누구인지 정확히 헤아리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남아있는 자료로만 보면 척동마을에 내시가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말이다.

일제가 내시부를 비롯한 대한제국의 모든 관제를 없애버린 1908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이는 ‘낙안군수가 부임할 때 척동마을 앞을 지날 때면 말에서 내려 척동마을 두 내시에게 문안을 드리고 갔다’는 구전을 들어 그보다 훨씬 이전에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한제국 말에 내시가 들어왔다는 <순천별량향토지>기록은 좀 더 보완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800년대에 낙안군에는 명례궁(明禮宮) 소유의 전답이 25결 이상이 있었다. 조세 수취의 단위인 1결은 곡식 1결(4두, 斗)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의 면적을 말한다. 300여마지기 이상의 전답이었다고 생각된다.

문낭청 고택터. 뒷편 2층 양옥집이 있는 곳에 기와집이 있었다.

명례궁은 임진왜란 이후 왕실에서 사용되는 내탕(內帑:물자)을 마련하고 관리하던 궁가(宮家)다. 조선전기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던 곳에 세워졌다. 명례궁 소속의 재산은 내시부에서 관장했다. 이는 낙안군 일대 명례궁 소유 토지를 관리하던 나이든 내시가 궁을 떠나면서 낙안군 척동마을 일대 땅을 하사받아 1908년 훨씬 이전에, 척동마을로 들어왔을 개연성을 품고 있다.

두 명의 내시가 무슨 이유로 한양 주변의 고을로 낙향하지 않고 머나먼 낙안 땅까지 내려왔는지는 헤아릴 길이 없다. 척동마을은 지금은 순천시 별량면에 속해있지만 1914년 이전만 하더라도 낙안군 초상면에 속해있었다. 왕이 낙안에 있는 논과 밭·산을 식읍(食邑:하사한 토지)으로 주었던지, 아니면 낙안 척동마을이 두 내시의 고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두 사람은 상당한 토지를 하사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척동마을 노인들이 “두 내시가문의 땅을 밟지 않고는 낙안 땅에 발을 디딜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해지고 있어서이다. 척동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이 두 명의 내시 논밭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흉년이 들어 기근이 들면 고래 등 같은 내시의 기와집 대문 앞에 바가지를 들고 식량을 꾸러 온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는 것이다.

척동마을 그림지도(순천별량향토지). 잿등 아래 가옥과 가옥 중간에 비어있는 빈공간이 변낭청 기와집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척동마을의 유래와 내시가문의 몰락이 가져온 난개발

지난 2005년 발간된 <순천별량향토지>에는 척동마을에 대한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동네이름은 물레 자새처럼 생겼다 해서 자작 골이라 했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좌척동(坐尺洞)이다. 좌척동이 줄어 척동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척동은 잿몰이라 한다. 잿몰은 대체로 성곽이 있는 동네를 말하는데 이곳에는 성터가 없다.’

척동마을은 최근 몸살을 앓고 있다. 수 년 전 척동마을 뒤쪽 옥녀봉 중턱을 깎아 문화마을이 조성됐다. 또 얼마 전에는 원창리 야산에 14기의 묘지허가가 나면서 주민들의 시름이 커지고 있다. 마을주민과 재경척동서울향우회를 중심으로 묘지허가취소를 행정기관에 요구하고 있지만 그리 간단치가 않은 일이다.

척동마을 일대 야산이 내시가문 소유였을 때 마을 야산에 무덤이 들어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시가문은 동네 일대에 무덤이 들어서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그 누구도 세도가 당당한 내시가문의 신경을 거스르고 마을 인근 야산에 무덤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척동마을 인근 야산에는 무덤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내시가문이 몰락하면서 척동마을 일대 야산 대부분이 외지인 손에 넘어갔다. 야산개발이 가능해진 이유다. 척동마을 주민들은 울창한 솔숲 대신 들어서 있는 문화마을을 보면 가슴이 아리고 걱정이 크다. 산허리가 뭉텅이로 깎인 탓에 보기가 영 흉하다. 폭우가 내리는 날이면 행여나 산사태가 날까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문낭청과 변낭청 가문사람들

척동마을 송완섭 이장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송이장의 설명에 따라 작가는 일단 1908년 이후 이 마을에 살고 있던 두 집안의 내시를 ‘문낭청 가문과 변낭청 가문’으로 상정했다(다른 정확한 기록이 나오면 그때 수정키로 한다). 문 낭청 가문은 척동마을에 터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몰락해버렸다고 한다. 문 낭청 집터에는 오래 전 2층 양옥이 들어서 있다. 그곳에 떵떵거리며 살던 내시대감의 고래 등 기와집이 있었을 것이라 상상하기가 힘들다.

변낭청 기와집 터. 고래등같은 기와집 다섯채 정도가 있었다.

변낭청의 집터 역시 마찬가지다. 송 이장은 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변낭청의 집은 기와집 4~5채 정도가 처마를 맞대고 있었으며 매우 크고 웅장해 집에 들어서면 저절로 몸이 움츠려질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시가문의 특성상 양자가 들어올 때마다 재산이 쉽게 축이 나 결국 1990년대에 몰락이 시작됐다고 한다.

변낭청의 1900년대 가문은 변태관-김재창-최복철·최복선-박홍래-박동선으로 이어졌다. 내시가문은 남편들이 정자가 없어 여자들이 생산을 할 수 없었던 탓에 양자를 들여와 가문을 이었다. 후천적으로 고자가 된 아이를 수소문해 양자를 삼았다고 한다. 내밀한 속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고자였다 하더라도 발기가 가능해 부부간에 성생활은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사정(射精)을 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던 내시집안 남자들이 아내의 가슴과 어깨를 물어뜯는 바람에 시집온 지 몇 달 만에 도망가는 여자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척동길 32번지는 과거 변낭청의 집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순천에 사는 약국주인의 소유다.

변낭청 내시가문의 그 많던 땅과 재산은 양자들이 대를 이을 때마다 양자를 들여온 집안과 처가 쪽으로 새나가곤 했다. 또 소작을 주었던 상당수 토지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때 주인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강제수용 당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토지와 척동마을의 집터는 마지막 후손이었던 박동선씨 대에 와서 모두 남의 것이 되고 말았다.

박동선씨의 친인척들은 순천과 서울 등지에 여관을 사놓으면 장차 큰 재산이 될 것이라고 박씨를 설득해 거금을 가져갔다고 한다. 박씨는 집을 저당 잡히고 논을 팔아 그 돈을 마련했는데 나중에 등기부를 확인해보니 모두 돈을 가져간 친인척들의 명의로 돼 있었다고 한다. 사정이 어려워지자 고래 등 같은 기와집도 그대로 뜯어 팔았다는 것이다.

변낭청 기와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과거 대문이 있었던 곳으로 길게 뻗어있는 토담이다.

송 이장은 자신이 초등학교 다닐 때 사람들이 몰려와 변낭청 내시집의 기와집을 뜯어가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기둥과 벽 등에 일일이 번호표를 붙인 뒤 차근차근 집을 헐어냈다고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시 용인자연농원(지금의 용인에버랜드)측에 팔려간 것으로 안다고 당시의 기억을 회상했다.

변낭청의 기와집은 지금 척동 길 32번지 안쪽의 3천여 평 대지에 있었다. 지금의 주인은 순천에서 약국을 하고 있는 김모씨다. 김모씨는 예전에 기와집이 있었던 곳에 창고를 지어놓고 필요한 자재들을 보관하고 있다. 지금 놀려두고 있는 내시집터에는 소나무 몇 그루만 자리하고 있다. 한쪽에는 파가 심어져 있다. 예전 낙안 땅에서 떵떵거리던 내시가문의 위세는 찾아볼 길이 없다.

척동마을 정자가 있는 곳은 과거에 연못과 큰 느티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송완섭 이장이 느티나무 밑둥을 가리키고 있다.

변낭청의 기와집 흔적은 긴 흙담에서 겨우 찾아볼 수 있다. 2미터 높이의 흙담은 길이가 30여 미터에 달하는데 담 아랫 부분은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오래된 돌이었다. 흙담 끝 대문 부근에서는 변낭청 집에 있었다는 2개의 우물중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우물 역시 폐정(廢井)된지 오래된 듯 근처에는 쓰레기 더미만 가득 쌓여있었다.

○별량면 상림리 비석군에 있는 (내시가문)시혜기념비

별량면 상림리에 있는 비석군

척동마을에서 2㎞ 정도 떨어진 별량면 상림리 비석군에는 두 명의 내시가문 사람 이름이 등장하는 비가 있다. 10개의 비 중 하나에는 ‘행내시부통훈대부김재창씨시혜기념비’(行內侍府通訓大夫金再昌氏施惠紀念碑)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를 세운 날자는 上元壬戌五月二十五日(상원임술오월이십오일)이다.

그 옆에는 ‘통훈대부야은김공재창시혜비’(通訓大夫野隱金公再昌施惠碑)가 세워져 있는데 두개의 비는 김재창이라는 동일인물의 은공을 기리는 비다. 또 다른 비는 김기홍이라는 (내시가문)사람의 은공을 기리는 비다. 비에는 ‘行內侍府通訓太元 金基洪救?碑’(행내시부통훈태원김기홍구휼비)라는 글이 음각돼 있다. 두 사람 모두 <순천별량향토지> 척동마을 입향내시 관련 글에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다.

동양사상과 향토사연구에 천착하고 있는 정종민건축사는 2018년 펴낸 <건축사의 눈으로 본 문화유산 다시 읽는 순천인문학>책에서 ‘김기창이라는 인물’과 ‘상림리 비석 비문에 근거한 내시입향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김기창은 약 8,000석 부자였다고 한다. 흉년에 면민의 세금을 내주고 소작농 수곡을 감해주고 송광사에서 세운 벌교 송명학교 부지로 논 3마지기(약 1,000여 평)을 기부했다. 낙안향교 중건 시에도 상당한 기부를 하였다고 1923년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상림리 비석의 기록에 의하면 별량면 척동에 내시가 정착한 시기는 1700년대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양에서 멀고 먼 척동까지 내려와 정착한 까닭이 궁금하다. 벌교읍지를 보면 1846년 식읍으로 명례궁 전답이 초천면, 남상면, 고상면 3개면 13개 들에 139필지27결 2복6속이나 되고, 1896년에는 25결 71복 7속이 있으며 1901년에는 순빈궁 토지가 10결 42복(182마지기)이나 읍내면, 동상면, 동하면, 내서면, 초상면, 남상면, 남하면, 고상면 9개면에 걸쳐 있다고 기록한 것과 동화사 계곡에서 흘러내려 두무포로 들어가는 계곡에 궁보라는 지명도 있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하고 지명을 볼 때 척동에 내시가 살았던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정종민건축사가 상림리 비석 어느 부분에서 단초를 얻어 ‘척동에 내시가 정착한 시기는 1700년대’로 추정했는지가 궁금하다. 나중에 정종민건축사를 만나게 되면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재창시혜기념비에 나오는 ‘上元壬戌’글자에서 비롯된 것일까? 갸웃해보지만 역술에 기초한 산력(算曆)에 어두운 작가라 헤아려보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렇지만 ‘金再昌氏’(김재창씨)라는 표현에서 보듯 ‘氏’(씨)라는 한자는 최근에 사용된 것이어서 비석을 세운 연대는 1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얄팍한 지식이 안타까울 뿐이다. 송완섭 이장은 상림리 비석군에서 500여m 떨어진 마산3거리에도 내시가문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보이는 비가 있다며 그곳으로 작가를 안내했다. 하지만 비바람에 시달려 음각된 글들이 너무 손상이 심한 상태여서 읽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별량면 마산삼거리에 있는 내시가문 관련 비.

■나주출신 내시 김자원

어느 시대에도 충신과 간신이 있다. 내시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왕을 보필해 어진 임금이 되도록 애쓴 내시가 있는 가하면 온갖 교언영색으로 왕을 홀려 결과적으로 나라를 어지럽게 한 내시들이 있다. 내시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큰 것은 사극(史劇)이나 영화를 통해 교활하고 간사한 내시들을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상당수 작가들은 왕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외적요인으로 거짓말과 술수에 능한 내시들을 등장시키는 장치를 사용하고 있다. 왕의 비이성적인 태도와 몰락을 이해시키는데 ‘교활한 내시’만큼 적합한 배경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두 사람의 대비되는 내시가 등장하는데 한 사람은 간신 김자원(金子猿)이고 다른 이는 충신 김처선(金處善)이다.

김자원과 김처선은 조선 연산군 때의 내시다. 직책으로 보면 김처선이 윗사람이었다. 김처선은 판내시부사(내시부의 우두머리)와 상선(尙膳:종2품 벼슬)을 겸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김자원의 품계는 4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판내시부사가 부럽지 않은 내시였다. 김자원은 왕의 뜻을 전하는 승전내시였던 것이다. 승전내시는 ‘왕의 입’ 역할을 하는 이로 ‘승전색’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 정사와 관련된 왕의 공식적인 명령은 승정원(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일을 하는 부서)의 관료들이 맡았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왕의 지시나 말을 궁궐안의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승전색의 일이었다. 또 왕명의 출납은 승정원의 관리들이 했지만 승정원에서 왕의 처소까지 문서를 전달하고 다시 왕명을 가져가는 것은 승전색의 업무였다.

김자원은 4대 왕 세종 때부터 연산군까지 무려 일곱 명이나 되는 왕들을 모신 내시였다. 얼마나 노회했던 내시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자원은 눈치가 빠른 내시였다. 요즘말로 하면 ‘심기경호’에 뛰어났던 것이다. 그는 성종과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아 오랫동안 왕의 지시나 명령을 전달하는 승전내시로 일했다. 대신들은 김자원을 통하지 않고는 왕을 대할 수가 없었다. ‘문고리 권력’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말 주변도 뛰어나 주변 사람의 마음을 쉽게 움직이는 내시였다고 전해진다. 눈치가 빠르고 언변이 좋았으니, 모셨던 왕들을 얼마나 편하게 모셨겠는 지를 헤아릴 수 있다. 김자원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벼슬이 높이 올라가거나 낮아지는 일이 있으니 모두들 그를 치켜세우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다. 김자원이 승정원에 출입할 때면 모든 승지가 머리를 숙여야 했다고 전해진다.

나주 관아에서는 나주 김자원의 본가일대에 여러 채의 집을 지어주기까지 했다. 김자원은 종 출신인 어떤 여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처갓집 사람들이 궁궐 곳곳에 들어와 김자원의 권세를 믿고 날뛰었다고 한다.

김자원의 최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김자원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목숨을 잃을 것을 두려워해 밖의 동정을 살핀다는 이유로 궁을 빠져나가 몸을 숨겼다. <조선왕조실록>은 ‘김자원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인도한 대표적인 간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처선은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내시였다. 김처선은 연산군이 음탕한 내용인 처용놀이를 하며 음행을 일삼자 이를 중단할 것을 간언했다. 당시 조정대신들은 바른 말을 하면 연산군이 목숨을 빼앗을 까봐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런데 내시부의 총책임자인 김처선이 이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1505년(연산군 11) 어느 날, 김처선은 연산군이 또 궁중에서 처용놀이를 하면 음란하게 굴자 “이 늙은 신이 네 임금을 섬겼습니다. 경서와 사서를 익혀 대강의 역사를 또한 압니다. 그렇지만 고금에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이를 중지해주옵소서”라고 직간했다.

김처선이 자신을 나무라고 나서자 화가 치민 연산군은 김처선을 활로 쐈다. 그리고 혀와 다리를 자를 것을 명했다. 그리고 죽은 김처선의 부모 묘도 파헤치도록 했다. 김처선의 이름인 ‘處’자와 ‘善’자도 사용하지 못하게끔 했다. 그 바람에 김처선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개명해야 했다. 중종반정 이후 김처선은 직간을 하는 충신으로 다시 자리매김됐다.

■내시의 기원

내시(內侍)를 뜻하는 단어는 환관(宦官), 환자(宦者), 화자(火者), 내관(內官), 환시(宦寺)·환수(宦竪), 엄인, 혼관, 혼시, 엄시, 엄수, 폐환(嬖宦), 중환(中宦)·내환(內宦), 시인(寺人), 황문(黃門), 중사(中使), 총환(寵宦) 등이다. 일반적으로 고려·조선시대 왕의 곁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남성이 거세된 이들을 뜻한다.

‘궁중에서 일하는 거세된 남자’를 뜻하는 문자는 중국은 왕조의 갑골문자에서 등장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환관이 있었다는 증거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9세기 신라 흥덕왕때 환관내시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환관에 대한 유래는 통일신라시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10 흥덕왕 원년에 ‘冬十二月……不親女侍 左右使令 唯宦竪而己’는 기록이 있다. ‘흥덕왕의 왕비가 죽자 왕이 궁녀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이에 주위에는 환관들만 존재했다’는 내용이다.

내시와 환관을 혼용하고 있지만 원래 내시와 환관은 근본이 다르다. ‘내시’라는 직은 고려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명문가 자제들이 차지하던 최고 관직이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해동공자로 불리며 고려유학을 발전시킨 최충의 손자 최사추,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 청백리로 유명한 임개 등이 내시 직을 역임한 인물들이다.

외모가 빼어나고 학문이 깊어야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내시 직이었다. 고려조정에서 내시 출신으로 재상에 오른 인물이 22명에 달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뛰어난 인물들이 내시 직을 수행했는지 알 수 있다. 내시들은 왕과 함께 나라의 주요 일들을 처리하는, 엘리트 관료였으나 환관들은 왕의 곁에서 심부름을 하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 불과했다.

당시 고려조정에 있었던 환관들은 10여명이었다. 환관들이 하는 일은 음식물 감독이나 궐문을 지키는 일, 청소, 잡심부름 등이었다. 물론 환관들은 생리적으로 남자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궁녀들이 많은 궁궐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여성들과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남자는 궁에서 있을 수가 없었다. 생리적으로 고자여야 했다.

그러나 고려조정이 원나라의 간섭을 받을 때 환관의 세력이 커졌다. 1300년(충렬왕 26)에 고려조정은 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요구에 따라 환관 수 명을 친정인 원나라 세조(世祖)에게 보냈다. 이들 고려출신 환관들은 원나라 황실의 총애를 받으면서부터 고려조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충선왕 때의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방신우(方臣祐)·이대순(李大順), 충혜왕 때의 고용보(高龍普) 등이 원의 위세를 믿고 기고만장해 하던 환관들이다. 이들 환관들은 원나라 사신으로 와서 고려의 벼슬자리를 받기도 했으며 친인척들을 관직에 앉히기도 했다. 또 고려국왕에게 압력을 가해 자신의 고향을 현·부곡에서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특히 백안독고사는 원나라 영종(英宗)을 부추켜 원한을 품고 있던 충선왕을 토번(吐蕃:지금의 티벳)으로 귀양보내기까지 했다.

세력이 커진 고려 환관들은 왕을 움직여 환관의 관청인 내시부(內侍府)를 설치토록 했다. 1356년(공민왕 5)의 일이다. 환관직도 내첨사(內詹事)·내상시(內常侍)·내시감(內侍監)·내승직(內承直)·내급사(內給事)·궁위승(宮?丞)·해관령(奚官令) 등 7종으로 나눠졌다. 내시의 품계는 정2품에서 종9품 통사(通事)에 이르렀다. 내시의 수도 121명에 달했다.

왕조가 바뀐 조선조에도 내시들은 내시부에 소속됐다. 내시부 내시는 보통 140명이었다. 공식적인 일은 왕이 먹고 마실 음식과 차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왕이 사냥할 때 쓰는 매를 기르는 내시도 있었다. 내시는 궁궐에서 사용되는 각종 물건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왕실의 재산과 토지를 관리·감독하는 일까지 맡았다. 왕의 모든 은밀한 일에 개입하고 재산까지 책임지고 있었으니 최고 권력이랄 수 있다.

도움말/정종민, 송완섭, 박홍갑

사진제공/김민규, 순천시별량면사무소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